96화 요새 잠행(4)
남궁진이 밖으로 나오자 무사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잠입자나 수상한 낌새는 보고된 것 없습니다.”
“알았다.”
‘이상하군. 놈들이 나타날 시간이 됐는데.’
남궁진은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어서 떨쳐 버렸다.
자신이 직접 설계한 오가연맹 요새.
요새의 경비는 철통같이 완벽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속하지 않는 삼류 무림인들이 감히 넘볼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다니… 설마 요새를 우회해서 도망쳤다는 말인가? 그럼 소림사로 가는 데 한 달이 더 넘게 걸릴 텐데?
“염려 마시지요. 언제 공자의 계책이 빗나간 적이 있습니까?”
남궁진을 따라 나온 모용화정이 그의 기를 살려 주려는지 그렇게 말했다.
남궁진은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여인들이란 사내에게 한 번 마음을 빼앗기면 하늘처럼 여기게 마련. 그는 요새에 한 명 있는 홍일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정복감에 취했다.
그러나 모용화정의 마음속은 달랐다.
남궁진의 예측이 깨지자 그녀는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남궁진의 콧대가 꺾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금 기를 세워 주면 남궁진이 무너질 때 더욱 꼴이 볼 만할 터!
“혹시 이미 요새에 잠입한 것 아닐까요?”
모용화정은 무심코 말했는데, 실은 여인 특유의 육감이 진상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그럴 리가.”
남궁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되새겼다. 모용화정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과도하게 완벽을 꾀하는 성품 때문이었다.
“만약 놈들이 잠입했다면 왜 망루 경비들이 아무도 신호를 울리지 않는 거지?”
“아무도 발견 못 했을 수도 있지요.”
“…….”
남궁진은 말도 안 된다고 웃어넘기려다 생각을 바꿨다.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림사행 놈들이 정말 요새 안에 있다면 아직 발각되지 않았다는 뜻.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궁진이 다시 여유를 되찾고 씨익 웃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요. 인질은 요새 최북단의 창고에 있소. 결국 놈들은 호랑이굴에 제 발로 뛰어드는 셈이 아니고 무엇이오?”
남궁진의 이번 말은 그답지 않게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였다.
모용화정이 슬쩍 그 점을 지적했다.
“놈들이 인질을 구하지 않으면요?”
“…….”
“강호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놈들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답시고 인질을 놔둔 채 요새 북쪽으로 빠져나간다면요?”
모용화정의 말이 정곡을 찔렀지만 남궁진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 대답했다.
“내 허락 없이 후문을 통과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오.”
남궁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속 조각 몇 개를 이어붙인 듯한 열쇠였는데, 어른 손바닥만큼 클 뿐 아니라 기괴하게 생긴 모양이 흑도가 쓰는 기형도(奇形刀)를 연상케 했다.
“산동성의 장인을 시켜서 특수 제작한 열쇠요.”
“그렇군요.”
‘남궁세가가 산동성의 열쇠 장인을 잡아다가 강제로 만들게 했군. 물론 제작이 끝나자 입을 막기 위해 장인은 죽였을 테고.’
모용화정은 머릿속으로 짐작했는데, 실제 그 예측은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후문은 이 열쇠가 있어야 열 수 있소. 설령 요새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더라도 열쇠가 없으면 열지 못하오.”
“호오, 그렇군요.”
모용화정은 감탄하는 투로 말했지만 내심 남궁진의 교활함에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모용화정을 비롯해서 악관비, 팽자걸, 언자성까지 네 곳의 세가 사람들은 모두 정문을 통해 요새로 들어왔다.
당시 남궁세가를 제외한 네 곳 세가는 모두 요새의 동북쪽에 있기 때문에 길을 빙 돌아와야 했다. 후문으로 오면 좀 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남궁진이 요새의 웅장함을 자랑하려고 일부러 정문으로 부른 건 줄 알았다. 이후 후문이 열릴 때는 반드시 남궁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모용화정은 항상 굳게 닫혀 있는 후문을 열 방법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후문에 그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니…….
모용화정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궁진의 자존심을 살살 긁은 효과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소득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남궁진이 모용화정을 얕보고 있다는 사실.
모용화정을 경쟁자로 봤다면 자기 입으로 후문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으리라. 남궁진은 악관비, 팽자걸, 언자성과는 달리 모용화정은 잠자리 상대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여인을 품에 안으면 정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인은 잠자리를 미끼로 사내를 속이는 법!
사마귀는 교미가 끝나면 암컷이 지친 수컷을 잡아먹는다.
모용화정은 사마귀 같은 여인이었다.
‘나를 우습게 본 빚은 톡톡히 갚아 주마. 그때 네 얼굴이 얼마나 황망할지 눈에 선하구나, 오호호호!’
* * *
저녁밥을 먹은 산동악가의 무사들이 배를 두드리며 공동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요새 경비를 더 강화했다지?”
“어떤 놈들이 잠입할지 모른다고 하더군.”
“쳇, 남궁세가 파락호 놈. 망루를 빼곡하게 세워 놓고 뭐가 또 부족해서 경비를 강화해?”
“우리만 죽어나는 거지.”
그때 그림자 진 곳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팔 척 가까운 키에 쌍창을 등에 멘 자.
바로 오가연맹 다섯 고수 중 하나인 악관비였다.
척! 무사들이 화들짝 놀라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무슨 얘기들 하고 있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후후, 우리끼리는 말 돌리지 않아도 된다. 남궁진 놈이 사내답지 않고 좀스럽지.”
악관비는 잔인한 성품으로 악명 높았지만 평소 자기 세가 사람들에게는 잘해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도 어쩌냐?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네!”
악관비가 남궁진 욕을 맞장구 치고 넘어가자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몇 발짝 가던 악관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방금 후문 쪽으로 가던 놈들 두 명 말이다. 이름이 뭐지?”
“그게… 다른 세가 놈들이라서 이름은 모릅니다.”
“한 놈이 키가 좀 작아 보이던데?”
“그랬습니까?”
“알았다. 수고해라.”
악관비는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굳이 더 물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한 낌새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했어.’
마치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본 듯한 기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악관비는 두 무사가 사라진 방향을 좇아서 걸음을 옮겼다.
* * *
서백과 주은리는 후문에 있는 창고에 도착했다.
때마침 어둠 속에서 초랑이 나타났다.
초랑은 꼬리를 두 번 흔들었다. 송현과 왕이삼이 조사한 건물들에 인질이 없다는 뜻.
그렇다면 남은 곳은 하나뿐. 눈앞에 있는 창고에 왕일과 왕이가 붙잡혀 있으리라.
그를 증명하듯이 창고는 경비 숫자가 다른 건물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더는 신호 보낼 필요가 없어지자 초랑은 주은리의 몸을 타고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송현과 왕이삼도 창고로 올 테니 그때 합류하면 될 터.
창고는 요(凹) 자 모양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세 개가 이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서백과 주은리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면서 창고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이동했다.
예상이 맞았다. 안 그래도 칼바람이 부는데 창고의 들어간 구역은 그늘까지 져서 추위가 심했다. 무사들 대부분은 창고의 앞만 지키느라, 뒤쪽 구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효력이 다한 부적은 떼어 버렸다.
괜히 붙이고 있다가 제한 시간이 다한 것을 모르고 들키는 실수를 저지르면 곤란했다.
요새의 건물은 모두 나무로 지은 것이라 삐죽 튀어나온 곳이 많았다.
서백은 몸을 날려서 튀어나온 곳을 잡았다. 계속해서 창고 벽을 차고 튀어나온 곳을 잡으면서 단숨에 위로 올라갔다.
서백이 올라가는 경로를 찾자 경신법이 뛰어난 주은리도 어렵지 않게 따라서 올라왔다.
창고는 다른 건물보다 더욱 거대했다. 때문에 폭설이 쌓이지 않게 지붕이 세모난 모양이었고, 세모난 지붕과 천정 사이에 다락처럼 난 공간이 있었다.
마침 습기가 빠지라고 만든 환풍구가 보였다.
어른이 들어가기에는 다소 비좁은 구멍.
그러나 서백은 소년이고 주은리는 가냘픈 여인이라 구멍을 통과하는 데 문제없어 보였다.
서백은 구멍에 걸리지 않게 대검을 먼저 넣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은리도 몸에 멘 짐을 안으로 던지고 뒤따라왔다.
왕이삼 대신 주은리가 같은 조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왕이삼이었다면 이번에는 배가 걸려서 빼지도 못하고 중간에 끼었으리라.
석가심결 시전.
어둠 속이 대낮처럼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락은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고 곳곳에 거미줄이 얽혀 있었다.
거미줄이 쳐져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였다.
다락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나무로 지은 창고는 발을 잘못 디디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
그러나 서백과 주은리는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준의 경신법 고수.
둘은 소리 없이 다락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나무로 지은 창고라 소리를 주의해야 하는 반면, 좋은 점도 있었다. 나무 틈새 사이로 창고 내부가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다.
서백은 무릎을 꿇고 얼굴이 바닥에 닿도록 몸을 숙였다.
입구 쪽에 의자 두 개가 보였다. 왕일과 왕이가 의자에 앉은 채 포박되어 있는 것이었다.
‘찾았군.’
잠입은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인질 구출과 요새 탈출.
그런데 창고 내부가 어딘가 기괴했다.
창고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자루는 얼마나 많은지 세 방위의 벽면에 쌓여서 천정까지 닿을 정도였다.
또한 중앙에는 괴이한 기관장치가 있었다.
기관장치는 넓은 창고의 절반가량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거대했다. 제갈세가의 사자상은 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감에 불과할 정도.
무사들은 끙끙대며 자루를 옮겼다. 그들은 자루를 풀어서 안에 든 내용물을 삽으로 뜬 다음 깔대기처럼 생긴 기관장치 안에 넣었다.
그러자 기분 나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
거름밭이나 측간에서나 풍길 법한 냄새.
그때 무사 하나가 삽을 잘못 휘둘러서 기관장치와 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조심해라!”
무사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호통을 쳤다.
“실수했다간 네놈 하나가 아니라 창고가 몽땅 날아간다! 아니, 요새 전체가 불바다가 된단 말이다!”
순간 서백은 창고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수장은 불꽃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또한 요새가 날아갈 만큼 폭발할 거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게다가 거름밭 냄새 말고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 냄새였다. 사천의 관문인 촉도관에서…….
그 모든 것을 합치면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벽력탄.’
창고에 쌓여 있는 자루는 아마도 벽력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일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기관장치는 벽력탄을 제조하는 기계이리라.
소림사와 무림맹에 반기를 든 오가연맹.
그들은 비밀리에 벽력탄 제조 시설을 만들어서 중원 무림을 집어삼킬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