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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95화 (95/123)

95화 요새 잠행(3)

남궁세가의 호법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남궁진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 보고했다.

“공자, 술시(戌時, 오후 7시-9시)가 됐습니다.”

그러자 방안에서 들려오던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멈추더니 남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놈들은?”

“아직 이렇다 할 낌새는 발견된 것 없습니다.”

“알았다. 경비를 절대 소홀히 하지 마라.”

“존명!”

호법이 가 버리자 남궁진은 땀범벅이 된 몸을 닦고 의복을 걸쳤다.

모용화정이 침상에 누운 채로 물었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시간이 됐소. 놈들이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 이후에는 반드시 잠입을 시도할 테니까.”

“망루가 감시하고 있는데 무얼 서두르십니까?”

모용화정의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뭇 사내들이 듣는다면 절대 침상을 떠나지 못할 만큼 교태가 흘러넘쳤다.

하지만 남궁진은 허리춤에 검을 차고 몸을 돌렸다.

남궁진이 떠나려 하자 모용화정은 자기도 모르게 질투심이 일었다. 여인은 사내가 자기만 생각하도록 만들지 못하면 애가 타는 법.

“삼백 명의 무사들이 도산검림을 펼칠 텐데 굳이 공자가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무사들은 잘 쳐 줘야 일류밖에 못 되는 피라미들이오. 잠입한 놈들 중 고수가 있다면 능히 일백 명은 상대할 것이오.”

“그래서 고수는 직접 상대하시겠다?”

“물론이오.”

남궁진은 여인을 품에 안는 것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은 공포에 떠는 적의 눈을 보며 목을 베는 것!

그 재미를 부하 무사들이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때문에 모용화정을 뒤에 두고 냉정하게 몸을 돌린 것이었다.

“아까는 삼백이란 숫자를 강조하시더니 실은 무사들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당연하오. 내 말은 덫이 많다는 뜻이오.”

“덫?”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요새 곳곳에 있는 삼백 명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오. 즉 삼백 개 이상의 덫이 있는 셈이지.”

“아하!”

“소림사가 친히 부르는 놈이니 최소 수십 명은 죽이면서 반항하겠지. 놈이 지쳤을 때 내가 가서 목을 베면 그 어찌 통쾌하지 않겠소?”

“…….”

모용화정은 무심코 눈썹을 찡그렸다.

남궁진은 잘생긴 얼굴답지 않게 지나치게 잔인하고 교활한 것이 흠이었다.

“나는 오히려 놈들이 요새에 무사히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소. 망루 경비의 화살에 꿰여 죽는다면 싱겁기 짝이 없지 않겠소?”

남궁진은 잔인한 미소를 흘린 뒤 방을 나갔다.

* * *

서쪽 목책 옆에 솟아 있는 망루 위에는 무사 두 명이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진평, 네놈은 안 춥냐?”

“안 춥기는! 추워서 뒈지겠다. 그러는 곽심, 네놈은 한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지 않았냐?”

“그거야 젊은 시절 철없을 때 얘기지.”

“하긴. 그나저나 교대하는 놈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내 말이.”

곽심과 진평은 하북팽가의 무사였다.

둘은 같은 고향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고향에서는 검술 천재가 둘 나왔다며 떠들썩했지만, 야심만만하게 강호출행한 둘은 금세 분수를 깨달았다.

시골 구석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자신들은 중원 무림에서 삼류, 잘해야 이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그래도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나이 서른에 하북팽가의 무사가 되었으니 나름 성공한 셈이었다.

저잣거리에 나가서 하북팽가를 말하면 점소이나 기녀는 고개를 굽신거렸다. 봉급도 나쁘지 않았다. 떠난 이후 한 번도 되돌아가지 못했지만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면 금의환향 대접을 받을 터인데…….

현실은?

칼바람이 부는 망루에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교대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꼴이라니…….

그때 무언가가 망루 옆을 휙 날아갔다.

푸드득.

“뭐야?”

“놀래기는. 올빼미다.”

“쳇, 간 떨어질 뻔했네.”

협곡 사이에 세운 요새는 들짐승도 날짐승도 많았기 때문에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올빼미가 자신들을 유심히 살피고 날아간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잠시 후. 두 명의 무사가 바쁜 걸음으로 서쪽 망루로 향하고 있었다.

둘은 망루의 교대자였다. 그런데 저녁으로 오랜만에 고기반찬이 나왔기 때문에 둘은 포식을 했고, 그 바람에 교대 시간에 늦고 만 것이다.

팽자걸은 전신이 비대해서 게으른 것으로 유명했는데, 부하 무사들은 잠깐만 시간을 어겨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교대 시간에 늦은 사실을 들키면 큰 벌이 떨어질 터!

그때 무사들 앞에 동료 두 명이 나타났다.

두 명은 망루를 지키고 있어야 할 곽심과 진평이었다.

“너희들… 왜 망루에서 내려온 거냐?”

“왜긴, 네놈들이 교대에 늦으니까 왔지.”

“그래도… 교대는 반드시 망루에서 하라는 명령은 잊은 거냐?”

“걱정도 팔자군. 네놈들이 오는 걸 보고 방금 내려왔다. 별일 없을 테니까 빨리 올라가라고.”

“…….”

곽심과 진평은 추위에 떨었는지 몸을 움츠린 채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곽심과 진평이 가는 방향이 엉뚱했다.

“저 놈들 배가 고플 텐데 식당으로 가는 게 아닌가?”

“측간이 급한가 보지.”

“아냐. 측간은 반대편이고, 북쪽 후문으로 가는 것 같은데…….”

“에이, 이 추운데 후문에는 뭣 하러 가냐?”

그러는 사이 곽심과 진평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사라졌다.

두 무사는 뭔가 이상한 감이 들었지만 기분 탓으로 여기고 망루로 갔다.

그런데 망루에 도착하자 위에서 곽심과 진평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야, 이 새끼들아! 빨리 빨리 좀 다녀라!”

“…….”

곽심과 진평이 아직 망루에 있다고?

그럼 방금 본 두 명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두 무사는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잠시 후. 무사들이 곽심과 진평으로 착각한 두 명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두 무사의 얼굴이 서른이 넘은 나이가 아니었다.

한 명은 약관이 안 된 소년.

한 명은 방년이 막 지난 젊은 여인.

둘의 정체는 서백과 주은리였다.

둘은 부적 한 장씩을 가슴에 붙이고 있었다.

각각 곽심과 진평의 성인 곽(郭)과 진(陳)이 써져 있는 부적.

주은리가 올빼미로 두 무사의 대화를 엿들은 뒤 즉석에서 만든 부적이었다.

즉 망루 경비 교대를 하러 온 무사들의 눈에는 서백과 주은리가 곽심과 진평으로 보였던 것이다.

“대단한 술법이군요.”

“별것 아닙니다. 할아버지에 비하면 간단한 재주에 불과합니다.”

서백과 주은리는 서쪽에 있는 두 개의 건물을 이미 조사한 뒤였다.

두 건물은 경비도 삼엄하지 않고 무사들의 출입도 자유로운 것 같았다. 왕일과 왕이가 없다는 뜻이리라.

다음 문제는 요새 중앙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요새 중앙에는 열한 개의 망루 중 가장 높은 망루가 서 있었다. 인원과 건물이 가장 밀집된 곳이기도 했다.

또한 중앙은 무사들이 덤불을 제거해 놔서 숨을 곳이 없었다. 건물에 드리운 그림자도 마땅치 않은 상황.

서백과 주은리의 경공이라면 무사들을 따돌리며 돌파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행이 잠입했다는 사실 자체를 들키지 않는 것이 목표.

일행은 잠입하기 전에 계책을 준비해 놓았다.

바로 주은리의 술법!

술법의 효과는 대단했다.

특히 서백은 키와 체구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무사들은 감쪽같이 착각했다.

그러나 술법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즉석에서 만든 부적의 효력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입니다.”

주은리는 잠입 이전에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

“완벽한 부적을 만들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부정을 타지 않은 방식으로 잡은 닭피. 둘째, 밤새 모은 이슬에 닭피를 섞어서 만든 먹물. 마지막으로 태어난 지 일 년이 안 된 어린 범의 호피.”

황무지의 객잔에서는 도저히 준비할 수 없는 까다로운 사항.

그러나 지금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충분했다.

“또한 절대 입을 열면 안 됩니다. 말은 오직 제가 하겠습니다.”

주은리는 올빼미를 통해 엿들은 곽심의 목소리와 말투를 복화술로 똑같이 흉내 냈다. 서백은 부적보다 그녀의 복화술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두어 번 오가연맹의 무사들과 마주쳤지만 서백과 주은리의 정체를 깨닫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서백과 주은리는 이번 잠입에서 가장 위험한 구역인 요새 중앙을 돌파했다.

삼백 명 무사들의 눈길은 서백과 주은리의 잠입을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동쪽 망루에서 경비를 교대한 무사 하나가 식당으로 가다가 발을 멈췄다.

“왜 그래?”

“왠지 이상한 낌새 좀 느껴지지 않냐?”

동료가 묻자 무사가 그림자가 드리운 어둠 속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긴 개뿔, 들짐승이겠지. 빨리 가자. 늦으면 저녁밥 동난다.”

동료가 재촉하자 무사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면서 발길을 돌렸다.

무사들이 가 버리고 얼마 후.

근처 건물의 담벼락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이어서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담벼락이 출렁거리며 내려왔다.

그러자 송현과 왕이삼의 모습이 나타났다.

둘은 넓은 천의 양쪽 끝을 잡고서 몸을 가린 뒤 벽에 기대 있던 것이었다.

담벼락의 벽돌 모습을 띠고 있던 천은 송현이 접자 원래 색깔인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왕이삼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정말 깜쪽같군. 이것도 술법인가?”

“법기(法器)의 일종인 것 같군.”

“법기? 설마 우화등선한 신선들이 쓴다는 법기가…….”

삼국연의 등 온갖 기환야담을 즐기는 왕이삼은 법기가 신선이 쓰는 물건이라는 얘기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 말에 송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신선이 쓰는 건 아닐 테고 그저 영력이 깃들어 있는 정도일 거요.”

검은 천은 사실 도포 같은 옷이었다. 옷은 활짝 펼치면 어른 두 사람을 충분히 가릴 만큼 폭이 넓고 풍성했다.

주은리는 그 옷을 심의(深衣)라고 부르며,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귀중히 쓰고 돌려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신선이 쓰든 말코도사가 쓰든 대단한 물건이군.”

왕이삼이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남들보다 감각이 날카로운 무사가 발을 멈췄으나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가 버리지 않았는가?

송현과 왕이삼이 숨어 있던 곳은 어둠 속이 아니라 무사의 등 뒤에 있던 담벼락.

무사는 벽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엉뚱하게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던 것이다.

“이 옷만 있으면 절대 들킬 염려는 없겠군!”

“아니, 심안을 터득한 자한테는 들킬 수 있소.”

송현이 왕이삼의 말을 반박하며 설명했다.

“심안(心眼)은 우화등선을 꿈꾸거나 기문둔갑을 수련한 자들이 말하는 경지 중 하나요. 사마(邪魔)의 술법을 깨는 효력이 있다고 하지.”

“그렇구만.”

왕이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다가 반문했다.

“심안을 가진 놈이 이런 요새에는 없을 테니 들킬 염려는 없지 않소?”

“심안과 같은 원리로 수련하는 중원 무공이 있소.”

“그게 뭐요?”

“소림사의 사자후요.”

“……!”

“물론 이 요새에 사자후가 가능한 인물은 없겠지. 하지만 내공이 심후한 자라면 법기를 꿰뚫어 보진 못해도 이상한 낌새는 눈치 챌 것이오.”

“그 말은…….”

“오가연맹의 다섯 고수한테는 발각될지도 모르오.”

왕이삼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초랑이 나타났다.

“오, 왔냐?”

왕이삼이 손을 내밀었지만 초랑은 쳐다보지도 않고 송현을 향해 꼬리를 두 번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서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쳇, 주인을 닮아서 쌀쌀맞군.”

“꼬리를 두 번 흔들었으니 아직 못 찾았군. 이동을 재개하겠소.”

송현과 왕이삼은 주은리가 빌려준 심의의 힘으로 요새 중앙을 돌파했다.

서백 일행의 잠입을 눈치 챈 자,

무(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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