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요새 잠행(2)
남궁진은 땀이 번들거리는 몸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
침상에 누워 있는 모용화정이 이불을 끌어당겨서 몸을 가리며 물었다.
“정말 소림사행 인물이 요새에 잠입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오.”
“그들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럼 더욱 좋지.”
남궁진의 목소리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믿음.
“객잔을 불태울 때 말을 끌고 왔으니 놈들은 걸어서 오겠군요. 요새까지 걸어서 일주일이 걸리니 내일 아니면 모레쯤…….”
“아니, 놈들은 우리의 의표를 찌르려고 할 것이오. 잠을 줄이고 행군하면 체력을 비축하고도 닷새면 요새에 올 수 있소.”
“그 말은…….”
“그렇소. 놈들은 오늘 밤 안에 올 거요.”
그 말에 깜짝 놀란 모용화정이 잡고 있던 이불을 놓쳤다. 그녀의 비단 같은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럼 요새에 잠입하겠군요.”
“잠입? 놈들이 온다고 했지, 요새로 들어올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소.”
“무슨 뜻입니까?”
“요새를 둘러싼 암벽은 가파르기가 천 길 낭떠러지와 같아서 쉽게 내려올 수 없을 것이오.”
“놈들이 경공의 절정 고수라면요? 허공답보로 암벽을 내려올 수도 있지 않나요?”
모용화정이 슬쩍 남궁진의 말을 반박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내를 한 번쯤 꺾어 보고 싶은 호승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설령 암벽을 내려왔다고 해도 이 장(丈) 높이의 목책이 앞을 막고 있소.”
“흥, 이 장쯤은 저도 넘습니다. 고수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문제는 목책이 아니오. 요새 전역에 서 있는 망루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지.”
남궁진이 그녀의 몸을 감상하며 미소를 흘렸다.
“망루 경비가 경보를 울리면 궁수들이 나와서 화살을 퍼부을 것이오. 놈들은 삽시간에 고슴도치 꼴이 될 테지.”
“화살쯤은 저도 쉽게 막습니다. 관에서 특수 제작한 강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말 잘했소. 남궁세가가 관에 연줄이 있는 것을 아시오?”
“그 말은…….”
“본인은 남궁세가의 무사들에게 바로 그 관의 강궁을 훈련시켰소.”
“대단하군요.”
모용화정은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했다.
남궁세가가 소림사와 무림맹의 세를 무너뜨리려고 야심을 품은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런데 관과 손을 잡아서 황제를 호위하는 데 쓰는 강궁까지 손에 넣었다니…….
오가연맹의 임시맹주인 남궁진은 확실히 수완이 대단했다.
모용화정은 몇 번씩 말꼬투리를 잡아도 남궁진의 자신감을 꺾을 수 없자 말을 돌렸다.
“인질들은 어떻게 이용할 생각입니까?”
“미끼가 된다면 좋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소. 흑도 놈들이 분란을 일으켜서 방주가 침몰한 것으로 내 계획은 완성된 셈이오. 놈들이 이 요새를 지나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지.”
남궁진이 계책을 다시 언급하자 모용화정은 무심코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자신감이 지나쳐서 자기 생각에 몰입하는 게 흠이었다.
그런데 남궁진이 침상으로 다시 올라오는 게 아닌가?
“아직 저녁이지만 놈들이 오늘 밤 올 거라면서 이러셔도 괜찮습니까?”
“걱정 마시오. 놈들과 싸울 힘은 남겨 놓을 테니까.”
“아무렴요. 인생은 짧은 것입니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시지요.”
“좋은 말이군.”
남궁진은 씨익 웃으며 강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런데 남궁진의 품에 안긴 모용화정의 두 눈이 어느 순간 얼음장처럼 싸늘해지며 번뜩 안광을 내뿜었다.
그녀는 방금 한 말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머릿속으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인생은 짧지. 살아 있을 때 실컷 즐기려무나, 오호호호!’
* * *
한편, 서백은 썩은 목책 구멍을 통과하고 있었다.
목책 구멍은 허리까지 오는 덤불에 가려져 있어서 일부러 조사하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목책을 박고 망루를 세웠다는 방심이 낳은 결과였다.
서백 일행에게는 금상첨화인 셈.
목책 구멍을 빠져나온 서백은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검잡이에 손을 댄 채 잠시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요새 잠입을 목격한 무사가 있다면 즉시 목을 베어 버릴 태세.
다행히 무사는 보이지 않았다.
서백은 등 뒤의 목책을 두 번 똑똑 두드려서 일행에게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왕이삼부터 목책을 통과했다.
‘시작은 순조롭군.’
그런데 서백의 생각은 바로 어긋났다.
썩은 목책이 삐죽하게 나온 곳에 왕이삼의 몸이 걸렸던 것이다.
목책에 걸린 위치는 바로 배.
중년의 나이에 술을 즐기는 왕이삼이니 목책이 부러져서 삐죽 튀어난 곳에 술배가 걸린 것이었다.
왕이삼이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후배, 아무래도 나 걸린 거 같은데…….”
“어디가 어떻게 걸리셨습니까?”
“그게… 배가…….”
“얼른 빼십시오.”
왕이삼은 숨을 흡 들이마셔서 배를 넣었다. 하지만 배를 집어넣자 몸이 구부러져서 이번에는 등이 걸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사 두 명이 다가왔다.
“왕 선배, 빨리!”
서백이 속삭이자 왕이삼은 숨을 멈추고 억지로 몸을 당겼다. 그러자 막힌 곳이 뚫리는 것처럼 그의 몸이 구멍을 쑥 빠져나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목책의 썩은 부분이 왕이삼의 배에 걸려서 부러지며 소리를 낸 것이었다.
우지직.
“뭐지?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던 무사들이 몸을 돌리고 다가왔다.
‘발각되는 건가?’
서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무작정 움직였다가는 망루의 경비에게 발각되기 쉽다. 그렇다면 속전속결로 무사들의 목을 베어 버려야 한다.
발각되느냐 마느냐는 운에 맡기고…….
그때 무언가가 재빠르게 땅을 달려서 건물 사이로 들어갔다. 주은리의 소매를 타고 내려온 초랑이었다.
“쳇, 들짐승이었군.”
“남궁진 놈, 목책에 망루까지 세워 놓고서 무슨 경비를 더 서라고 하는 건지.”
초랑을 보고 의심을 거둔 두 무사는 불평을 하며 자리를 떴다. 무사들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서백은 검을 잡았던 손을 뗐다.
왕이삼이 멋쩍은 얼굴로 속삭였다.
“후배,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왕이삼의 어이없는 실수가 초래한 위기.
그래도 얻은 게 있었다.
초랑을 이용해서 무사들의 방심을 이끌어낸 주은리의 대처가 그것이었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잠입.
새 일행인 주은리가 임기응변이 뛰어나니 그녀를 믿어도 안심할 수 있으리라.
또한 무사들의 대화를 들은 것도 소득이었다.
‘무사들이 남궁세가에 불만을 갖고 있다.’
무사들이 남궁진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며 불만을 토할 정도라고? 무사들의 소속은 남궁세가가 아니라 다른 세가일 터.
아무리 세가가 다르더라도 일개 무사가 오가연맹의 맹주 격인 남궁진을 욕하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다섯 세가가 무림맹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 손을 잡았으나 서로 유대감은 희박하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될 무사들까지 서로를 적 보듯이 한다고?
이는 오가연맹 요새의 또 다른 약점이 되리라.
서백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주먹을 쥐어서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주위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검지와 중지를 뻗어서 전진 신호를 했다.
천 길 낭떠러지의 암벽과 이 장 높이의 목책.
그 어떤 천혜의 장애물도 서백 일행의 잠입을 막지 못했다.
* * *
모용화정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강궁이 위력이 높다지만 안심은 안 되는군요. 고수가 암기와 비검을 투척하면 일개 무사들은 강궁을 쏘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될 게 아닙니까?”
“무사들이야 어차피 소모품이니 상관없소.”
“그럼 놈들이 요새에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겠군요.”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요.”
남궁진이 모용화정을 품에 안은 채 대답했다.
“산동악가, 하북팽가, 진주언가, 그리고 당신네 모용세가. 네 곳에서 보낸 무사들이 각각 오십 명씩. 거기에 남궁세가의 무사들 백 명을 합해서 모두 삼백이오.”
“꽤 많군요.”
“다섯 세가의 호법들은 따지지 않은 숫자요. 놈들이 발각되는 순간 무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오. 스스로 도산검림에 갇히는 꼴이지.”
남궁진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모용화정은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놈들이 발각되지 않는다면요?”
“그럴 리가.”
남궁진이 씨익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단언했다.
“열한 개의 망루가 요새 전역을 감시하고 있소. 놈들이 숨을 곳은 없소.”
* * *
스스스스.
어두컴컴한 요새의 덤불과 덤불 속으로, 또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로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이동했다.
삼 장 위의 하늘에서 망루의 경비가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
그러나 서백 일행의 움직임, 아니, 그림자가 움직이는 기척을 알아차리는 경비는 아무도 없었다.
서백은 낮에 주은리가 매의 시선으로 본 요새의 전경을 머릿속에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 들어 있는 조감도에 따라서 움직였다.
망루의 경비들 시선에서 철저히 가려지는 사각(死角)만을 골라 이동하는 경로!
산속의 어둠은 평지의 어둠과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두 개의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협곡이니, 망루나 무사들이 비추는 횃불만 피하면 발각될 위험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마치 이와 같을 터.
하나 더. 발소리로 들킬 염려도 적었다.
서백과 송현은 물론 경공의 고수인 주은리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이동이 가능했다.
문제는 왕이삼.
그는 외가무공은 제법 실력이 있으나 내가무공, 특히 경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협곡 사이에 지은 요새라서 온갖 들짐승과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내가무공의 절정 고수가 아니라면 구분하기 쉽지 않으리라.
왕이삼으로서는 천만다행인 일.
곧이어 일행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까지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는 덤불 속을 이동하며 망루의 시선을 피해야 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작은 건물들이 복잡하게 서 있는 곳은 은신하기에 최적격인 장소였다. 곳곳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니 말이다.
요새 전역을 감시하는 열한 개의 망루는 서백 일행의 잠입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런데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나더니 일행 쪽으로 달려왔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초랑이었다.
무사들의 시선을 끌어서 왕이삼의 실수를 덮어 준 초랑은 일행 중에 가장 먼저 공을 세운 셈.
서백이 손을 내리자 초랑은 서백의 손등을 한 번 핥더니 주은리의 몸을 타고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제때 와 줬군.’
다음 작전은 초랑을 염두에 두고 세운 것이었다.
서백이 수신호를 보내자 일행은 서백과 주은리, 송현과 왕이삼, 두 패로 갈라섰다.
요새는 넓고 잠행은 오늘 밤 안으로 끝내야 한다.
넷이 한데 모여서 이동한다면 시간 부족에 시달릴 뿐 아니라 발각될 위험이 높다.
때문에 일행은 둘로 갈라져서 왕일과 왕이를 찾을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서백과 주은리는 서쪽에 위치한 세 건물, 송현과 왕이삼은 동쪽에 위치한 세 건물을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조사한다는 계획이었다.
일행이 둘로 나뉘면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다. 망루는 물론 요새 곳곳에 감시의 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섣불리 전음을 보내는 것도 위험했다.
만약 주위에 오가연맹의 수장 격인 고수 다섯 명이 있다면 내공진기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서백은 초랑을 이용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건물 하나를 조사할 때마다 초랑이 다른 패로 이동해서 상황을 알린다는 것이 작전이었다. 아무 일이 없으면 초랑이 꼬리를 두 번 흔들고, 왕일과 왕이를 찾으면 꼬리를 네 번 흔드는 것으로.
서백은 초랑이 작전 수행에 무리가 없을지 의문이었지만, 주은리는 그 정도 명령은 사람보다 더 잘 알아듣는다며 의문을 일축했던 것이다.
서백과 송현은 눈빛으로 대화한 뒤 몸을 돌렸다.
-그럼 부탁합니다.
-행운을 빌지.
일행은 동서로 나뉘어서 어둠 속을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