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요새 잠행(1)
남궁세가는 오래 전부터 무림맹의 세를 약화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몇 년 전, 남궁세가의 책사 중 하나가 소림사로 가는 길목인 협곡에 요새를 세우자는 계획을 제안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웃어넘겼다.
넓은 중원 땅에 길이 하나둘이 아닌데 길목을 막는 요새를 세우자고? 허황된 꿈이나 같은 얘기가 아닌가!
그런데 늙은 가주 대신 세가의 실권자로 떠오르는 남궁진이 그 계획을 밀어붙인 것이다.
남궁진은 소문이 퍼지지 않게 물자를 운송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요새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게 미래를 내다본 현묘한 계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망자가 창궐하자 중원의 대도시인 낙양과 개봉은 큰 타격을 입었다. 대도시의 엄청난 인구가 모두 망자로 변했던 것이다.
무림에서는 특히 소림사가 위기에 빠졌다.
낙양과 개봉에 근접한 소림사는 수십수백만이 넘는 망자 떼에 둘러싸여서 포위된 꼴이 된 것이었다.
책사가 말한 협곡은 오래 전부터 소림사로 가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다. 주위의 지세가 워낙 험해서 협곡을 통하지 않으면 길을 잃거나 실족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벌판 곳곳에 수만의 망자 떼가 돌아다니는 판이 되었으니…….
소림사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된 협곡.
남궁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가주의 무남독녀인 남궁유가 무림맹에 파견됐다가 죽은 사실이 남궁진에게 더욱 힘을 보태 주었다.
무남독녀를 잃은 가주가 조카인 남궁진을 후계자로 점찍다시피 했으니, 남궁진의 말에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림사가 망자 떼에 포위되어 고립되자 손 놓고 구경하던 다른 세가들도 앞다투어 남궁세가 편에 섰다. 뒤늦게 줄을 섰다가는 공이 줄어들 테니까.
그리고 몇 달 전. 요새가 완성되고 오가연맹의 깃발이 서게 된 것이다.
새로 손을 잡은 오가연맹 다섯 세가.
이제 소림사가 망자 떼에 무너지는 것을 팔짱 낀 채 구경하는 것만 남은 셈.
혹 다른 문파나 세가가 소림사를 도우러 온다면?
그때야말로 남궁진의 야심이 실현될 터였다.
모두 요새에 막혀서 발을 돌려야 될 테니까.
만약 소림사가 끝내 무너지지 않고 계속 버틴다면?
남궁진은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최후의 수단도 준비하고 있었다.
소림사를 영원히 중원의 역사 속으로 파묻어 버릴 강력한 수단을.
그런 중에 무림맹에 숨어 있는 오가연맹의 세작이 정보를 보내온 것이다.
-사천에서 소림사로 오는 인물이 있다.
-망자 창궐을 끝낼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 추측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
오가연맹의 다른 수장들, 악관비, 팽자걸, 언자성, 모용화정 등은 고작 사람 하나가 온다고 뭐가 바뀌겠냐면서 세작의 정보를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남궁진은 달랐다.
바늘 하나 찌를 틈이 없을 만큼 완벽주의 성품인 그는 책사를 시켜서 소림사행 인물이 거쳐 갈 경로를 예측하게 했다.
책사는 두 가지 경로를 보고했다.
하나는 방주를 타고 운하를 올라가서 낙양에 내린 다음 소림사로 가는 것.
다른 하나는 도중에 방주에서 내려서 소림사로 향하는 것.
소림사행 인물이 낙양에 도착한다면 낭패였다.
그자가 망자 떼를 뚫고 소림사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오가연맹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나는 셈이니까.
소림사행을 막을 방법이 막막한 상황에서 남궁진의 임기응변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남궁진은 세작들을 풀어서 운하가 시작되는 양주 주위의 흑점에 소문을 퍼뜨렸다.
-방주에 탄 소림사행 인물을 사로잡아서 숙주 근처의 용정객잔으로 끌고 오면 남궁세가가 큰 포상금을 내리겠다.
물론 그는 비열한 흑도 무리는 절대 믿지 않았다.
단지 완벽주의 성품상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뿐인데… 방주가 숙주에서 침몰하는 대박이 터진 것이다.
중도에서 방주를 내린 소림사행 인물이 갈 곳은 협곡을 막고 있는 오가연맹의 요새뿐.
방주를 타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낙양으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진 셈이니까.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남궁진에게 언자성의 질투 섞인 시선 따위는 우스울 뿐이었다.
“인질들이 입을 안 열어도 상관없소. 소림사행은 반드시 요새로 올 것이오.”
남궁진이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런 남궁진을 보는 모용화정은 눈가가 물기 맺힌 것처럼 붉어졌다. 뭇 여인들이 사내를 고를 때는 자신감이 최고의 덕목인 것.
세상 어떤 여인도 언자성 같은 패배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
젊은 나이에 수없이 여인을 품에 안은 남궁진이 모용화정의 눈빛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남궁진은 몸을 돌려서 건물을 나가자 모용화정도 대충 목례를 한 뒤 그를 따라갔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대놓고 운우지정을 즐기러 가는 두 남녀.
그 모습이 언자성에게는 큰 수치가 되었다.
‘방금 하고 왔으면서 또?’
언자성은 말없이 주먹을 움켜쥔 채 분노를 삭였다.
반면 그걸 눈치 채고 있는 악관비와 팽자걸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언자성을 조롱했다.
* * *
서백은 요새 잠입 시각을 결정했다.
“유시(酉時, 오후 5시-7시)가 끝나는 시점에 잠입하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했다.
유시의 마지막에 요새에 잠입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 유시는 하루 중 해가 지는 시각이다.
해가 완전히 진 한밤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산속은 해가 지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때문에 햇빛에 익숙해진 무사들의 눈을 피하는 데 안성맞춤이리라.
둘째, 요새는 보통 무사들이 저녁을 먹고 유시가 끝날 때 경비 교대를 하기 때문이다.
무사들이 교대하기 위해 대거 이동하면 경비가 소홀해지는 틈이 생길 터.
또한 대낮에 경비를 서느라 허기가 진 무사들과 막 저녁을 먹어서 졸음이 오는 무사들이 교대하는 때는 하루 중 요새 경비가 가장 느슨해지는 순간.
그 두 가지가 서백이 유시를 잠입 시각으로 정한 이유였다.
유시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서 일행은 기온이 따뜻한 곳을 찾아 몸을 누이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유시가 되었다.
서백 일행은 잠입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물과 음식을 먹었다.
일단 요새에 잠입하면 최소 반나절은 몸을 숨긴 채 숨어 다녀야 할 것이다. 일이 잘못될 경우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미리 수분과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 놓는 게 중요했다.
음식은 주은리가 갖고 있는 벽곡단을 나눠 먹었다.
주은리는 초랑한테도 물을 주고 작게 썬 생고기를 먹였다.
“쳇, 우리는 거친 벽곡단 나부랭이나 씹는데 저놈은 고기를 처먹는군.”
“그럼 당신도 드시지요.”
왕이삼이 그걸 보고 불평을 하자 주은리가 초랑이 먹는 고깃조각을 왕이삼에게 내밀었다.
초랑이 먹는 고깃덩이는 수십 조각을 먹어도 성인한테는 성에 차지 않을 분량이었다. 괜히 멋쩍어진 왕이삼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물과 음식을 먹은 뒤 일행은 장비를 점검했다.
“이번 작전은 신속한 이동과 은신이 중요합니다. 모두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십시오.”
서백의 말에 따라 일행은 잠입에 필요 없는 물품은 모두 버렸다.
이어서 도검과 짐은 몸에 밀착하도록 끈을 조여서 단단히 묶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일행은 암벽 두 개가 맞닿아 있는 틈새로 갔다.
잠입시 이동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서백, 왕이삼, 주은리, 송현.
서백과 송현이 각각 선두와 후미를 맡아서 비교적 무공이 약한 왕이삼과 주은리를 보호하는 진형.
특히 기문둔갑술을 펼치는 주은리를 보호하는 것이 잠입의 성패를 좌우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틈새에 들어가기 전에 송현이 한 마디 했다.
“부족한 점이 있지만 나쁘지 않은 잠행대로군. 소운이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잠행대? 잠입이나 잠행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의 말을 듣고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송현이 대답했다.
“표사들은 중지(重地)나 비처(秘處)에 잠입하여 탈출하는 것을 잠행이라고 하오. 잠행은 세 단계로 나뉘는데 준비 과정 단계가 첫째, 지금 진행할 잠입 단계가 둘째요.”
“세 단계라고? 그럼 마지막은 뭐요?”
“잠행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요. 탈출이지.”
“……!”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일행은 철통같은 요새에 어떻게 잠입하느냐만 고민했다.
그런데 송현의 말을 듣자 요새 잠행의 어려움을 새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잠행에서 탈출이 가장 어렵다는 말.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살아서 나오는 방법이 오리무중이 아닌가?
내심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던 서백이 말했다.
“맞습니다. 잠입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탈출하느냐입니다.”
최소 일백 명, 그보다 두세 배 더 많은 무사들이 지키고 있을 요새. 게다가 오가연맹의 고수 다섯 명까지 있는 상황.
요새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들키지 않을지 예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두 명의 포로를 구한 다음이 문제였다.
은신 준비가 되지 않은 왕일과 왕이를 데리고 수백 명의 무림인들의 눈을 피해서 철통같은 요새를 빠져나온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문제.
주은리와 왕이삼의 추측으로 발견한 썩은 목책과 암벽의 틈새가 탈출할 때도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잠입이 발각되는 순간 좁은 틈새로 도망치는 것은 스스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는 셈이니까.
그때 주은리가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탈출 방법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진짜 기문둔갑술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지요.”
주은리는 그것을 끝으로 더 말하지 않았다.
일행은 주은리가 어떤 생각인지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선보인 그녀의 술법으로 볼 때 요새의 무사들을 속일 계책이 준비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서백이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다음 암벽 틈새로 기어 들어갔다.
계속해서 왕이삼, 주은리, 송현이 순서대로 그 뒤를 이었다.
틈새는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폭이 좁아졌다. 특히 위아래의 폭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일행은 마치 천정이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어느 지점부터 더 좁아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더 이상 기어갈 수 없을 만큼 위아래가 좁아졌다.
일행은 배를 바닥에 붙인 채로 포복 자세로 이동해야 했다.
모두 경공을 익힌 무림인이니 순식간에 이동할 거리지만 포복 자세로 움직였기 때문에 틈새를 통과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틈새의 끝이 보였다.
일행은 서백부터 차례대로 틈새를 빠져나왔다.
틈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썩은 목책의 구멍이 보였다. 왕이삼의 제안으로 찾아 낸 개구멍.
서백이 몸을 숙여서 구멍 너머를 살폈다.
산속은 해가 빨리 진다. 요새는 해가 져서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서백은 어둠 속을 유심히 살폈지만 길목을 돌아다니며 감시하는 무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부 감시보다 망루 경비에 중점을 뒀다는 뜻.
요새의 주요 경비를 망루로 대체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경비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방심이 오가연맹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터.
서백은 검지와 중지를 합쳐서 앞을 가리키며 전진 신호를 보냈다.
잠입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