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오가연맹(5)
서백은 이처럼 자신만만한 왕이삼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것입니까?”
“중원의 모든 요새, 아니, 요새 말고도 저택이나 장원은 반드시 이게 하나씩 있지. 후배가 한번 맞혀 보지 그래?”
왕이삼이 검지를 까닥거리면서 말했다.
서백은 그의 허세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이 차이는 많지만 사천에서 처음 만난 이후 왕이삼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우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백은 왕이삼의 허세를 깨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속뜻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사천의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있던 석가장.
고아인 서백은 석가장에 오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석가장에 온 이후 망자 떼가 덮치기 전까지는 한 번도 강호에 출행한 적이 없었으니…….
중원의 저택과 장원이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아야 추리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서백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전혀 모르겠군요.”
“역시 이런 건 무림밥을 먹은 자만이 알 수 있는 법. 중원에서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반드시 하나씩 있는 게 뭐냐면 바로 개구멍이다.”
개구멍.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이 담벼락에 난 틈새나 구멍을 통해 집을 드나드는 곳.
“아무리 완벽한 요새라도 개구멍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라고!”
왕이삼이 가슴을 쭉 펴고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서백은 설마 싶었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유명세가들이 만든 요새에 그런 터무니없는 허점이 있다고?
그런데 뜻밖에도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이삼의 말을 두둔했다.
“일리 있는 말이군. 사람이 만든 이상 완벽한 요새라는 건 있을 수 없지.”
송현까지 그렇게 나오자 서백은 일단 둘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매를 이용해서 요새의 전경을 훑었지만 주은리는 다시 초랑을 준비했다. 왕이삼 말대로 요새 어딘가에 개구멍이 존재한다면 매가 볼 수 없는 음지에 있을 테니까.
주은리가 검지와 중지를 합쳐서 입술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허공에 호를 그으며 말했다.
“초랑, 다녀와.”
다음 순간 주은리의 소매 품에서 초랑이 튀어나와서 암벽을 타고 달렸다.
요새 주위의 암벽에는 수풀이 없어서 은신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사람일 경우에 한정된 얘기.
몸통이 긴 대신 발은 상대적으로 짧은 담비는 암벽과 암벽에 난 틈새를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곧이어 주은리가 초랑의 눈으로 본 요새의 모습을 전하기 시작했다.
“빼곡하게 연결된 목책들이 앞을 막고 있군요. 그 너머는 보이지 않습니다.”
키가 사람 발목에 오는 초랑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목책 뒤의 망루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게 당연했다.
계속해서 초랑은 남과 북으로 길게 늘어진 요새 주위를 돌았다. 요새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개구멍을 찾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은리가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목책이 땅에 박힌 부분이 썩어서 구멍이 나 있군요.”
“……!”
왕이삼의 말이 들어맞았다. 초랑이 개구멍을 발견한 것이었다.
문제는 구멍의 크기.
“일단 초랑이 드나들기엔 충분한데… 목책 주변이 비바람에 풍화되어 잔뜩 썩어 있습니다. 조금만 손을 보면 사람이 통과하는 구멍을 만드는 데 문제없어 보이는군요.”
“내가 뭐랬냐? 개구멍은 반드시 있다니까!”
왕이삼이 기고만장해서 말했다.
서백은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왠지 이번만큼은 그의 기를 살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이삼 말대로 정말 개구멍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목책에 난 개구멍까지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다음 문제로 남았다.
그런데 그 문제도 의외로 쉽게 풀렸다.
“초랑이 몸을 돌려서 암벽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서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벽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통과한다고?
“목책이 썩은 곳 옆에 암벽에 난 틈새가 있습니다. 꼭 동굴처럼 위와 옆이 막힌 틈새인데 사람이 기어서 통과하는 데 무리 없어 보입니다.”
“……!”
그 말에 서백과 송현은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초랑이 발견한 틈새가 요새 잠행에 도움이 될 결정적인 열쇠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썩은 목책에 난 개구멍. 그리고 그곳까지 이어지는 암벽의 틈새.
주은리의 정찰대로라면 요새의 경비가 몇 명이든 망루가 몇 개가 서 있든 무림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요새에 잠행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초랑이 암벽 위로 거의 올라왔습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이동하죠.”
일행은 지상의 무림인들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몸을 낮춘 채 주은리를 따라갔다.
주은리가 향하는 곳은 뜻밖에도 암벽 반대쪽이었다. 요새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셈.
잠시 후 틈새에 도착한 일행은 왜 암벽 반대쪽으로 넘어왔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산처럼 거대한 암벽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곳의 밑에 작은 틈새가 나 있었던 것이다.
틈새는 위아래와 양옆, 즉 사방이 박혀 있었다. 반면 빈 공간이 동굴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그 틈새에서 초랑이 쏙 빠져나와서 주은리의 몸을 타고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서백은 무릎을 꿇고 틈새를 살폈다.
틈새 속은 어두웠지만 석가심결을 시전한 서백은 그 끝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이윽고 서백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틈새 끝에 빛줄기가 비치는 걸 보니 요새 목책까지 이어져 있는 게 확실합니다.”
“넓이는?”
“멧돼지도 통과할 정도로 넓습니다. 사람이 드나드는 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서백과 송현은 서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굴처럼 뻗은 틈새를 통과하면 바로 썩은 목책의 구멍이 나온다. 요새에 잠입하는 진입로가 해결되었다는 뜻.
철통같아 보이던 오가연맹의 요새는 생각지도 못한 약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직접 초랑을 기르는 주은리마저 암벽 틈새와 개구멍의 존재는 예상하지 못했다. 초랑의 시선으로 전황을 살피는 건 능숙하지만, 담비와 짐승들의 습성까지 알지는 못하니 당연한 일.
이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은 일행 중 가장 쓸모없어 보이던 왕이삼의 수훈이었다.
“으하하하! 역시 무림밥을 먹은 이 몸이… 읍읍!”
“왕 선배, 여기는 적진 바로 옆입니다.”
왕이삼이 호기롭게 웃음을 터뜨리자 서백이 얼른 입을 막았다. 다행이 암벽 뒤쪽이라서 요새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잔뜩 콧대가 높아진 왕이삼이 흘깃 주은리를 봤지만, 그녀는 왕이삼을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밥값은 하는 걸 보니 제법이군요.”
주은리는 가시 돋친 말을 툭 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반응이 냉랭하자 왕이삼은 심통이 났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서백이 주의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그럼 작전을 시작합시다.”
* * *
오가연맹 요새의 한 건물에 세 명의 무림인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산동악가 악관비, 하북팽가 팽자걸, 진주언가 언자성이었다.
무림인들 앞에는 왕일과 왕이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둘은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투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무사 하나가 포권지례를 올리며 보고했다.
“알아 낸 정보가 없습니다…….”
“뭐라고? 시간을 충분히 줬을 텐데?”
“그게… 아무리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아서 확인해 보니 둘 다 혀가 잘려서 없습니다.”
“혀가 없다고?”
무림인 셋은 어이가 없어서 서로를 돌아봤다.
곧이어 악관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세 치 혀가 없어서 입을 안 연다고? 이거야말로 중원 최고의 고문 면피법이 아니고 무엇이냐!”
“남궁진이 이번엔 완전히 헛발을 짚었군, 흐흐흐.”
팽자걸이 따라 웃자 축 늘어진 턱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반면 언자성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이래서 내가 인질 따위 필요 없으니 객잔을 불태우지 말고 매복해야 된다고 했는데… 남궁진 놈 때문에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됐잖아!”
“시간 낭비는 아니지. 재미있는 장난감을 얻었지 않은가? 흐흐흐.”
팽자걸이 손을 내밀자 무사가 도끼 한 자루를 건넸다. 그는 도끼를 젓가락처럼 손가락 사이에서 놀리며 왕일과 왕이한테 다가갔다.
“이번에는 뭘 잘라 줄까? 팔? 다리? 아니면, 흐흐흐! 네놈들이 직접 골라라… 참! 혀가 없어서 말을 못 하지? 흐흐흐!”
그때 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남궁세가 남궁진과 모용세가 모용화정이었다.
오가연맹의 맹주 격인 남궁진이 오자 건물 안의 모든 무사가 일제히 포권지례를 올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중 남궁진의 오른팔인 무사가 입술에 검지를 대고 옆으로 스윽 그었다.
말을 못한다는 신호.
그렇다면 고문으로 얻은 정보가 없으리라.
심복 무사의 보고를 받고 상황을 파악한 남궁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악관비와 팽자걸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언자성은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남궁진과 모용화정을 번갈아봤다.
남궁진은 언자성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했다.
“숙주 선착장에 보냈던 정찰이 돌아왔소. 방주가 침몰해서 운하를 막고 있다고 하오.”
“그래? 소림사에 간다는 놈은 찾았대냐?”
“망자가 나왔는지 생존자는 없다고 했소. 방주가 도중에 침몰했으니 소림사행은 흑도들이 잡았든 제 발로 왔든 객잔에 머물렀을 것이오.”
남궁진의 설명은 일리가 있었지만 언자성이 꼬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 허허벌판에서 객잔으로 왔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길을 우회했을 수도 있지 않냐?”
“망자 떼가 창궐했는데 어디로 말이오? 개봉을 빙 돌아서? 만리장성까지 돌아가면 확실히 망자 떼가 없어서 안전하겠군.”
“…….”
흉노를 막기 위해 시황제가 세운 만리장성은 중원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망자 창궐 지역을 피하려면 그만큼 멀리 돌아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으니, 남궁진의 말은 언자성을 비웃는 것이었다.
“놈이 길을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시간 손해가 엄청날 테니까요.”
모용화정도 남궁진의 말을 거들었다.
언자성은 분통이 터졌지만 남궁진의 논리가 맞았기 때문에 억지로 말을 참았다.
사실 그가 화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남궁진과 모용화정이 뒤늦게 인질 심문 장소에 나타난 이유.
둘은 운우지정을 나누고 온 게 틀림없었다.
실은 언자성은 모용화정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의 미모에 반했다. 하지만 고목처럼 삐쩍 마른데다 수염까지 거칠게 길러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없는 언자성은 모용화정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는 중에 미남자 남궁진이 모용화정을 가로챈 것이다.
남궁진은 오른쪽 눈가에 길게 검상이 난 게 흠이나, 뭇 여인들이 남궁진과 언자성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누구를 선택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런 판에 둘이 대낮부터 운우지정을 나누고 돌아다니니 언자성은 열불이 터졌던 것이다.
‘뻔뻔한 연놈들!’
언자성의 질투 섞인 시선을 남궁진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진은 그를 무시했다.
중원의 여인들을 독차지할 때마다 주위 사내들에게 질투와 분노의 시선을 받아 왔던 남궁진.
남궁진한테 언자성은 여인을 품지 못해서 시기하는 옹졸한 사내 중 하나일 뿐이었다.
“흑도들에게 소문을 풀었지만 애초에 놈들을 완전히 믿진 않았소. 소림사로 가는 자가 흑도들에게 쉽게 잡힐 만큼 어리석진 않았을 테지.”
“그럼 공자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지요?”
모용화정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묻자 남궁진은 씨익 눈웃음을 흘린 다음 말했다.
“기다리는 것이오. 소림사행은 여기로 올 수밖에 없소. 그러라고 지은 요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