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가연맹(3)
서백 일행은 불타서 잿더미가 된 용정객잔을 뒤로 하고 오가연맹 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이제 일행은 추가 인원이 생겼다. 한 명의 술법사와 한 마리의 영물.
일행의 얼굴에는 각자의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다.
서백은 굳은 의지. 주은리는 도도한 자존심. 송현은 언제나 그렇듯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함.
그리고 왕이삼은 억울함.
왕이삼은 내심 이번 일에서 빠지고 싶었다.
서백과 함께 사천당문의 일을 맡을 때만 해도 그는 신바람이 나 있었다. 사천당문의 의뢰가 예상보다 더욱 사특하고 위험한 것이었으나, 그 보답으로 은원보를 두둑이 챙겼으니 해 볼 만한 장사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서백과 함께 다니면서 손해만 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왕이삼도 서백을 따라 소림사에 가고 싶었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사.
금의환향하듯이 소림사에 들어간 뒤 서백과 함께 중원 무림을 구하러 온 영웅 대접을 받고 싶었다.
소림사가 사찰이니 술과 고기를 대접받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울 테지만, 누가 또 아는가? 숭산 아래에 소림사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줄지도…….
그러나 소림사에 가더라도 어깨 위에 목은 붙어 있어야 될 것 아닌가?
무림인 수백 명이 지키고 있을 게 뻔한 요새에 고작 네 명이 잠입한 다음 사람을 구출해서 탈출하자고?
왕이삼이 듣기에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소리!
한때 실전도법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 연줄 좀 잘 닿으면 무림에 이름 석 자 날리지 않겠냐고 생각했던 왕이삼.
그러나 그는 서백과 송현을 만난 뒤로 기대를 싹 접었다.
그는 무림밥을 먹으며 숱한 고수를 목격했으나 서백과 송현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
즉 중원 무림에는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고수가 있다는 뜻.
서백과 송현은 확실히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냥 평범한 도검수가 아닌가…….
그런 자신이 정신 나간 고수들과 함께 절대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판이니, 왕이삼으로서는 억울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길을 가는 중 왕이삼은 몇 번씩 일행에서 빠질 기회를 찾으려고 애썼다.
“저기 후배… 이번 잠입은 아무래도 쉽지 않겠지? 오가연맹 요새는 인원이 수백 명은 족히 될 테니까 말야…….”
하지만 왕이삼이 말을 꺼낼 때마다 서백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홍소육을 못 먹게 된 보답을 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왕 선배?”
“그, 그렇지. 그래야지, 암…….”
서백의 단호한 표정에 질려서 왕이삼은 자기는 빠지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일행을 따라갔다.
한편 서백의 머릿속은 남궁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오대세가를 추려서 오가연맹을 결성한 남궁세가.
그들이 요새를 세워서 세력을 키우고 객잔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넘어갈 수 있었다.
죄를 봐준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원래 그러니까.
힘이 있는 문파와 세가는 원래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자기들 이익을 챙기니까.
세상의 부도덕을 혼자 힘으로 몽땅 처리할 수는 없다. 그건 이상주의자의 만용일 뿐.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이 서백의 결심이었다.
남궁세가는 소림사행 인물의 정보를 흑도에게 뿌리며 포상금을 걸었다. 무림맹과 소림사에게 정식으로 반기를 들었다는 증거.
게다가 망자 창궐을 피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으면서 근방 사람들을 돕기는커녕 객잔에 불을 지르고 인질을 잡아갔다.
서백이 요새에 잠입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주은리를 도와서 왕일과 왕이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서백은 남궁세가가 무림맹의 일을 방해하는 이유를 캐내려는 생각이었다.
‘남궁세가와 오가연맹이 망자 창궐을 이용하려는 생각이라면 그 야심을 뿌리째 뽑아 버린다.’
어차피 소림사에 가는 것도 망자 창궐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망자 창궐을 이용하는 악인들을 응징하는 것은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즉 서백에게 지금 일은 소림사행을 늦추는 방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림사행의 과정 중 하나일 뿐.
오가연맹 요새로 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천의 험난한 지형과 장강의 세찬 물살을 겪으며 소림사행을 이어 온 서백.
그러니 사방이 트인 허허벌판을 이동하는 것은 나들이 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행은 간혹 무리에서 떨어져서 혼자 벌판을 배회하는 망자를 만나면 목을 베어서 황천으로 보내 줬다.
망자 떼와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혹 마주치더라도 접근하기 전에 발견할 터이니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상황.
오히려 오가연맹이 매복을 하고 있을지 몰라서 일행은 숲이나 그늘진 곳이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오가연맹의 잔당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도 남김없이 요새로 철수했다는 뜻. 소림사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이리라.
그렇게 용정객잔을 떠난 지 닷새 후.
서백 일행은 오가연맹의 요새에 도착했다.
주은리는 걸어서 일주일이 걸린다고 말했는데 닷새만에 그 거리를 돌파한 것이다. 그만큼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잠시 지친 몸을 쉬게 해 줬다.
몸을 추스른 주은리가 협곡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숨어서 가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 적의 경비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서백 일행은 눈에 띄지 않도록 암벽 사이에 난 좁은 틈을 골라서 위로 올라갔다.
암벽은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루하게 벌판을 이동하던 때보다 마음만은 편하게 느껴졌다. 잠시 뒤면 오가연맹의 요새가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곧이어 일행은 정상에 올랐다.
일행은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협곡 아래에 세워진 요새를 바라봤다.
“저기가 오가연맹의 요새입니다.”
“……!”
요새를 처음 본 감상은 대단한 절경이라는 것이었다.
“이거 요새 잠입만 아니면 자리 펴고 술 한잔하기 딱 좋은 경치인데?”
왕이삼이 그답게 술타령을 했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이들도 그의 감상에 동감했다. 그만큼 아래에 펼쳐진 광경이 굉장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두 줄기의 암벽.
그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좁은 길목.
암벽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위로 뻗어 있어서 급기야 구름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 아래에 신이 깎아 만든 듯한 바윗덩이와 울긋불긋한 수풀이 우거져 있으니, 작전 수행 중인 서백 일행이 경치에 감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간신히 암벽을 올라왔지만 이후 연결되는 곳은 한 발짝을 걷기 힘들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의 연속이었다.
제아무리 경공의 고수라도 저 암벽을 타고 소림사로 갈 수는 없었다. 차라리 허공답보를 써서 하늘을 날아가는 편이 나으리라.
“암벽 바깥의 황야는 낙양에서 쏟아져 나온 망자 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깥은 망자판인데 소림사로 가는 길은 병풍처럼 솟은 두 줄기의 암벽 사이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요새를 세워서 그 사이를 막고 있다?
오가연맹이 왜 서백을 잡기 위해 수색하지 않고 철수했는지 이해되는 광경이었다. 요새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낙양으로 가는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만약 협곡을 우회해서 돌아간다면 소림사행은 한 달, 아니, 그 이상이 지체될지도 모르는 일.
암벽 너머로 요새의 정문이 보였다. 통나무를 엮어서 거대한 목책을 세운 다음 중앙에 문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만듦새는 왕씨세가 요새보다 훨씬 못했다.
통나무에 역청을 바르지도 않았으며, 끝을 뾰족하게 깎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경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목책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왕씨세가 요새도 삼면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그러나 오가연맹 요새는 그보다 더한 천혜의 요새였다.
눈앞의 협곡은 말이 협곡일 뿐, 암벽 사이에 난 틈새에 불과했다. 그러니 틈새의 앞과 뒤만 목책을 쌓으면 침입자를 방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협곡이 깎아지른 암벽 사이에 위치하는 것도 절묘했다.
왕씨세가 요새는 줄곧 망자 떼가 들이닥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나, 오가연맹 요새는 암벽 때문에 근방의 망자 떼가 접근 불가능해 보였다.
망자 떼의 습격에 대비할 필요가 없으니 경비에 필요한 인원도 크게 줄어들리라.
아니나 다를까 정문의 양옆에 높은 망루가 있었는데, 그 뒤로 요새 내부에도 몇 개의 망루가 어렴풋이 보였다.
망자 떼를 대비한다면 망루는 요새의 정문과 후문에만 설치해도 무방한 일.
그런데 요새 내부에 더 많은 수의 망루가 있다고?
망자 떼보다는 요새 내부에 잠입할지 모르는 무림인들을 수색하기 위한 망루들!
“망루들이 너무 많은데? 이거 쉽지 않겠는걸…….”
왕이삼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중얼거렸다.
“경비들도 문제입니다.”
“경비?”
“왕가 요새 때는 군소 문파의 무사들이었지만 지금은 오가연맹의 무림인들이 경비를 설 겁니다.”
“끄응, 갈수록 태산이군.”
진주언가와 모용세가를 끼워 넣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중원의 내로라하는 다섯 개의 유명세가.
그들이 왕씨세가와 제갈세가의 무사들보다 더욱 뛰어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후배, 우리 길을 돌아가면 어떨까? 옛말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고…….”
“안 됩니다.”
왕이삼이 회유했지만 서백은 한 마디로 거부했다.
“정면 돌파 할 겁니다.”
“…….”
왕이삼은 서백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서백은 요새를 우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궁세가의 야욕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주 소저, 초랑을 시켜서 요새를 정찰해 주십시오.”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네? 어떤 방법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서백도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법을 써서 초랑의 눈과 귀로 요새를 정찰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라니… 대체 무엇일까?
“따라오세요.”
주은리가 몸을 돌려서 정상에서 내려갔다.
서백 일행은 영문을 몰랐으나 일단 주은리를 따라서 암벽을 내려갔다.
요새 망루에서 보이지 않는 장소에 다다르자 주은리가 발을 멈췄다.
“여기가 좋겠군요.”
주은리는 품에서 부적 뭉치를 꺼낸 뒤 그중에서 한 장을 빼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둑판처럼 넓직한 바위 위에다 부적을 평평하게 펼쳐 놓았다.
부적은 괴이한 도형이 붉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도형 안에 있는 글씨는 누구나 아는 글자였다.
묘(卯). 십이지지(十二地支) 중의 네 번째로 토끼라는 뜻.
“저건 토끼 아냐? 대체 뭐하는 거지?”
“그냥 지켜보죠.”
잠시 후 하늘에서 매 한 마리가 세차게 바람을 가르며 내려왔다. 곧이어 매는 날개를 활짝 펼쳐서 속도를 늦추더니 바위를 향해 발톱을 활짝 벌렸다.
그제야 서백 일행은 주은리의 부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날짐승이 진짜 토끼로 착각하게 만드는 부적!
물론 토끼가 있을 리 없으니 매의 발톱은 허공을 낚아챘다.
순간 부적이 살아 있는 것처럼 휙 날아오르더니 매의 발목에 휘리릭 감겼다.
눈앞에서 토끼가 사라져서 어리둥절하는 것 같았지만 매는 본능에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발목에 부적을 칭칭 감고서.
그때 주은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문에 망루 두 개. 후문에도 두 개. 요새 내부에 서 있는 망루는 모두 일곱 개로, 그중 여섯 개는 길게 늘어진 요새의 양쪽 벽면에 서 있습니다. 암벽을 타고 요새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군요.”
주은리가 매의 눈을 통해 본 요새의 모습을 일행에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