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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89화 (89/123)

89화 오가연맹(2)

소림사행 인물을 찾지 못하자 요새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남궁진.

그가 용정객잔을 떠나면서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서백은 스승의 말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중원의 무림인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끝도 없이 악해진다. 명문정파든 사마외도든 상관없이.

왕일과 왕이를 인질로 잡았지만 남궁진을 위시한 오가연맹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는 없을 터.

그들은 객잔을 불태워서 소림사행 인물이 결국 요새를 통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주은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있었다.

더는 전할 말이 없는 듯한 얼굴.

아니, 불타는 용정객잔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

잠시 후 주은리가 입을 열어 말했다.

“모두 갔습니다.”

일행이 땅이 내려간 곳에서 위로 올라와 보니 오가연맹 일당은 말을 타고 떠나서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용정객잔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객잔은 반쯤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당장 달려간다고 해도 불을 끌 방법은 없었다.

망자 창궐 본원지와 가까이 있음에도 부적의 힘으로 멀쩡히 서 있던 객잔.

그러나 무림인 몇 명의 악의에 객잔은 속절없이 잿더미로 변했다. 너무 빨리 타서 보고 있는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누군가한테는 평생을 들여 일군 삶의 터전이지만, 누군가한테는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일 뿐.

그것이 무림의 법칙.

어느새 술이 완전히 깼는지 왕이삼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도망쳐야 되지 않을까? 점소이랑 숙수가 붙잡혔으니 우리가 객잔에 온 걸 금세 불 거다. 자고로 심문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으니까.”

왕이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무림에는 온갖 잔혹한 고문 수법이 즐비했다.

남궁진 정도의 고수가 다섯이나 있으니 점혈이나 어떤 수법을 써서 사람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특히 무림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고문에는 진절머리가 날 만큼 잘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서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두 분은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왜? 사람이 입이 있으면…….”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주은리가 냉랭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둘은 혀가 잘려서 말을 못 합니다. 오래 전에 명문정파인에게 고문을 당했지요.”

“아…….”

그제야 왕이삼은 사정을 깨닫고 말을 삼켰다.

객잔에 처음 왔을 때 점소이가 양춘면 값을 속 시원히 말 안 하고 손가락 짓을 하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점소이 왕일과 숙수 왕이는 혀가 없어서 애초에 말을 못 하는 몸이니 수신호로 생각을 전달했던 것.

서백과 송현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왕이삼이 민망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갑자기 발밑의 수풀이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으악! 이게 뭐야……?”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왕이삼은 고개를 내리고 불청객을 살폈다.

왕이삼의 발밑에서 작은 고개를 세운 채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고양이보다 조금 큰 크기의 담비였다.

담비가 도망가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담비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담비가 순해서 사람을 안 무서워하네…….”

순간 담비가 그르렁거리더니 왕이삼의 손가락을 확 깨물었다.

“아얏! 이놈의 담비 새끼가……!”

왕이삼은 화가 나서 주먹을 쥐었지만 담비는 재빠르게 그의 두 발 사이를 빠져나가며 도망쳤다.

“초랑(貂狼), 이리 와.”

주은리가 부르자 담비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풍성한 소매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얼굴만 내민 채 왕이삼을 보며 그르릉거렸다.

서백이 담비를 보며 물었다.

“초랑이 그 담비 이름입니까?”

“그래요. 마음씨 착하고 아름다운 저의 동료지요.”

“너무 귀엽네요.”

서백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초랑이란 담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초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순한데 아까는 왜 그랬지?”

그걸 보고 왕이삼이 자기도 손을 뻗었는데, 순간 초랑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그르렁거리자 깜짝 놀라서 얼른 손을 움츠렸다.

“왜 나한테만 이래? 성질머리 한번 더럽네.”

“초랑은 누가 만지는 걸 싫어합니다. 오직 순수한 자만이 초랑에게 손을 댈 수 있지요.”

“그럼 나는 더럽다는 얘기냐?”

왕이삼은 투덜거렸지만 동물이 싫다는데 이유를 물으며 따질 수 없는 노릇이니 입을 삐죽 내민 채 등을 돌렸다.

그런데 초랑이 나왔던 수풀 속에 보따리가 하나 있었다.

주은리가 보따리를 들며 말했다.

“용정객잔이 불타기 전 초랑이 물고 온 것입니다.”

불타는 객잔에서 주인의 짐을 물고 탈출한 담비.

그냥 길들인 동물이 아니라 영물이라는 증거!

“거참 신기하군. 저 담비가 주인 말을 그렇게 잘 듣는다고?”

왕이삼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리자 서백이 말했다.

“보따리를 물고 온 것 말고 더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중요한 일?”

“주 소저는 초랑의 눈과 귀를 통해서 오가연맹의 인물들과 대화를 전한 겁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왕이삼이 깜짝 놀라며 묻자 주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평소 왕이삼이었다면 터무니없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주은리가 오가연맹의 대화를 전하는 것은 똑똑히 들었으니 왕이삼으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송현이 덧붙여서 설명했다.

“담비에 자신의 혼백을 연결시키는 기문둔갑 술법의 일종이오. 담비가 보고 듣는 것을 자신의 눈과 귀로 똑같이 느낄 수 있지. 편복선생의 주특기인데 그는 박쥐를 주로 썼소.”

“그 말코도사 얘기는 그만두시지요.”

주은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말투에 가시가 있어도 목소리는 온화한 그녀는 편복선생 얘기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웠다.

“편복선생의 보잘 것 없는 재주는 모두 할아버지한테 배운 것입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도망쳤으니 제 앞가림 하나 못할 사람이지요.”

그 말에 모두는 주은리의 출신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로부터 기문둔갑 술법을 배운 손녀.

또한 할아버지의 제자 중 하나인 편복선생을 말만 나오면 무시하는 걸로 봐서 주은리의 술법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말코도사는 돈을 밝히고 도박을 좋아해서 민폐만 끼칠 뿐입니다. 혹 그자를 알게 된다면 인생에 큰 액운이 들었다 생각하고 빨리 연을 끊는 게 좋습니다.”

인물 평가가 아니라 저주나 다름없는 말.

“말코도사가 부리는 술법도 형편없는 수준입니다. 할아버지한테 몇 가지 잔재주를 배운 게 전부니까요.”

“그래도 편복선생 덕분에 망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지 않소?”

“흥! 어디서 쓸모 있는 부적술 하나 배웠다고 그놈의 성품이 달라지는 건 아니죠.”

송현의 말에 주은리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초랑이 물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에는 여러 물품이 차곡차곡 간수되어 있었는데, 주은리는 그중에서 검은 천을 들어서 활짝 펼쳤다.

그런데 검은 천인 줄 알았던 것은 상체를 덮고도 무릎까지 가릴 만큼 긴 흑포(黑袍)였다.

주은리가 흑포를 어깨에 걸친 뒤 두 팔을 소매에 넣었다. 흑포는 폭이 풍성해서 옷 위에 겹쳐 입어도 무리가 없었다.

이어서 그녀는 흑포처럼 검은 두건을 머리에 쓰고 검은 장화를 신었다. 그러자 하늘하늘한 천옷은 사라지고 전신이 칠흑처럼 검은색으로 도배된 무림인으로 탈바꿈했다.

고관대작의 딸 대신 싸늘하고 신묘한 기문둔갑 술법사가 등장한 것이다.

서백은 그녀의 변신이 일리 있어 보였다.

하늘하늘한 천옷으로는 부적 문신이 붉게 빛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반면 지금 걸친 무복(巫服)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은신하기에 최적이리라.

무복을 걸치자 주은리의 인상마저 날카롭게 바뀐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은리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는데 왕이삼이 눈빛을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주은리는 둘둘 만 종이꾸러미를 품에 넣었다. 짐작컨대 수십 장이 넘는 부적을 미리 그려놓은 것이리라. 나머지 물품은 보따리로 잘 싸서 허리춤에 묶었다.

주은리가 서백 일행을 한 명씩 돌아보며 시선을 교환한 뒤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이만.”

그 말에 왕이삼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잠깐! 어디 가려고 하는 거냐?”

“몰라서 묻습니까? 오가연맹 놈들의 요새지요.”

사실 주은리가 갈 곳은 뻔했다.

왕이삼도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주은리가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혼자 가겠다는 말이냐?”

“아니, 둘입니다.”

“둘?”

“초랑이 있잖아요.”

그 말을 들었는지 주은리의 소매 속에서 초랑이 날렵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왕이삼은 기가 막혀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요새에 백 명이 넘게 있을 텐데 혼자서 간다는 게 말이 되냐? 그건 그냥 자살행위라고!”

“당신이라면 집을 태운 자들을 그냥 놔두고 도망칠 겁니까?”

“하지만…….”

“제 객잔을 불태운 놈들한테 복수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그녀의 말에서 세상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도도한 자존심이 느껴졌다.

그냥 무림인이 아니라 오랜 문파나 세가의 후예라고 짐작되는 구석.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뜻밖의 말을 꺼낸 자를 주은리가 돌아봤다.

서백이었다.

“필요 없습니다.”

주은리의 입가에 비웃는 느낌의 미소가 걸렸다.

“강호의 정리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이유도 없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돕겠다는 겁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가연맹은 저를 붙잡으려고 온 자들입니다. 객잔이 불타고 점소이와 숙수 분이 잡힌 것도 따지고 보면 저 때문입니다.”

“…….”

그 말에 주은리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해졌다.

“어차피 소림사로 가려면 요새를 통과해야 한다니 앞길을 막는 자들이 있다면 베어 버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함께 가겠습니다.”

“진심인가요?”

“네.”

주은리가 조용히 서백을 응시했다.

서백은 피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까지 말투만 존대일 뿐 도도하게 자존심을 높이던 주은리가 서백의 눈빛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이 소년은…….’

서백의 눈빛은 한 점의 때가 없이 맑아서 마치 명경지수처럼 보는 이를 빠져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은 뒤 주은리는 다른 어떤 자들로부터도 받아보지 못했던 감정을 서백에게서 느꼈다.

신뢰.

‘이 소년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서백은 평생을 함께한 친우처럼 믿음직했다.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체구의 소년이 저리도 믿음직스럽다니……. 주은리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감정을 믿을 수 없었다.

“함께 가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은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제 서백의 말 한 마디, 눈빛 한 번에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서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소림사 일이 끝나면 돌아가는 길에 용정객잔에 들러서 홍소육을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가연맹이 객잔을 불태워서 홍소육을 다시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원통함을 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 뭐라고요?”

주은리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백을 쳐다보다가 곧이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도도하지 않은, 해맑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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