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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82화 (82/123)

82화 망자 색출 작전(6)

도화광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송현이 껄끄러운 상대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겨루면 백 초 안에 승부를 내기 힘들 뿐 패배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송현이 뒤에서 접근하는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백 초까지 버티면 비교적 비슷한 적수.

십 초 안에 패배하면 한 수 아래.

일 초에 지면 두 수 아래.

그러나 신법(身法)의 경우 얘기가 다르다.

보법과 경공 등 몸을 움직이는 모든 수법을 통칭하는 말인 신법.

신법은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척도다.

제아무리 명검이라도 신법이 약한 자가 들면 적을 벨 수 없다. 반면 신법의 고수는 평범한 부엌칼을 들어도 전광석화처럼 접근해서 상대의 급소를 찌를 수 있다.

즉 신법에서 밀리면 몇 수 아래라는 뜻!

그런데 방금 송현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는커녕 뒤로 접근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설마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고수라는 말인가?

도화광은 그런 생각을 숨긴 채 물었다.

“쥐새끼처럼 집안에 숨어 있었냐?”

“아니, 그냥 저기 벽에 기대 있었소.”

송현이 검지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하지만 송현이 벽에 기대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서 바닥에는 두텁게 먼지가 쌓여 있었는데, 벽에서 집 중앙까지 먼지바닥에 발자국이 하나도 나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이 도화광의 심장을 더욱 덜컹거리게 만들었다.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다가온 신법.

눈앞의 검객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

도화광은 머릿속으로 승패를 계산해 봤다.

‘수염 놈은 강호에 흔한 도검수.’

‘도검수는 신경 쓸 것 없다. 문제는 저놈의 검객.’

‘일대일로 싸운다면? 쉽게 승패가 나지 않겠지.’

‘저놈과 검을 섞으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시간을 끌어도 불리하다. 만에 하나 그 꼬마라도 오는 날에는 끝장이니까.’

‘그렇다면…….’

잔머리를 굴리던 도화광은 마음을 굳혔다.

속전속결. 최대한 빨리 송현을 처치하고 왕이삼을 인질로 삼아서 자리를 뜬다.

도화광은 숨기고 있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비책.

‘그걸 사용하면 검객 놈도 속수무책일 터.’

짝 짝 짝.

필살의 각오를 다진 도화광은 살기를 숨기기 위해 태연한 척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디, 그 대단한 작전이 어떻게 말이 되는지 고견을 들려줄 수 있나?”

“간단하오.”

도화광이 비꼬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지 송현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본인과 서백에겐 당신 흑도인들 네 명은 일대일이든 일대사든 똑같소. 그러니 굳이 뭉쳐 있을 필요가 없지.”

“하!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군?”

“고수가 하수를 우습게 보는 건 당연하오. 그것도 몇 수 아래의 고수는.”

“…….”

도화광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서백은 몰라도 송현은 충분히 그런 고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수가 하수를 상대할 때의 느낌.

도화광 그런 느낌을 잘 알았다. 하수가 어떤 초식을 출수하든 어떤 계책을 쓰든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처럼 훤히 보이는 느낌을 말이다.

도화광 역시 신속한 보법과 쾌검을 무기로 삼아서 수많은 하수들을 죽였으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송현의 말이 계속됐다.

“서백이 팔방위로 흩어지자고 설명할 때 이미 작전은 시작된 거였소.”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서백은 왜 일행이 흩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다음 할 일을 본인에게 설명했소. 당신이 케케묵은 과거 얘기를 하는 동안.”

“전음이냐? 낌새를 눈치 못 챘는데 어떻게?”

도화광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일반적으로 전음은 전하려는 상대에게만 들리지만, 내공이 월등히 높을 경우 전음을 엿듣는 것이 가능하다.

도화광은 서백이 자신보다 내력이 높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설령 엿듣지는 못한다고 해도 낌새를 눈치 채는 것은 충분할 거라 믿었다.

때문에 서백이 전음을 쓰지 않고 어떻게 송현에게 작전을 설명했는지 의아한 것이었다.

“전음이 아니오.”

“그럼 뭐냐? 독순술?”

“아니,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설명했소.”

“눈동자?”

“흑점에 흑화가 있듯이 표국에는 표사들이 비밀리에 의사소통을 하는 신호가 있소. 좌우로 눈동자를 움직이는 횟수로 뜻을 전하는 거요.”

“고작 그런 걸로 신호를 보낸다고?”

“미리 약속한 말은 충분히 가능하지.”

“어쩐지 꼬마 놈이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리더라니……!”

먼저 서백은 작전을 설명할 때 일행을 좌우로 몇 번씩 훑어 봤다.

그때는 인원이 많아서 그렇다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실은 사소한 동작에 작전을 숨기고 있었다니…….

도화광보다 더욱 놀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왕이삼이었다.

서백이 온갖 희귀한 지식을 지닌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표국의 비밀 신호까지 알고 있다고? 왕이삼은 기가 막혀서 혀를 내둘렀다.

“서백이 본인에게 전달한 신호는 많지만 그중 하나는 가로 획이 셋, 세로 획이 하나였소.”

“그게 뭐나?”

“글자도 깨우치지 못했나 보군. 왕(王) 자요.”

송현이 눈동자만 돌려서 왕이삼을 보며 말했다.

“일행 중 왕씨는 둘이었소. 왕표야 별것 없는 흑도인이니 굳이 본인에게 처리하라고 하진 않았겠지. 그럼 남은 왕씨는 하나. 서백은 선배를 맡긴다는 부탁을 했고 그래서 본인이 여기 온 것이오.”

“…….”

이제 도화광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서백은 도화광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왕이삼을 노릴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 말고도 작전 신호는 많이 있었소. 눈 신호로 보내기엔 조금 복잡했지만 누가 정신없이 떠들어 대는 바람에 시간은 충분했지.”

얼음장처럼 냉랭하던 송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과거 얘기를 꺼내고 꼴사납게 화를 낼 때 서백은 본인에게 작전을 설명한 것이오. 수다가 어찌나 긴지 신호를 모두 보내도 계속 떠들더군.”

“네놈들 그런 수작을…….”

“수작이 아니라 심계라는 좋은 말이 있지.”

스르릉. 송현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세상에는 부모, 스승, 사형제 등에게 배신당한 자가 수두룩하오. 당신 과거가 불행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그러나 벌레 죽이듯 사람을 해쳐도 된다는 법은 없소.”

“흥! 명문정파에도 나 같은 악인은 많다. 그런데 나 하나만 콕 찍어서 선악을 따지자는 거냐?”

“억지 쓰지 마시오. 당신은 명문정파에서 태어났어도 어차피 약자를 조롱하고 해쳤을 테니까.”

“뭐라고?”

“자신의 불행을 핑계 삼아 타인을 죽이는 자는 천벌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소.”

“천벌? 네놈이 하늘이냐?”

그 말에 송현의 입가에서 희미하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네 무공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긴 하지.”

“이 개새끼가……!”

도화광이 욕설을 뱉으며 송현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양팔을 기이하게 휘두르자 소매에서 나와 있는 두 개의 검날이 송현을 노렸다.

눈앞에 두 개의 검날이 날아드는데도 불구하고 송현은 코웃음을 쳤다.

“수리검(袖裏劍)은 소매 속에 숨겨야 위력이 있는 법. 어차피 흑도의 잔재주에 불과하지만.”

그때 도화광의 양 소매에서 수리검이 일 척 가량 늘어나며 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팔에 부착된 게 아니라 검날 중간에 걸개가 붙어 있어서 손에 쥘 수 있는 병장기.

쉬쉭. 두 검날이 송현의 목을 그었다.

“하핫! 목이 떨어져도 잔재주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고만장하던 도화광의 얼굴이 멈칫했다.

두 검날이 분명 목을 긋고 지나갔는데 송현은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인 채 멀쩡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네놈 대체 어떻게…….”

“하수가 고수의 수법을 이해할 수 없는 법. 일 초를 양보했으니 내 차례인가.”

스스스스.

송현의 검이 봄날에 드리워진 아지랑이처럼 도화광의 목으로 날아왔다.

도화광은 쌍검을 십(十) 자로 교차해서 검을 막았다. 그때 송현의 검이 두 개로 늘어났다.

검초가 변화무쌍할 때 일어나는 착시.

실제 검이 두 개가 될 리 없으니 하나는 실초이고 하나는 허초일 터.

‘허초는 무시하고 실초만 막아 내면 이 정도 초식쯤은 아무것도 아니…….’

순간 송현의 무심한 눈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검날이 두 개에서 다시 네 개로 늘어났다.

‘……!’

“이것이 청위표국의 벽운검법이다.”

송현의 무심한 목소리가 도화광의 귓속을 파고드는 찰나 네 개의 검날이 여덟 개로 늘어났다.

이어서 여덟 개의 검날이 열여섯 개로, 열여섯 개가 서른두 개로, 서른두 개가 예순네 개로, 예순네 개가 백이십팔 개로 늘어났다.

벽운검법(碧澐劍法).

푸를 벽에 물결 운. 푸른 해일처럼 상대의 전신을 뒤덮어 버리는 검망(劍網)!

도화광은 그제야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송현과 일대일에서 최소 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고수와의 대결에서 착각의 대가는 목숨!

팟. 툭.

도화광의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결은 검성 한 번 나지 않고 허무하게 끝났다.

멍하니 있던 왕이삼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간신히 살았군. 고맙소.”

“…….”

송현은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안도의 한숨을 쉬던 왕이삼은 무언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이 잘린 도화광의 몸뚱이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선 채로 죽었나?’

그때 도화광의 잘린 목이 입을 쩍 벌리더니 송현의 뒷덜미를 향해 혈선충 다발을 뿜어 냈다.

쐐애애액.

동시에 몸뚱이가 검날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으아악! 뒤에 조심…….”

왕이삼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송현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쩍. 꽥.

도화광의 잘린 목이 수직으로 두 쪽이 났다.

달려들던 몸뚱이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자 송현이 발로 차 버렸다. 몸뚱이는 벽으로 날아가 부딪친 뒤 바닥에 쓰러졌다.

송현은 그제야 청연검을 검집에 넣었다.

“혈선충의 심맥을 갈랐으니 더는 날뛰지 못할 거요.”

“…….”

왕이삼은 둘로 쪼개진 목과 쓰러진 몸뚱이를 번갈아봤다. 그러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도화광이 망자였다고……?”

“그렇소.”

도화광은 자신이 망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다.

자신의 목이 떨어지고 송현이 방심하고 있을 때 뒤에서 급습해서 혈선충 다발로 목을 죈다. 동시에 몸뚱이가 달려들어서 쌍검으로 송현의 등을 쑤신다.

살을 내주고 뼈를 가른다?

아니, 목을 내주고 숨통을 끊는다.

바로 망자밖에 할 수 없는 고육지책.

도화광은 송현이 제아무리 고수일지라도 자신의 기상천외한 술책에는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착각이었다.

착각의 대가는 목숨…….

멍하니 있던 왕이삼은 아까보다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모든 악몽이 끝난 것 같았다.

절대 깨지 못할 것 같던 기나긴 악몽이.

왕이삼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도화광이 명령자였소?”

“아마 이자는 명령자가 아닐 거요. 처음에는 화장을 해서 망자인 줄 의심했었지.”

“왜 화장 때문에… 아!”

왕이삼은 서백이 목에 검흔을 보고 망자를 색출하던 것이 떠올랐다.

“짙은 화장으로 목의 검흔을 감추는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망자 창궐 이전부터 화장을 하고 다닌 듯하니 방주를 타고 오는 중에 망자가 된 것 같소.”

“도화광도 아니라면 명령자는 어디에 있는 거요?”

“어디긴. 서백이 상대하고 있겠지.”

“……!”

그 말에 왕이삼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지금 후배는 혼자 있지 않소? 명령자 상대로 괜찮을지…….”

“걱정할 것 없소. 오히려 걱정해야 될 쪽은 명령자 쪽이지.”

송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원 최고의 망자 전문가와 싸워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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