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망자 색출 작전(5)
장수와 왕표.
중년을 지난 오십대와 한창 때인 이십대.
흑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과 막 흑도에 발을 들인 신출내기.
만 자 모양의 기형도와 날렵하지만 평범한 쌍검.
무엇 하나 똑같은 게 없이 정반대인 두 살수가 지금 하나만큼은 정확히 일치했다.
바로 눈빛이었다.
서백의 말에 두 살수의 눈빛에서 흉포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목을 베겠다고? 너 혼자서?”
“함부로 지껄이다간 혓바닥이 잘리는 수가 있다.”
두 살수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했다.
그러나 여유만만하던 미소는 서백의 다음 말에 싹 사라졌다.
“작전은 실행해야죠. 처음부터 두 분 목을 베려는 작전이었는데요.”
“뭐라고?”
“망자 색출은 말했듯이 거짓말입니다. 실마리가 하나도 없는데 무슨 추리를 한답니까. 단지.”
“뭐냐?”
“함정을 팠습니다. 방주에 흑도인들이 대거 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무림인이 전부 흑도라는 보장은 없죠. 혹시 강호의 정리를 지키려는 선인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흑도든 아니든 저를 노리지 않는다면 죽이지 않을 겁니다. 즉 이 함정은 두 분을 노리고 판 겁니다.”
“네놈……!”
왕표가 이를 부드득 갈 때, 무림 경험이 많은 장수가 무언가를 깨닫고 물었다.
“설마 팔방위로 흩어진 것도…….”
“네. 제 옆에 일부러 두 분이 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야 가장 먼저 저한테 올 테니까요.”
“으음…….”
장수와 왕표의 등에서 어느새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서백이 판 함정이 망자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서였다니…….
왕표가 잔인하게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래봤자 약관도 안 된 꼬마일 뿐이지.”
“허세 부리지 마라. 검객은 어쩔 거냐?”
“……!”
장수의 지적에 왕표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서백이 판 함정에 걸려들었으니 곧 송현이란 검객도 들이닥칠 것이 아닌가?
서백은 몰라도 송현만큼은 무시 못 할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던 살수들.
둘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속전속결. 빨리 꼬마를 제압하고 여기를 빠져나가자.
-좋다.
탓. 장수와 양표가 서백의 좌우로 흩어졌다.
“죽어랏!”
두 살수가 동시에 서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서백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
두 살수는 병장기를 휘두르며 서로 교차했다.
장수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꼬마 놈은 어디 있지?”
그런데 왕표는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서 있었다.
장수가 영문을 몰라서 재차 물으려는 찰나, 왕표의 목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퍽.
이어서 서백이 구석진 곳의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두 분이 협공을 하시는 것 같더니 왜 기형도를 늦추셨습니까? 덕분에 옆의 분만 비명횡사했군요.”
“…….”
서백의 지적에 장수는 입을 다물었다.
실은 그는 왕표보다 반 박자 늦게 서백에게 뛰어들었다.
오랜 시간 흑도인으로 살아온 장수다운 술책.
왕표가 서백을 제압하면 그만, 실패해도 왕표와 일검을 주고받으면 서백의 장단점을 알 수 있으니 이익.
그러나 장수의 술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좌우협공은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중요한데 장수가 한 발 뒤늦게 들어가자 왕표 혼자 서백의 검망으로 뛰어든 셈이 되었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이대일의 유리함은 이미 사라지고 일대일이 되었다. 게다가 서백의 장단점은커녕 언제 검을 베었는지도 보지 못했으니…….
‘이 꼬마는 보통 꼬마가 아니다.’
약관도 안 된 나이. 체구보다 큰 검.
그 어울려 보이지 않는 모습 때문에 서백을 생전 처음 강호에 나온 얼치기로 여긴 것이 실수였다.
무림에서 실수는 곧 죽음!
서백이 검으로 왕표의 잘린 목을 뒹굴 굴렸다.
“혈선충의 심맥이 없으니 망자는 아닙니다.”
“…….”
“무과 시험의 쌍수도는 역시 한계가 있군요. 관의 무공은 쉽고 효율적이어서 빨리 배울 수 있으나 대규모 군대가 펼칠 때나 위력적이지 강호에서 도검으로 밥 먹고 살기에는 부족할 겁니다.”
“…….”
“아, 이제 밥 먹을 일은 없겠군요.”
장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표의 무공을 논하는 서백의 목소리가 지극히 무심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소름 끼쳤던 것이다.
장수가 치켜들었던 만자도를 내리고 말했다.
“나는 싸우지 않겠다. 이대로 떠나서 다시는 자네 눈에 보이지 않을 테니 목숨만 살려 주게.”
패배 선언을 넘어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함.
그러나 장수는 상관없었다.
알량한 자존심보다는 목숨이 백 배는 더 소중하지 않은가.
“남궁세가가 포상금을 걸었다는 얘기가 뭡니까?”
“안휘성과 이 일대에 소문이 쫙 퍼졌다.”
서백이 묻자 장수는 알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가주의 딸이 무림맹 일을 하다 죽자 남궁세가가 무림맹과 척을 졌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선지 몰라도 소림사행을 하는 자를 수배했지. 그자를 용정객잔으로 생포해 오면 포상금을 주겠다고 말이다.”
“제법 괜찮은 정보군요.”
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럼 날 살려 주는 거냐?”
“네? 왜요?”
“아니, 방금 약속을…….”
“전 약속한 적 없습니다.”
“……!”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서백이 손가락을 하나씩 세 개 접으며 말했다.
“첫째,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살았으니 벌을 받을 차례입니다. 둘째, 저를 노리고 온 살수를 그냥 보내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셋째, 당신이 망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망자가 아니다! 제발 믿어 줘!”
“정말입니까?”
“하늘에 두고 맹세하마!”
장수의 눈빛은 간절했다.
서백은 잠시 장수를 보다가 검을 회수해서 등에 걸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십시오.”
“고맙다… 으하하하!”
서백이 몸을 돌린 틈을 타서 장수가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서백의 오른팔을 향해 만자도를 휘둘렀다.
“포상금을 받아야 하니 목은 놔두고 팔 한 짝만 잘라 주마!”
순간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이더니 질풍이 몰아치며 장수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팟. 휘이이잉.
“……?”
장수의 시야에서 서백의 신형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어서 귓가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져서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툭. 데구르르.
장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목이 서백의 검에 베어져서 바닥을 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시야는 점점 까매지다가 영영 암흑이 되었다.
서백이 등을 돌리자 오른팔을 벤 뒤 용정객잔으로 끌고 가려던 술책은 결국 자신의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했다.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살려 둘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서백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검으로 장수의 목을 굴렸다. 혈선충의 심맥은 보이지 않았다.
“둘 다 망자는 아니었군.”
그랬다. 서백은 애초에 장수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장수가 명령자라면 그가 혈귀들을 이끌고 일행을 추격할 테니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서백이 등을 보인 것은 흑도 무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볼 생각으로 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숨을 구걸하던 장수는 기회가 생기자 금세 짐승으로 돌변해서 서백을 노렸다.
장수는 틈을 노렸지만, 실은 서백이 놓은 또 하나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왕 선배는 잘하고 계시려나.”
서백은 무심히 중얼거리더니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작전은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 * *
왕이삼은 어두운 집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대로 온 거 맞나?’
왕이삼의 이동 장소는 일곱 명 중 서남쪽 방위.
망자에게 들킬까 봐 숨죽인 채 이동한 그는 앞에 집이 나오자 얼른 들어와서 숨었다. 줄곧 일직선으로 이동했으니 지금 장소가 맞으리라.
‘후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왕이삼은 이번 작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행이 흩어져 있을 때 혈귀들이 모이는 곳에 명령자가 있다는 서백의 말이 영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이렇게 해서 명령자를 찾을 수 있나?’
그때 창문이 덜컥거리며 열렸다가 닫혔다.
왕이삼은 흠칫 해서 돌아봤지만 혈귀는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창문이 흔들린 것 같았다.
‘젠장.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군.’
그런데 다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인영 하나가 있는 게 아닌가?
“으악… 후배냐?”
“그놈의 후배는 끔찍이도 찾는구나.”
거칠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인영은 다름 아닌 도화광이었다. 그의 화장한 얼굴이 마치 어둠 속에 불그스름한 동그라미가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화광?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왕이삼은 손가락을 접으며 서백이 말했던 팔방위의 순서를 읊었다.
“…송현, 도화광, 나, 소삼락. 네놈은 내 옆의 정남쪽으로 가야 된다고. 혹시 네놈도 방향을 못 찾는 길치냐?”
왕이삼은 쭉 일행이다가 잠시 헤어진 길치 유소운이 떠올라서 물었다.
그런데 도화광의 대답은 전혀 예상 외였다.
“아니, 제대로 왔는데. 나는 네놈을 찾아서 여기 왔거든.”
“뭐라고?”
“꼬마 놈이 무공뿐 아니라 머리도 영리한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자는 작전이 세상에 어디 있냐?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꼴이지, 크크크!”
“…….”
왕이삼은 내심 도화광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네놈 설마 후배를 노리고 있는 거냐?”
“아직도 몰랐냐? 방주에 탄 놈들이 죄다 꼬마를 노리고 있었다.”
“……!”
“킬킬킬, 모르고 있었나 보군. 동료 둘은 그리 영리한데 한 놈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니!”
“흑도 놈이 감히!”
왕이삼이 허리춤에서 박도를 들며 외쳤다
“무림인이 잔머리 굴려서 무엇 하냐? 도검으로 승부를 보자!”
“반가운 말이군. 꼬마는 상대할 수 있지만 그 검객 놈이 까다롭단 말야.”
팟. 도화광의 양쪽 소매에서 검날이 튀어나왔다.
“네놈은 인질로 삼아서 꼬마를 잡을 생각이다. 검객 놈은 네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하겠지만 꼬마는 네놈을 아끼는 것 같으니 다르겠지.”
“…….”
호기롭게 박도를 치켜들던 왕이삼은 침을 삼켰다.
방주에 타기 전 도화광이 현란한 검법으로 이름 모를 사형제의 목을 베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본 수법으로 따지자면 도화광은 자기보다 한 수 위의 고수인 게 분명했다.
왕이삼이 바로 달려들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을 보자 도화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인질로 써야 되니 목을 베지는 않겠다. 기껏해야 손목 두 개 정도?”
“내 후배는 동료를 해친 자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말이! 왜 뿔뿔이 흩어져서 이런 기회를 주냐고? 함께 뭉치지는 못하고 하나씩 떨어지는 작전이란 게 말이 되냐?”
“…….”
왕이삼은 재차 말문이 막혔다.
머리 회전이 느린 그가 생각하기에도 도화광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때 도화광의 뒤에서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말이 될 수도 있지.”
“……!”
도화광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갑자기 나타난 인영의 정체가 누구인지 깨닫자 도화광은 신음을 흘렸다.
“네놈은 그 빌어먹을 검객…….”
“서로 통성명도 한 차에 빌어먹을 검객이라니 흑도답게 무례하군.”
낡은 청의를 걸치고 허리에 검 한 자루를 차고 있는 인영은 바로 송현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본인은 청위표국 출신의 송현이오. 지금은 없어졌지만, 청위표국은 한때 흑도 무리를 쥐 잡듯이 도륙하는 것으로 유명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