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무명소졸의 역습(3)
왕이삼은 방금 목격한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수장이 낙하하는 찰나 청의인이 청포를 휘날리며 검을 뽑고 수장의 목을 벤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왕이삼은 청의인이 언제 검을 뽑았는지 어떤 초식으로 수장을 벴는지 하나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지 하나.
왕이삼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빨라서였다.
왕이삼은 살면서 명문정파 고수들의 대결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하지만 방금 같은 대결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서로 초식을 뒤섞는 일합도 없이,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검성도 없이, 수장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끝나버린 대결.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일검!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도 있나?’
그런데 청의인이 앞으로 나가서 수장의 목을 검끝으로 빙글 돌려보는 것이 아닌가?
왕이삼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서백이 망자의 목을 벤 다음 혈선충을 확인할 때와 청의인의 행동이 똑같았던 것이다.
‘망자인지 확인하는 건가?’
예상이 맞았다.
왕이삼과 눈이 마주치자 청의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망자가 아니라는 뜻.
목을 벤 것도 모자라 망자 확인까지.
청의인의 행동은 신속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것마저 서백을 쏙 빼닮았다.
왕이삼은 청의인이 두뇌가 비상한 대신 무공은 약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청의인은 왕이삼이 감히 수준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였다.
‘머리도 좋은데 무공도 강하다고? 아주 다 가졌군!’
속으로 불평하던 왕이삼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표정을 바꿔서 씨익 웃었다.
그렇다. 아군이 고수라서 나쁠 게 뭔가?
적이 고수인 것보다는 백 배 낫지 않은가!
그때 청의인의 한 마디가 왕이삼을 다시 한번 기막히게 했다.
“저들은 망자가 아니니 당신들이 싸워도 충분할 것이오.”
이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왕이삼의 귓가에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암기하시오.”
“뭘 암기하라는…….”
“좌우좌좌우좌우우. 따라해 보시오.”
“좌우좌좌우좌우우…….”
왕이삼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서 청의인의 말을 반복했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군. 그게 무사들 진영을 깨부수는 비법이오. 계속해서 그 순서를 반복하면 적어도 지진 않을 거요.”
그런 다음 청의인은 공중으로 몸을 날려서 본관 지붕 위로 올라갔다.
휙.
수장의 경공도 엄청났지만 청의인의 경공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다.
청의인은 뛰어오른다기보다 깃털처럼 붕 떠올라서 지붕 위로 날아갔던 것이다.
‘저게 사람이야?’
아니나 다를까 도검수들과 제갈세가 무사들도 청의인의 경공을 멍하니 지켜보느라 잠시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그때 청의인이 지붕에서 무사들 진영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털퍽.
무사들 한가운데 떨어진 것은 방금까지 왕이삼의 발밑에서 뒹굴던 수장의 목이었다.
왕이삼은 혀를 내둘렀다.
‘저건 또 언제 집어 간 거야?’
“당신들은 이미 패배했소.”
청의인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 무감정한 목소리가 무사들을 더욱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저들의 손톱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당신들은 모두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죽을 것이오.”
“……!”
무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청의인의 말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예언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지붕에서 청의인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왕이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우리 보고 저들을 상대하라고?’
무사들은 몇 명이 박도에 당해 쓰러졌지만 왕이삼일행보다 여전히 쪽수가 많았다.
그러나 수장을 잃은 것도 모자라 청의인의 경고를 들은 무사들은 싸울 명분도 사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림 밥을 오래 먹은 왕이삼은 단박에 그걸 눈치 챘다.
‘오호라, 이놈들이 겁을 먹었군.’
“네놈들의 수장은 목이 떨어졌다! 이 싸움은 우리가 이겼다!”
왕이삼은 무사들을 윽박지른 뒤 무림인들을 돌아보며 일갈했다.
“제갈세가를 지키는 개들한테 오늘 박도 맛을 똑똑히 보여 주자고!”
“그거 좋지!”
“내가 명령을 내릴 테니 방해하는 놈들은 몽땅 베어 버려! 좌!”
왕이삼은 청의인이 일러준 순서대로 명령을 내리며 합격진을 이끌기 시작했다.
* * *
본관 지붕을 달리던 청의인은 벽을 타고 내려와 건물 내부로 숨어들었다.
나무로 된 복도를 이동했지만 청의인의 발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스스스스.
어느 순간 청의인이 이동을 멈췄다.
청의인은 그 자리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검을 뽑아서 몸을 회전하며 좌우로 한 번씩 벴다.
파팟.
그러자 복도 양옆의 문이 갈라지면서 뒤에 매복해 있던 무사 두 명이 숨이 끊어진 채 쓰러졌다.
털퍼덕.
매복이 실패하자 앞에 늘어선 문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무사들이 복도로 나왔다.
여덟 개의 문에서 한 명씩 모두 여덟 명의 무사들.
무사들 중 하나가 말했다.
“암습이 통하지 않다니 제법이구나.”
그 말에 청의인이 예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중원에서는 쥐새끼가 숨어 있는 걸 암습이라고 부르나 보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심장 박동 소리.”
“뭐라고? 설마 그게 들릴 리가…….”
“거짓말이오.”
“네놈…….”
무사인은 그제야 청의인에게 조롱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소리를 죽여도 기척을 없애지 못하면 고수가 되지 못하는 법. 그게 당신들의 한계요.”
“제갈세가의 본관에 혼자 들어온 주제에 겁이 없구나. 오늘이 네놈 제삿날인 줄…….”
그때 무사의 말을 끊고 청의인이 차갑게 말했다.
“말이 많군. 제갈세가는 입으로 싸우는가?”
“…죽여라!”
무사들이 청의인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 * *
제갈혁은 탁자에 대야를 놓고 술법을 부리는 중이었다.
대야 옆에는 한 권의 서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서책에 적힌 붉은색 글귀는 글자인지 그림인지 알아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제갈혁이 글귀의 획을 따라 양손을 움직였다.
이어서 그가 양손을 휘젓자 대야 속에 가득찬 물이 저절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붉은 잎을 빙빙 돌렸다.
“꼬마 놈이 제법 끈질기군. 이걸로 끝장내 주마.”
그때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누구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본인은 들은 적 없소만.”
“……!”
제갈혁은 방에 들어온 자가 무사들 중 하나가 아니라 불청객인 것을 깨달았다.
“감히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다니!”
제갈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탁상에 있는 붓을 집어서 불청객에게 날렸다.
솨아아아.
글씨를 쓰는 평범한 붓은 제갈혁이 투척하자 마치 강철로 주조한 판관필처럼 꼿꼿이 날아갔다.
제갈혁이 붓에 엄청난 내력을 실어서 던졌다는 뜻.
그런데 불청객이 한 손을 들어 가볍게 붓을 받는 것이 아닌가?
탁.
붓을 받아 든 자는 바로 청의인이었다.
“문사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붓을 남한테 주다니, 중원 사람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며 비웃을 일이오.”
“네놈… 평범한 놈이 아닌 건 알았지만 내가무공이 상당하구나.”
“평생 남는 게 시간이라 수련을 좀 했소.”
“적당히 머물다가 떠났으면 곱게 보내 주려 했건만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니 할 수 없지.”
그러자 청의인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말했다.
“거짓말 마시오.”
“뭐라고?”
“서백이 소림사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붙잡으려는 당신이 본인을 놔주겠다고? 절대 그럴 리 없소. 당신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본인과 왕이삼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속셈이니 말이오.”
“…….”
청의인의 말에 제갈혁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꼴은 문사 행세를 하면서 입은 거짓말만 내뱉고 있으니 당신이 있을 곳은 무림이 아니라 구중궁궐이오. 거기는 세 치 혀를 잘 놀릴수록 출세하기 쉬운 곳이지.”
“뭐라고!”
제갈혁이 품에서 두 개의 판관필을 꺼내며 일갈했다.
“네놈 이제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
“본인은 개방도가 아니니 구걸은 안 하오. 그리고 이거.”
슥. 청의인이 붓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선물은 감사하나 본인은 문사가 아니라서 필요 없으니 돌려주겠소.”
청의인이 제갈혁에게 붓을 던졌다.
스스스.
붓은 마치 줄에 매달린 것처럼 똑바르게 제갈혁을 향해 날아갔다.
청의인도 제갈혁처럼 내력을 실어서 던진 것이 확실하나 속도와 기세가 그에 못 미치는 것 같았다.
제갈혁이 그걸 보고 피식 비웃었다.
“내가무공이 제법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별로…….”
그런데 다음 순간 붓이 갑자기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속도를 높이더니 제갈혁의 눈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쐐애애액.
제갈혁은 깜짝 놀라서 손을 뻗어 붓을 잡았다.
그러나 제갈혁의 손가락들은 붓에 실린 엄청난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져나갔다. 그리고 붓은 계속해서 날아와 제갈혁의 손바닥을 꿰뚫어 버렸다.
팍.
제갈혁의 손바닥을 관통한 붓은 그대로 날아가서 벽을 뚫고 박혔다.
“크으윽!”
제갈혁은 비명을 지르며 피가 철철 흐르는 손바닥을 부여잡았다. 그 바람에 탁상에 놓인 대야를 자기 손으로 쳐 버렸다.
와장창창. 대야가 물을 쏟으며 뒤집어졌다.
그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며 청의인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옛말에 동생이 형보다 낫기 힘들다더니, 제갈성의 십분지일도 못 되는 둔재로군.”
“네놈……!”
제갈혁은 다시 술법을 부리려고 했으나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야는 거꾸로 뒤집어졌으며, 물 위에 떠 있던 붉은 잎은 구겨진 종잇장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지금까지 제갈혁이 부리고 있던 술법이 몽땅 풀려 버렸다는 뜻!
“제갈세가가 반드시 네놈의 목을 가져갈 테니 기다려라!”
제갈혁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탁상 밑에 있는 장치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제갈혁이 앉아 있는 의자 밑의 바닥이 활짝 열리면서 그의 신형이 지하로 사라졌다.
제갈혁이 도망치자 청의인은 그답지 않게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술법만 신경 썼지 기관장치까진 생각 못 했군.”
그러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놈이 지하로 내려갔으니 마무리는 동료한테 맡겨도 되겠지.”
* * *
제갈명재가 변화무쌍한 초식으로 서백을 향해 판관필을 내질렀다.
쉬쉬쉬쉭.
두 개의 판관필은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요동치며 서백의 요혈을 노렸다.
반면 서백은 단순하고 우직한 움직임으로 방어에만 집중했다.
망자의 초식이 사람보다 더욱 현란한 기현상.
만약 보는 자가 있었다면 두 눈을 믿지 못할 기이한 광경이리라.
까깡.
판관필과 검이 충돌하자 서백은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 제갈명재는 이번에는 판관필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서백을 밀어붙였다.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전신의 허점이 그대로 노출된다. 그러면 제갈명재의 판관필은 사정없이 근골을 꿰뚫을 것이다.
서백은 한 손으로 검면을 받치며 맞섰다.
외공과 외공의 힘겨루기.
제갈명재의 신체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니나 다를까 석가심결을 시전하지 않고 그의 힘을 받아내는 서백의 신체가 비명을 질렀다.
으드득.
서백의 전신에서 뼈와 관절이 비틀리고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갈명재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었다.
혼백 없는 혈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영문은 모르지만 제갈혁은 가주를 단순한 혈귀가 아닌 망자로 만들고 조종하는 것이리라.
그때 서백은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을 느꼈다.
-발은 태산처럼 굳건히.
-검은 질풍처럼 거침없이.
오랫동안 미처 잊고 있었던 말.
바로 석가장 무공을 시작할 때 처음 배우는 기본 중의 기본!
절체절명의 순간 서백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정하지. 말로만 듣던 제갈세가의 술법은 확실히 대단하군.”
으드드득.
“그 대단한 술법으로 한다는 게 고작 이런 거냐?”
으드드드드득.
“그 대단한 술법을 왜 중원의 평화를 위해 쓰지 않는 거냐!”
순간 서백이 양팔을 쭉 뻗으며 제갈명재의 두 손을 역으로 밀어붙였다.
팟!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던 제갈명재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찰나.
두 개의 판관필이 수수깡처럼 두 동강 났다.
콰창!
동시에 판관필에 온힘을 쏟고 있던 제갈명재의 두 손목이 반대로 꺾이며 부러졌다.
빠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