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무명소졸의 역습(4)
제갈명재가 멍한 눈빛으로 서백을 쳐다봤다.
그는 자신의 두 손목이 분질러진 게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법했다.
술법에 의해 강화된 제갈명재의 외공을 압도해 버렸으니 만약 제갈혁이 옆에서 보았다면 두 눈을 믿지 못하고 경악했을 광경!
크아아악.
제갈명재가 재차 판관필을 휘두르며 초식을 펼쳤다.
하지만 그 위력이 이전의 절반도 못 미쳤다.
뼈가 부러져서 두 손목이 너덜너덜 흔들렸고, 그 바람에 변화무쌍하던 초식은 온데간데없이 엉터리로 출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백은 방심하지 않았다.
제갈명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망자다.
어떤 기상천외한 수법을 펼쳐도, 예를 들어 동귀어진 같은 수법을 펼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핏빛처럼 붉게 물들었던 제갈명재의 문신들이 갑자기 기세를 잃고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쉬이이이이.
아니나 다를까 맹수처럼 뿜어내던 제갈명재의 안광도 봄날 아지랭이처럼 흐느적거리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서백은 무슨 일인지 꺠달았다.
제갈명재에게 걸린 술법이 깨진 것이었다.
그 말은 즉 지상에서 청의인과 왕이삼이 제갈혁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뜻!
동료들의 고군분투에 서백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빨리도 술법을 깨셨습니다.”
술법의 힘이 사라졌으니 더 시간 끌 이유가 없었다.
서백이 검을 가로로 베자 제갈명재가 두 손을 들어서 판관필로 막았다.
그러나 손목이 부러진 것도 모자라 술법까지 사라진 이상 제갈명재는 서백의 적수가 아니었다.
서백의 검은 제갈명재의 두 손목을 베고 지나쳐서 그대로 목까지 베어 버렸다.
촤아악.
이어서 서백은 목을 잃고 멀뚱히 서 있는 제갈명재의 몸통을 발차기로 날려 버렸다.
퍽. 털퍼덕.
‘드디어 끝났군.’
서백은 길게 숨을 고르며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반면 머릿속은 수많은 상념으로 복잡했다.
제갈명재의 판관필을 막고 두 손목을 부러뜨린 힘은 외가무공 수련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기도 모르게 석가심결을 시전했다는 뜻.
‘시간이 흘러서 석가심결을 다시 시전할 수 있게 된 건가?’
그것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석가심결 시전 시간을 좀 더 명확하게 계산해 봐야겠군.’
석가심결을 완벽하게 다듬을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던 일전.
상념이 끝나자 서백은 제갈명재의 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때 무림의 명숙이셨으니 장례는 제대로 치러 드리겠습니다.”
서백은 품에서 기름통과 화섭자를 꺼낸 다음 아직 혈선충이 꿈틀대고 있는 잘린 목을 불태웠다.
꾸웨에엑…….
그리고 혈선충이 완전히 불길에 타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려서 지상으로 향했다.
* * *
청의인이 제갈혁의 탁상으로 가자 그곳에는 제갈혁이 다급히 도망치느라 놓고 간 서책이 있었다.
붉은 획으로 뜻을 알아볼 수 없는 도형을 쪽마다 그려 넣은 서책.
‘흑랑비서의 사본이군.’
흑랑비서는 소림사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은 무림맹의 제갈성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흑랑비서의 사본이 제갈세가 이공자의 손에 들어오다니…….
제갈성이 동생한테 사본을 준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청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갈성은 야심이 넘치는 인물이지만 중원 무림의 안위를 저버리면서 사적인 욕심을 챙길 정도로 악인은 아니었다.
그럼 제갈혁에게 흑랑비서 사본을 넘긴 자는 누구란 말인가?
‘제갈성한테 흑랑비서를 빌릴 수 있는 자.’
그 조건을 만족하는 자는 손에 꼽을 수 있으리라.
바로 무림맹을 구성하고 있는 명숙들.
무림맹은 중원을 침범한 서장 구륜사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중원 무림의 각 문파와 세가는 최고 고수 또는 중요 원로를 무림맹에 파견했다.
이후 무림맹은 흑랑성 사건이 끝나서 유명무실해졌지만 아직 무림맹과 연줄을 끊지 않은 명문정파는 적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겠군.’
무림맹의 명숙들 중 하나가 제갈혁에게 흑랑비서 사본을 유출한 게 분명했다.
이유는 뻔했다.
‘망자 창궐을 이용해서 위세를 떨치려는 수작.’
제갈혁의 배후 인물은 흑랑비서의 비밀을 캐내라고 제갈혁을 사주했을 것이다.
또한 제갈혁이 가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힘을 빌려 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였으리라.
‘소림사에 가서 할 일이 하나 늘었군.’
중원 무림을 배신한 자를 색출해서 응징해야 한다.
그자를 그냥 놔두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테니까.
권력을 쥔 자들이 자신의 이익만 탐하고 있으니 강호는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아니, 강호란 게 원래 그랬나?’
청의인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왕이삼과 무림인들이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여기 있었군. 다친 곳은 없소?”
“본인은 괜찮소.”
청의인은 재차 쓴웃음을 지었다.
왕이삼의 마음 씀씀이가 오지랖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할 판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왕이삼의 마음이 고마웠다.
마치 예전의 그들 같지 않은가?
실력은 명문정파의 고수만 못하지만 서로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잠행무사들.
실은 청의인이 제갈혁의 방에서 당장 떠나지 않고 머무른 것도 왕이삼 일행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과거였으면 스스로 위기를 자처하는 왕이삼 같은 자는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 채 제갈혁을 추격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청의인은 운남을 떠나 중원에 돌아오면서 무엇보다 동료를 우선하기로 맹세했다.
강호의 정리란 별다른 게 아니니까.
특히 성격은 단순한데 실력은 일류에 못 미치는 왕이삼은 뒤를 봐줘야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뒤치다꺼리를 했었군.’
과거 생각이 떠오르자 청의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이삼은 대책도 없이 일을 저지를 태세였다. 그가 기관장치로 바닥이 열려 있는 지하를 보며 말했다.
“후배가 혹시 저기 있는 거요? 에라이, 내가 갈 테니 기다려라!”
협소한 지하 통로를 그토록 진절머리 내던 왕이삼은 서백을 찾아 당장 지하로 뛰어들 기세였다.
‘단순무식한 건 정말 중원 최고로군. 차라리 소림승이 되었으면 딱 어울릴 텐데.’
청의인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 행동이 완벽에 가까운 그도 잠시 잊어버린 게 있었다.
왕이삼이 소림승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단점.
술!
‘아차, 술을 못 끊을 테니 승려는 못 되겠군.’
청의인이 지하로 뛰어들려는 왕이삼을 막으며 말했다.
“후배는 저기 없소. 저긴 이공자가 도망친 곳이오.”
“뭐라고? 그럼 왜 뒤쫓지 않고 있는 거요?”
“본인은 뒤쫓는 것보다 앞질러 가 있는 것을 선호하오.”
청의인은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생각했다.
‘좁은 복도에선 합격진이 무용하지만 이젠 굳이 펼칠 필요 없다.’
게다가 제갈혁이 도망치느라 무사들이 따라갔을 테니 암습도 없을 터.
“모두 내 뒤에 일렬로 따라오시오.”
청의인의 목소리가 예의 거부할 수 없이 싸늘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왕이삼과 무림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뒤를 따랐다.
* * *
지하로 도망친 제갈혁은 비밀 통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항상 품격 있는 문사처럼 고고하게 외모를 꾸미는 그가 지금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오른손은 붓에 꿰뚫려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얼굴은 대야를 엎으면서 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물범벅이 되었던 것이다.
제갈세가의 이공자로 태어나서 평생 호의호식한 그는 오늘 같은 수모는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다짐했다.
‘내 이 수모를 몽땅 갚아 주마!’
갑자기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씨익 웃었다.
‘그래. 팔진을 펼쳐서 놈들을 일망타진하자!’
석병팔진(石兵八陣)의 줄임말인 팔진.
팔진은 촉나라의 명승상이자 제갈세가의 시조인 제갈량이 만든 진법이었다.
특히 팔진은 변화무쌍하며 기기묘묘해서 한번 안에 들어간 자는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후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술법을 거두지 않는 이상 팔진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만신창이로 도주하는 중이었지만 제갈혁은 자신만만했다. 그만큼 팔진의 위력은 대단했다.
게다가 제갈혁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망자들에게 팔진 술법을 건 다음 지상에 풀어 버리자!’
망자 떼가 지상으로 올라가서 팔진에 따라 움직이면 현재 제갈세가에 있는 사람들은 영영 밖으로 도망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후 제갈혁은 유유히 세가를 떠나서 전열을 정비한 뒤 돌아올 생각이었다.
서백이란 꼬마 놈은 그때 죽이고 소림사행 정보를 빼앗으면 그만이리라.
‘아니, 죽일 필요도 없겠군. 다시 돌아왔을 때는 꼬마 놈은 물론 모든 놈들이 망자가 되었을 테니까.’
힘들게 모은 망자들의 숫자가 몇 배로 불어날 것을 생각하자 제갈혁은 마음이 통쾌해져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그때 어둠 속에서 인영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지하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아는 자는 자신이 부리는 무사들밖에 없다. 제갈혁은 당연히 인영이 부하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잘 왔다. 지상의 싸움은 어찌 되었느냐?”
그러자 인영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몰라? 무슨 대답이 그래?”
“망자굴에서 시간을 오래 허비하느라 지상 소식은 아직 모릅니다.”
스윽.
인영이 어둠 속에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네놈은……!”
“부하가 아니라서 많이 실망하셨습니까?”
인영의 정체는 바로 서백이었다.
제갈혁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하얗게 질렸다.
“대체 어떻게?”
그가 설계한 망자굴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굴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제갈혁이 직접 만든 회심의 병기가 있지 않은가?
전신에 부적 문신을 새긴 최강의 망자가.
아무리 술법이 깨졌다고 하지만 문신 망자를 제압할 자는 이 근방에는 없었다. 그 망자를 쓰러뜨리려면 적어도 명문정파의 절정 고수 반열에 올라야 가능할 텐데…….
설마 눈앞의 꼬마가 절정 고수라는 말인가?
제갈혁이 아연실색하고 있을 때 서백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고 말했다.
“혹시 술법이 깨져서 제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십니까? 걱정 마시죠. 술법이 있을 때 쓰러뜨렸으니까요.”
“……!”
타인을 깔보는 성정인 제갈혁은 평소라면 서백의 말을 코웃음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백의 말투와 표정은 어느 것 하나 거짓을 꾸미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갈혁이 갑자기 씨익 웃으며 검지로 서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네놈, 지금까지 망자굴에서 도망치느라 젖 먹던 힘까지 다 썼구나?”
제갈혁의 지적은 정확했다.
서백은 밤새도록 망자굴을 배회하느라 지쳐 있었다. 또한 피풍의는 곳곳에 긁힌 자국 투성이였으며, 검끝은 바닥에 닿도록 질질 끌면서 걸어왔던 것이다.
“네. 많이 지쳤습니다.”
“어린놈이라 병법을 모르는구나. 불리할 때는 후퇴, 유리할 때 싸우는 것이 병법이다!”
제갈혁은 서백의 지친 모습을 보자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네놈이 잠시 승기를 잡았다만 기세가 떨어질 때는 후퇴할 줄도 알아야지. 그럼 병법을 가르쳐 준 대가를 받아가마. 바로 네놈의 목이다!”
처척.
제갈혁이 품에서 두 개의 판관필을 꺼냈다.
그런데 서백이 제갈혁의 판관필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딴청을 피우듯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뭐라고?”
“술법이 깨진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묻고 있습니다.”
“음, 반 시진쯤 된 것 같군.”
“반 시진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무슨 소리냐?”
“중지한 지 반 시진이 지났으니 다시 시전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석가심결 시전.
팟.
다음 순간 서백이 걸친 피풍의가 광풍에 사시나무 떨듯이 세차게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제갈혁의 두 눈이 희둥그레졌다.
“서, 설마 이건…….”
고수가 엄청난 내력을 끌어올릴 때 주위에 바람이 부는 현상을 일으킨다는 내가무공 최절정의 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