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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59화 (59/123)

59화 무명소졸의 역습(2)

박도를 든 네 명의 도검수 출신 무림인들.

그리고 낡은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찬 청의인.

어디 한 구석 어울리지 않는 무명소졸 다섯 명이 당당하게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상대는 제갈세가.

그런데 왕이삼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청의인이 뽑은 무림인 세 명이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첫째, 얼굴이 모두 험상궂었다.

무림인들은 얼굴에 검상이 나 있거나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서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둘째, 체격이 건장하고 근육질이었다.

등빨과 어깨빨이 상당한 것으로 보아 외공을 주로 수련한 자들 같았다. 그중 하나는 살집이 많고 비대했으나 물렁살이 아니라 근육이 붙은 몸이었다.

결정적인 마지막 공통점.

세 명 모두 왕이삼처럼 묵직한 박도를 등에 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눈에 봐도 힘 좀 쓰겠다 싶은 떡대들.

왕이삼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거 왠지 나랑 비슷한 자들 같은데 기분 탓인가?’

실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왕이삼이 그렇게 느낀 것도 당연했다.

청의인은 왕이삼과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철저히 그와 닮은 무림인들을 뽑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채 왕이삼이 청의인에게 물었다.

“함께 오는 무림인들이 죄다 박도를 쓰는 것 같은데?”

“맞소.”

“왜 세 명 다 박도만 뽑은 거요? 내가 병법은 모른다만 병장기는 도(刀), 검(劍), 창(槍)을 섞어서 뽑아야 강한 것 아니오?”

“반드시 그렇진 않소.”

청의인이 왕이삼과 무림인들을 불러 모은 뒤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시오.”

청의인이 검자루 끝으로 땅에다 둥근 원을 그렸다.

“지금부터 네 명은 동서남북 사방위에 서시오.”

그가 원에서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네 곳에다 표시를 했다.

“북을 제외한 동서남은 중앙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야 되오.”

청의인이 설명하는 것은 동서남북 사방위를 지키는 합격진이었다.

“주의할 점은 합격진이 북으로 전진한다는 것이오. 즉 동서에 선 자는 옆걸음을, 남에 선 자는 등을 돌린 채 뒷걸음질 쳐서 이동해야 하오.”

청의인은 합격진의 이동 방향을 강조하기 위해 북쪽으로 화살표를 그렸다.

“본인이 두 가지 명령을 내릴 것이오. 좌(左)와 우(右). 좌일 때는 박도를 왼쪽으로 베시오. 우일 때는 마찬가지로 오른쪽으로 베시오.”

이어서 그는 북쪽의 좌우에다 옆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화살표 두 개를 그렸다.

“그다음이 중요하오. 박도를 휘두를 때마다 각자 방위가 돌아가면서 바뀌게 되오. 만약 북(北)에 선 자가 좌로 베면 서(西)로, 우로 베면 동(東)이 되는 것이니 그때그때 방위에 맞게 이동해야 하오. 이해하겠소?”

“그러니까 옆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싸우라는 말이오?”

“그렇소.”

무림인 셋은 설명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삼은 머리가 복잡했지만 다른 무림인들에게 지기 싫어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호기롭게 앞장을 섰다.

“별것 아니구만. 내가 선두를 맡겠소.”

왕이삼이 선두에 선 것은 내심 꿍꿍이가 있었다.

박도를 횡으로 베면 보법을 밟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돈다.

거기까지는 쉬운데 계속해서 박도를 베면 동서남북을 빙빙 도는 셈이 되지 않는가?

즉 왕이삼은 청의인이 설명한 합격진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가장 쉬운 북을 맡겠다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연습 좀 하게 제발 천천히 싸우자.’

그러나 하늘은 왕이삼의 기도를 외면했다.

제갈세가의 본관에서 자욱한 흙바람을 뚫고 복면을 쓴 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바로 제갈세가의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은 언뜻 봐도 스무 명이 넘어 보였다.

왕이삼 일행보다 쪽수가 네 배 이상 많다는 뜻.

하지만 일평생 도검수로 먹고산 왕이삼과 무림인들은 적어도 기세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제갈세가에 맞설 때부터 어차피 죽음은 각오한 터.

“와라!”

왕이삼이 크게 일갈하며 박도를 움켜쥐었다.

순간 무사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타타타탓.

경공 하나만으로도 실력 차이를 알 수 있는 상황.

‘제길. 이거 쉽지 않겠군.’

왕이삼이 이빨을 꽉 깨물 때였다.

“좌.”

청의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왕이삼은 반사적으로 박도를 오른쪽 대각선 위로 치켜든 다음 왼쪽으로 베었다.

부우웅.

박도는 허공을 갈랐지만 막 달려들던 무사가 뒷걸음질 칠 만큼 위세 하나는 대단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잠깐, 이러면 방어는 어떻게 해?’

박도를 휘두르느라 몸이 왼쪽으로 돌았으니 오른쪽은 무방비 상태.

아니나 다를까 무사가 왕이삼의 빈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죽었구나.’

왕이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그런데 달려들던 무사가 멈칫거리며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서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하던 왕이삼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무사가 뛰어들 때 왕이삼의 오른쪽에 있던 무림인이 왼쪽으로 돌면서 박도를 베는 바람에 무방비였던 왕이삼의 빈 곳이 자연스럽게 방어가 된 것이다.

그때 청의인이 재차 명령했다.

“좌.”

왕이삼과 무림인들은 다시 한번 왼쪽으로 돌면서 박도를 베었다.

왕이삼은 그제야 합격진의 원리를 깨달았다.

박도는 파괴력은 높은 반면 한 번 휘두르면 상대에게 허점이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왕이삼이 박도를 휘두른 다음 바로 옆에서 박도를 똑같이 휘두르고 들어오니 허점을 막아 주게 된 것이었다.

물론 왕이삼도 왼쪽에 있는 무림인을 방어해 주는 셈이 되었다.

네 명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공격에만 전념하면 방어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효과적인 합격진!

왕이삼은 어이가 없었다.

‘뭐 이렇게 단순한 합격진이 다 있어?’

그런데 그 단순함이 생각보다 위력이 있었다.

떡대 네 명이 휘두르는 네 개의 박도가 풍차처럼 돌아가자 무사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청의인의 명령이 기가 막혔다.

“좌 우 좌 좌 우 좌 우 우 우…….”

청의인은 네 명이 만든 합격진의 중앙에서 무사들의 움직임에 맞춰 좌우를 교묘하게 섞어 명령했다.

그러자 합격진은 한쪽 방향으로 도는 게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돌았다가 거꾸로 돌기를 반복했다.

청의인이 왕이삼과 비슷한 자들을 뽑은 것도 합격진의 완성도를 높였다.

체구가 비슷한 떡대 네 명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동일한 자세와 동작으로 박두를 휘두르자 그 위력이 몇 배 이상 배가되었던 것이다.

부웅 부웅 부웅 부웅!

“와하하하! 천하의 제갈세가도 도검삼림을 헤쳐 나온 우리들한테는 어림도 없지!”

왕이삼은 무사들이 합격진에 쩔쩔매는 것을 보고 신바람이 났다.

지금은 당황하는 무사들도 처음에는 합격진을 보고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가소로운 합격진이군. 모두 돌격해서 박살 내자.

하지만 합격진이 의외로 단단했다.

특히 무사들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허를 찌르는 청의인의 명령이 만만치 않았다.

그 결과 무사들은 합격진을 파훼하기는커녕 점점 더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저런 엉터리 합격진에 농락당하다니!

어느새 합격진은 무사들의 포위망을 밀어붙이며 본관 건물로 접근했다.

무사 하나가 수장에게 물었다.

“제길, 천한 삼류 놈들이! 이제 어떻게 할까요?”

“…….”

무사들을 이끄는 수장은 중년의 나이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그런 그도 이렇게 단순무식한 합격진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네 명이 동서남북 사방위를 지키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게 전부인 진법이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 뜻밖에도 효과적이었다.

수장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박도 때문이군.’

박도는 날이 넓고 자루가 창처럼 긴 도검이다.

한 번 휘두르면 약점이 노출되기 때문에 검을 주로 쓰는 명문정파의 고수들은 하수나 쓰는 거라며 비웃는 병장기.

그러나 단순한 합격진과 박도가 합쳐지자 무시 못 할 위력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평소 빠르고 표홀한 검법 위주로 수련했다.

후에 명문정파를 상대할 것을 대비해서 제갈혁이 명령한 것이었다. 고수를 상대할 때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것이 제갈혁이 고안한 작전이었다.

반면 눈앞의 합격진은 고수의 움직임과 전혀 달랐다.

‘쾌(快)를 버리고 중(重)을 택했군.’

속도보다는 묵직함으로 제갈세가의 무사들을 밀어붙이는 합격진!

수장은 기가 막혔다.

박도밖에 쓸 줄 모르는 어중이 도검수들.

그런데 박도만 쓰는 도검수 네 명을 모아서 이런 합격진을 구사한다고?

게다가 그 합격진이 자신이 이끄는 무사들과 상극이라니…….

도검수 네 명의 중앙에서 명령을 내리는 청의인이 합격진을 구상한 장본인이리라.

‘위험한 놈이다.’

수장이 잡념에 빠진 사이 무사들의 보고가 쏟아졌다.

“놈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본관 방어가 뚫립니다.”

“합격진은 단순하지만 명령하는 자가… 빌어먹을! 명령자가 뛰어납니다.”

“맞습니다. 왼쪽 오른쪽 베기만 명령하는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절묘해서… 혹시 독심술을 쓰는 건 아닐까요?”

그 말에 수장은 사나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독심술? 저 삼류 무림인 놈이 이공자님처럼 술법이라도 쓴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수장은 무사를 나무랐지만 내심 그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하긴 저 정도면 독심술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청의인은 무사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꿰뚫고 있었다.

“전원이 달려들어서 한 번에 박살 내겠습니다!”

“아니다.”

무사들이 보고했지만 수장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과거 구대문파 중 한 곳에 속하는 제자였다.

문파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자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제갈세가에 몸을 의탁한 지 어언 십여 년.

일류를 넘는 고수였던 그에게 무사들과 합격진을 벌이는 것은 애초에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런 차에 일대일로 상대할 만한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봤자 삼초식이면 목이 떨어질 테지.’

오랜만에 고수의 목을 벤다고 생각하자 숨겨 둔 살심이 불타올랐다.

“내가 명령자의 목을 베겠다.”

수장이 도검수들의 중앙에 홀연히 서 있는 청의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합격진에 접근하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회전하는 것은 약점이 있는 법. 놈의 목을 베면 합격진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그때를 노려서 삼류 놈들을 몰살해라.”

“존명!”

명령을 내린 뒤 수장은 슬쩍 몸을 빼서 본관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벽을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휙.

그는 합격진의 치명적 약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팽이처럼 도는 것은 중앙이 약점이지.’

세 차례 허공을 밟으며 몸을 띄운 수장은 합격진의 중앙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쉬이이익.

‘어리석은 놈. 하찮은 수작을 박살 내 주마!’

마침 왕이삼은 북 방위에 있었기 때문에 지붕에서 수장이 엄청난 경공으로 도약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순간 왕이삼은 수장이 일류 수준을 넘는 고수라는 것을 직감했다. 또한 그가 노리는 게 청의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급해진 왕이삼은 공중을 향해 박도를 휘둘렀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박도는 수장은 스치지도 못한 채 허공을 갈랐다.

왕이삼이 뒤를 보며 소리쳤다.

“고수다! 위험하다!”

그런데 청의인의 대답이 어이가 없었다.

“우.”

“이봐, 지금 당신 위험하다고!”

“명령에만 따르시오. 우.”

청의인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어서 왕이삼은 반사적으로 박두를 우로 벴다.

촤아악.

마침 달려들던 무사가 박도에 맞아 가슴이 통째로 썰리면서 쓰러졌다.

“아아아악.”

무사를 쓰러뜨렸지만 기뻐할 새도 없었다.

왕이삼은 청의인이 걱정돼서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검은 복면과 장포를 뒤집어쓴 무사들의 수장이 잘 벼려진 검을 들고 청의인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의인은 아무것도 안 한 채 태연히 앞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끝장이다……!’

그런데 왕이삼이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청의인이 걸친 청포 자락이 돌풍을 만난 것처럼 세차게 휘날렸다.

펄럭.

순간 독수리처럼 낙하하던 수장이 검을 베거나 경신법을 쓰지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에 추락해 버렸다.

털퍽.

‘뭐야?’

왕이삼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그의 발밑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던 왕이삼은 경악하고 말았다.

왕이삼의 발에 부딪친 것은 방금까지 엄청난 경공으로 청의인을 급습하던 수장의 잘린 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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