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무명소졸의 역습(1)
출입구는 사자상 바로 뒤에 있었다.
제갈세가를 방문한 사람들은 사자상의 위엄에 압도되게 마련이다. 관을 통해서 사자상이 말을 하는 것처럼 꾸며 놓았으니 당연한 일.
그러니 사자상 뒤의 돌판이 뚜껑처럼 열리는 것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평선 너머의 빛줄기가 사자상에 반사되고 있었다. 지하를 헤매느라 시간이 흘러서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청의인은 주위의 낌새를 살폈다.
다행이 제갈세가 무사들이 매복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비밀 통로가 여러 곳이라서 매복하지 않은 건가?’
그게 아니면 사자상 출입구로 나가는 자들은 어차피 도망칠 것이라 여기고 신경 쓰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갈세가에 남은 자는 고작 소년 한 명.
다른 무림인이었다면 구하러 가는 대신 이때다 싶어서 줄행랑을 칠 게 뻔하다.
그게 각자도생의 무림이니까.
하지만 청의인은 아니었다.
다시 중원에 발을 들인 이상 동료를 외면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왕이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뭘 꿈지럭대시오? 얼른 갑시다!”
왕이삼이 빨리 박도를 휘두르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앞으로 걸어나갔다.
청의인은 왕이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시라도 빨리 동료를 구하고 싶은가 보군.’
둘은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따라 피난민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수백 명이 운집한 건물은 정신 사나울 만큼 혼잡했다. 해가 뜨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좁은 자리에 낑겨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망자 떼를 피해서 제갈세가에 오자 긴장이 풀어진 것이리라.
하지만 왕이삼은 그 꼴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했다.
“이 와중에 잠이 오냐? 한심한 놈들 같으니.”
“제갈세가에서 그런 흉계를 꾸미는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소.”
“뭐 그렇긴 하지.”
왕이삼도 청의인의 말에 동의했다.
동시에 그런 만큼 더욱 제갈세가가 괘씸했다.
“다들 일어나시오! 제갈세가가 후배를 겁박하고 있단 말이오!”
왕이삼은 사람들이 모두 눈을 뜰 때까지 건물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잠이 깬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제갈세가가 공격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왕이삼은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나 얘기를 다 들은 뒤에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왕가 요새를 탈출하는 데 막대한 공을 세운 서백 일행을 믿고 싶긴 하지만 명문정파인 제갈세가한테 맞서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염소수염을 기르고 눈가에 주름살이 가득한 사내가 말했다.
“얘기를 듣자니 제갈세가가 우리 말고 당신들을 붙잡으려는 것 같은데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아니오?”
“잘못은 저쪽이 했다니까!”
결국 왕이삼은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다수가 피난민인 사람들은 무림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무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백 명쯤 되는 무림인 중에서 왕이삼의 말을 믿는 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왕이삼의 말을 믿고 서백을 구하기 위해 결심한 무림인들이 앞으로 나왔다. 삼십 명쯤 되는 무림인들. 백 명의 삼분지일도 안 되는 숫자였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왕가 요새에서 진 빚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우리가 힘을 합치겠소.”
“고맙소. 당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무림인이오!”
왕이삼은 포권지례를 올리며 예를 표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오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 무림인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그럼 제갈세가를 혼쭐내러 갑시다!”
왕이삼이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왕이삼의 기세는 금세 한풀 꺾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명의 무림인 중 고수로 보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왕이삼처럼 무공으로 밥벌이하는 도검수들이 대부분. 나머지는 도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만큼 근골이 허약하거나 몸이 비대한 자들이었다.
말이 무림인이지 도검 한 자루만 갖고 있을 뿐 객잔 점소이에 더 어울리는 자들…….
막막해진 왕이삼은 청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오?”
“…….”
청의인은 이렇게 될 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피난 오는 도중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지만 실력 있어 보이는 자들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쳇! 별호는커녕 이름 석 자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자들뿐이군. 차라리 지하의 망자들이 한 편인 게 낫겠소.”
왕이삼이 불평하자 청의인이 뜻 모를 말을 했다.
“때로는 명문정파의 유명인보다 이름 없는 무명소졸이 도움 되는 법이오.”
“헹, 그게 말이 되나?”
왕이삼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청의인은 무림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무명소졸인가?’
청의인은 과거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중원에는 명문정파의 고수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데 왜 꼭 필요할 때는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무명소졸이라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무공은 고만고만하면서 자존심만 센 명문정파인보다 지금은 무명소졸이 더욱 효과적이리라.
청의인은 머릿속에 제갈세가와 대항해서 어떻게 싸울지 작전을 구상했다.
‘최대한 쉬우면서 효율적인 전법을 구사해야겠군.’
그는 힐끗 왕이삼을 봤다.
왕이삼은 눈앞의 무림인들 중에서 실력이 가장 나아 보이는 것은 물론 서백을 구하려는 일념 때문에 누구보다 투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왕이삼을 중심으로 해서 소수 정예의 합격진을 꾸리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왕이삼은 박도를 쓰는 도검수다.
날이 투박하고 둔중한 박도는 예리하게 급소를 노리는 검법에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반면 무게를 실어서 일자로 휘두르는 파괴력만큼은 검을 능가한다.
‘내가무공을 기대할 수 없으니 외가무공 위주로 한다. 또 근골이 튼튼한 자들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왕이삼의 성정과 잘 맞는 자들로.
‘지략보다는 단순하게 싸우는 걸 선호하는 자들로 뽑자.’
기준이 정해지자 청의인은 선별에 나섰다.
굳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살필 필요는 없었다. 청의인은 팔짱을 낀 채 그 자리에서 눈동자만 돌리는 것으로 무림인들의 정보를 낱낱이 파악했다.
왕이삼이 투덜거리고 있는 짧은 찰나, 청의인은 머릿속으로 선별을 끝마쳤다.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려면 이미 왕이삼이 있으니 세 명 더 필요하겠군.’
청의인은 세 명의 무림인을 지적해서 불렀다.
지적 받은 무림인들이 앞으로 나오자 청의인이 말했다.
“감사하오. 그럼 소년을 구하러 갑시다.”
동시에 뒤에 남은 무림인들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번 작전은 긴밀하게 행해야 돼서 소수 정예를 선발했소. 다른 분들은 이곳에서 피난민들을 지켜주시오.”
그러자 왕이삼이 청의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잠깐. 다 가는 게 아니라 세 명만 간다는 거요?”
“그렇소.”
“그럼 나랑 당신이랑 합쳐도 전부 다섯 명밖에 안 되는데?”
“그렇소.”
“아니, 몽땅 가도 모자랄 판에 고작 다섯 명이 간다는 게 말이 되냐?”
왕이삼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청의인이 목소리를 죽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들 삼류뿐이니 어쩔 수 없소. 지금은 당신처럼 진짜 싸움을 할 줄 아는 실전 고수가 필요하오.”
“실전 고수?”
“그렇소.”
“…….”
그 말을 들은 순간 길길이 날뛰던 왕이삼의 기세가 쥐 죽은 듯이 사그라들었다.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복잡한 생각의 흐름으로 가득찼다.
‘내가 실전 고수라고?’
‘진짠가?’
‘뭐 틀린 말도 아니지. 내가 그동안 무림밥 먹으면서 도검삼림 헤쳐 나온 게 몇 번인데!’
잠시 후 왕이삼의 눈빛은 새벽별처럼 반짝거렸으며 두 어깨는 태산처럼 꼿꼿해졌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청의인과 무림인 세 명은 어느새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가자!”
왕이삼은 허둥지둥 일행을 뒤따라갔다.
* * *
서백은 제갈명재의 부적을 떼어 버리면 술법이 풀려서 평범한 혈귀로 돌아갈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예측은 빗나갔다.
제갈명재는 종잇장 부적이 아니라 상반신에 수십 개가 넘는 부적 문신을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신은 떼어 낼 수 없다. 찢어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이 싸움은 제갈명재의 목을 베고 혈선충을 박멸해야 끝난다는 뜻.
‘간단히 무력화시키는 건 힘들겠군.’
방향이 정해지자 서백은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어차피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고민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니까.
그때였다.
제갈명재가 고개를 번쩍 들어서 서백을 노려봤다.
그런데 서백과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 제갈명재가 산 사람처럼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는 것이 아닌가?
‘……!’
제갈명재는 형편없는 몰골로 볼 때 혼백 없는 망자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진짜 망자처럼 미소를 짓다니?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서백은 땅을 박차며 돌격하던 진로에서 벗어났다.
그 본능적인 움직임이 서백의 목숨을 구했다.
다음 순간 서백이 있던 자리에 제갈명재의 손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던 것이다.
쉬이익. 펑.
제갈명재의 다섯 손가락이 허공을 움켜쥐자 손아귀에서 귀청을 찌르는 파공음이 터졌다.
그의 금나수는 상대를 붙잡아서 제압하는 평범한 수법이 아니었다.
다섯 손가락으로 상대의 근골을 부수고 박살내는 위력이 마치 소림사의 용조수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게 했던 것이다.
‘그냥 평범한 혈귀가 아니군.’
영문은 모르지만 제갈명재는 마구잡이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는 이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진짜 망자라고 보기에도 무리였다.
제갈혁이 문신으로 술수를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서백은 석가심결 시전의 한계를 느꼈다.
‘더 이상은 무리다.’
후우우우.
서백은 길게 숨을 내쉬며 석가심결을 중지했다.
이제 석가검법을 비롯한 내가무공은 쓸 수 없게 됐다는 뜻.
‘오히려 잘됐군. 외가무공만으로 망자 고수를 상대해 볼 기회다.’
석가장에 있을 당시 석가심결을 시전할 수 없는 경우에 외공으로 망자를 제압하기 위해서 수련을 거듭 반복했다.
위험천만한 도전.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시도해야 될 터.
바로 그때였다.
제갈명재의 안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의 상반신에 빼곡하게 새겨진 문신들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고오오오.
제갈명재의 위력이 한층 배가되고 있다는 의미.
‘제갈혁이 술수를 부리는군.’
문신이 붉게 물들어 감에 따라 제갈명재의 전신 근육이 꿈틀거리며 부풀었다.
눈에 띄게 커지는 근육. 외가무공을 극성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게 가능하군. 흑랑비서의 힘이겠지.’
이번에는 서백의 추리가 맞았다.
인간 신체의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그걸 한계까지 펼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외가무공의 경우 근골이 부서지다가 급기야 박살난다.
내가무공의 경우 기의 흐름이 뒤틀리고 혈도가 막혀 버린다. 그걸 한 단어로 정리한 것이 바로 주화입마다.
즉 제갈명재는 자기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초식 열 번을 출수하기 전에 그의 신체가 부담을 못 이기고 무너져 내릴 터.
‘시간만 끌면 이기겠군.’
하지만 서백은 그전에 제갈명재의 목을 베겠다고 결심했다. 안전은 보장된 상황이니 망자 고수와 제대로 승부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백의 예측이 다시 빗나갔다.
제갈명재가 허리춤에서 두 개의 판관필을 꺼낸 다음 서백을 향해 돌진했다.
서백은 검을 가로로 눕혀서 검면으로 판관필을 막았다. 두 개의 판관필이 검과 부딪치자 귀청을 찢는 금속성이 터졌다.
까깡!
순간 서백은 양손아귀가 저릿저릿하고 부들부들 떨려서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크윽.’
강철을 녹여서 붓 모양으로 만든 병장기 판관필.
판관필 무공은 주로 상대의 혈도를 점혈하는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이가 짧은 대신 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방향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초식이 가능한 판관필. 때문에 판관필은 문무를 겸비한 무림인이 즐겨 쓰는 병장기였다.
그런데 제갈명재는 서백이 검으로 막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판관필을 내질렀다.
저 판관필 초식에 당한다면 점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판관필이 살을 찢고 관통해서 근골을 부숴 버릴 터!
제갈명재의 신체는 분명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그가 쓰러질 리는 없었다.
서백은 내공 외공을 따지느라 한 가지를 간과했던 것이다.
제갈명재는 애초에 이미 죽은 망자가 아닌가?
‘이건 위험하다.’
망자 떼에 포위돼도 냉정하던 서백이 위기감을 느꼈다. 석가장을 떠난 이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위기감이었다.
이제 서백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명재를 쓰러뜨리려면 외공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상에서는 청의인과 왕이삼이 제갈혁의 술법을 깨뜨리기 위해 싸우고 있으리라.
‘선배님, 아직 멀었습니까?’
서백이 마음속으로 도움을 청할 때 제갈명재가 안광을 번뜩이며 판관필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