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제갈세가 이공자의 음모(1)
한밤중이 되자 왕이삼은 무언가에 씌인 것처럼 침상에서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서백과 청의인이 옆 침상에서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복도를 돌고 돌아 왕이삼이 도착한 곳은 측간.
밤에 소변 마려운 것을 참지 못하는 버릇이 도진 것이었다.
왕이삼은 시원하게 일을 본 뒤 측간을 나왔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방금 왔던 길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갈세가 하인 놈이 뭐라고 했더라.”
낮에 방을 안내하던 하인은 이렇게 말했다.
-측간은 방을 나와서 복도를 오른쪽으로 돌아간 다음 왼쪽으로 돌고 마지막으로 오른쪽으로 한 번 더 돌아가면 나옵니다.
왕이삼은 잠결에 하인의 말을 떠올리며 제대로 측간을 찾아왔다.
그런데 막상 소변을 보고 나자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간 다음 왼쪽으로 돌고 다시 오른쪽으로…….”
그는 하인의 말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방에서 나올 때는 잠결이라 몰랐는데 복도는 어두컴컴해서 걷기가 쉽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기름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지만 그나마 숫자가 몇 되지 않아서 복도 전체는 여전히 어두웠다.
“제갈세가는 돈도 많을 텐데 기름값까지 아끼는군. 있는 놈들이 더 한다더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측간에 올 때 오른쪽 왼쪽 오른쪽으로 돌았으니, 돌아갈 때는 거꾸로 왼쪽 오른쪽 왼쪽으로 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왕이삼은 그걸 잊어먹고 여태 엉뚱한 곳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세가 놈들 무슨 집구석을 이따위로 만들었어? 이게 집이야, 미로야?”
그는 자기가 헛갈린 것은 빼놓고 제갈세가 탓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복도를 걸어도 방이 나오지 않았다.
왕이삼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놈의 복도가 왜 이렇게 길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방에서 측간에 갈 때보다 벌써 몇 배는 더 걸은 것 같았다. 그런데 좀처럼 방이 나오지 않으니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마치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느낌.
“혹시 이거…….”
무림인이라면 제갈세가가 온갖 기이한 일들을 벌인다는 소문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복도.
이게 바로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때였다. 긴장해서 복도를 걷던 왕이삼은 기둥에 무언가 붉은 게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발을 멈췄다.
자세히 보니 붉은 염료로 그린 부적이었다.
붉은 색은 귀신이 싫어하는 색이다.
즉 붉은 부적을 붙였다는 것은 복도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뜻!
그때 무언가가 왕이삼의 어깨를 턱 잡았다.
“으아아악! 누구냐? 귀신이냐?”
“접니다, 선배님.”
“후배?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왕이삼의 어깨를 잡은 사람은 서백이었다.
부적에 정신을 파는 바람에 서백이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후배가 왜 여기에…….”
“선배님이 나가신 뒤 한참 있어도 안 오시길래 찾으러 왔습니다.”
왕이삼은 방을 나갈 때 서백이 쿨쿨 자고 있는 걸 봤다. 그런데 어느새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니…….
“근데 귀신이라뇨?”
“저기 부적 안 보이나? 귀신 퇴치 부적이라고!”
“세상에 귀신은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치더라도 망자와 싸우던 배짱은 어디 갔습니까?”
“사람이나 망자는 박도로 베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귀신은 얘기가 다르지.”
“그 배짱 국 끓여 드셨나보군요.”
둘은 한동안 뜸했던 정겨운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부적이 왜 있는 거지?”
“저야 모르죠.”
왕이삼이 쭈뼛거리며 부적을 살필 때 어깨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부적을 똑바로 보지 마시오.”
“히익!”
왕이삼이 숨을 멈추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청의인의 옆에 서 있었다.
“왜 보지 말라는 거요?”
“낮에는 보지 못했으니 밤에 붙인 부적이오. 하물며 이곳은 제갈세가. 부적에 사람을 홀리는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으니 일부러 살피지 않는 게 좋겠소.”
“알겠소. 그런데 그쪽은 왜 방을 나왔소? 이 밤중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측간에 갔다 왔소.”
“아…….”
왕이삼은 우문현답을 저지른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청의인이 그런 왕이삼을 보면서 한 마디 했다.
“밤마다 소변 보면서 적 진영을 염탐하고 있으니 참으로 훌륭한 척후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청의인과 서백은 슬쩍 왕이삼을 놀렸다.
그가 왕가 요새에서도 밤에 소변을 보느라 왕씨세가의 도주를 알아차렸는데 오늘 밤에도 제갈세가의 부적을 봤으니 척후랍시고 비유한 것이다.
물론 단순한 왕이삼은 둘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넘겨 버렸다.
“그나저나 제갈세가가 복도에 장난을 쳐 놨군.”
“그런 것 같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왕이삼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물었다.
“혹시 이 복도도 사자상처럼 제갈세가가 만든 기관진식이냐? 복도에서 길 잃는 줄 알았다고.”
“이건 기관진식보다는 기문둔갑이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기문둔갑? 그 둘이 같은 거 아니냐?”
“사람의 눈을 속인다는 것은 비슷하나 둘의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서백이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설명했다. 청의인과 왕이삼은 그 뒤를 따라갔다.
“측간에서 방으로 못 돌아오신 건 복도가 계속 이어져서 아닙니까?”
“맞네.”
“기름불이 모퉁이에만 있어서 복도가 어둡군요.”
“제갈세가 놈들이 쪼잔해서 기름값을 아끼려고…….”
“이건 돈을 아끼려고 한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겁니다.”
“아니, 왜?”
“침입자가 복도를 헤매게 만드는 게 목적이죠.”
그때 서백이 발을 멈췄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왕이삼은 즉시 멈추지 못하고 서백의 등에 부딪쳤다.
“큭! 후배 갑자기 왜 서나?”
“이게 바로 제갈세가 기문둔갑의 비밀입니다.”
서백이 복도 옆의 벽면을 가리켰다.
“벽이 뭐?”
“이건 벽이 아니라…….”
서백이 벽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주먹이 벽을 치는 게 아니라 어두운 공간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복도에 난 통로입니다.”
“……!”
왕이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자 서백의 말대로 벽에 통로가 나 있었다.
복도의 천정, 벽, 바닥이 모두 같은 색에다 불빛도 어두웠기 때문에 통로를 바로 옆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기름불을 일부러 띄엄띄엄 놓아서 중간에 난 통로가 안 보이도록 만들었군요. 불빛만 보고 걸어가면 통로를 지나치게 되겠죠.”
“그렇군.”
“선배님은 불빛만 따라가다가 복도를 여(呂) 자 모양으로 빙글빙글 도셨을 겁니다. 그럼 같은 곳을 끝없이 돌게 됩니다.”
“…….”
서백의 말이 모두 맞자 왕이삼은 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서백에게 다시 한번 놀랐다.
불빛만으로 사람 눈을 속여서 미로를 만들었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사자상과 정원은 특수 장치를 제작해서 만들었으니 기관진식이오. 반면 이 복도는 사람 심리의 허를 찌르는 셈이니 최면술 같은 기문둔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소.”
청의인이 둘의 차이를 설명했다.
왕이삼은 감탄 반 질림 반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복잡해서 머리가 터지겠군. 나는 단순해서 그냥 박도 휘두르는 것으로 족하오.”
“때로는 단순함도 무공의 극의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이오.”
청의인이 웬일로 칭찬의 말을 했지만 왕이삼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불빛만으로 사람을 홀린 제갈세가.
그 수법을 단박에 간파해 낸 서백과 청의인.
왕이삼은 그동안 숱한 고수를 봐 왔다.
그러나 눈앞의 두 명처럼 두뇌 회전이 전광석화 같은 무림인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왕이삼으로서는 감탄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방으로 돌아왔다.
“후배 아니었으면 영영 복도를 헤맬 뻔했군.”
“그건 아닙니다. 해가 밝으면 통로가 보였을 테니까요. 방금 복도는 밤에만 가능한 기문둔갑…….”
서백이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하며 말을 멈췄다.
“후배 왜 그러나?”
“이공자는 처음에 우리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자 기문둔갑을 펼쳐 놓았군요.”
“우리가 측간 못 찾고 길을 헤매라고 그런 거지. 측간 쓰는 것도 아끼는 놈이니 제갈세가가 얼마나 쪼잔한지 알 만하군!”
왕이삼은 자기 딴에는 재밌으라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백과 청의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정답입니다.”
“뭐야? 정말 제갈세가 놈이 오줌도 못 싸게 할 만큼 치사하다는 거냐?”
“측간이 아니라 길을 못 찾도록 한 게 맞다는 말입니다.”
“아니, 왜?”
“우리가 제갈세가를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겁니다.”
“……!”
그 말에 왕이삼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그래? 그럼 당장 여길 나가자고!”
그러나 이번에는 청의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방 밖으로 나가면 더 큰 사태가 벌어질 것이오. 괜히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지.”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복도 양옆에 늘어선 방에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포진하고 있었소.”
“뭐라고? 난 전혀 몰랐는데…….”
청의인의 말은 무사들이 이미 방 밖을 포위하고 있으니 한바탕 싸우지 않는 이상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대체 어떡하자는 거냐?”
“덫을 쳐 놓고 기다리는 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불리합니다. 그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덫을 피한 뒤 방심한 틈을 찌르는 게 유리하죠.”
“그게 병법이오.”
서백과 청의인이 마치 서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연이어 말했다.
“…….”
둘의 말이 척척 맞아떨어지자 왕이삼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설령 이 방을 나간다고 해도 정원에 또 어떤 기문둔갑과 기관진식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오.”
“그런가?”
“그렇소. 또한 장원을 나간다고 해도 사자상이 있던 곳까지 제갈세가의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요. 그냥 걸어서 나가기는 힘들 것이오.”
“끄응.”
왕이삼이 팔짱을 끼면서 그답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럼 이대로 죽치고 있자는 말이오?”
“아니, 일단 여기를 나갈 방법이 있소.”
“그게 뭐요?”
왕이삼이 깜짝 놀라서 묻자 청의인이 슬쩍 서백을 돌아봤다.
서백은 청의인과 말을 하지 않고 단지 시선을 한 번 교환한 것만으로도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탈출구는 방에 있습니다.”
그 말에 왕이삼은 정말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문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탈출구가 방에 있다고? 천정을 뚫고 하늘로 나가냐, 아니면 바닥을 뚫고 땅으로 꺼지냐?”
“비슷합니다.”
“제대로 봤소.”
왕이삼은 열불이 터져서 목소리를 높였는데 정작 서백과 청의인은 그가 정답을 맞혔다는 듯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서백은 왕이삼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 방은 평범한 곳이 아니라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는 방입니다.”
“기관진식이 어디 있냐? 내 눈에는 안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있습니다.”
서백이 침상이 없는 쪽의 벽으로 가더니 검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벽이 움직인 자국입니다.”
“뭐라고?”
왕이삼이 고개를 내리자 정말 서백 말대로 바닥에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보였다.
일부러 두 눈을 부릅뜨고 찾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 힘든 자국이었다.
“아무리 잘 설계된 기관진식이라도 움직일 때 마찰이 있게 마련입니다. 벽의 가장자리에 둥글게 금이 새겨져 있으니 이 벽은 아마 회전할 겁니다.”
이어서 서백은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벽을 움직이는 장치가 있을 텐데…….”
그러다가 서백의 시선이 어디에서 멈췄다.
“여기군요.”
서백이 가리킨 곳은 서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무림인은 서책과 거리가 먼 법인데 일부러 책을 놔뒀군요. 제갈세가의 방이니 책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터. 이것 역시 사람 심리의 허를 찌르는 것이죠.”
“…….”
왕이삼은 입을 딱 벌린 채 서백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무심코 옆을 보자 청의인은 팔짱을 끼고 무심하게 딴청을 하고 있었다.
무림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상한 이인(二人)!
“장치가 있는 곳은 먼지가 쌓여 있지 않을 겁니다.”
서백이 먼지가 없는 곳을 찾아서 그곳의 서책 몇 권을 뽑았다.
그러자 정말 책장 속에 금속으로 된 고리 같은 장치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서백이 고리를 잡아당겼다.
위잉. 구르르르.
묵직한 진동이 느껴지면서 벽면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벽이 돌아간 뒤로 어두운 통로가 보였다.
서백이 안내하듯이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제갈세가의 비밀 통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