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제갈세가의 초대(3)
제갈세가는 옛부터 명성이 높은 가문으로, 현재 중원 무림의 오대세가에 꼽힌다.
그런데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명재는 무림에 나오지 않고 모습을 감춘 지 십여 년이 넘었다.
은거해서 도를 닦는다, 우화등선을 꿈꾼다, 면벽수련하면서 새 무공을 개발하고 있다 등등 수많은 소문이 떠돌았지만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가에 가주가 없으면 자연스레 일공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제갈세가의 일공자는 무림맹의 명숙 중 하나이며 옥면서생이란 별호를 지닌 제갈성이었다.
하지만 제갈성은 젊은 나이 때부터 줄곧 가문을 떠나서 무림맹의 일을 했다. 때문에 무림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가주가 은둔할 때도 일공자 역할은 할 수 없었다.
가주와 일공자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가문을 지키고 있는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이공자 제갈혁이었다.
맏형 제갈성이 옥면서생이란 별호처럼 여인 못지 않게 수려한 미모로 유명한 반면, 제갈혁은 형보다 나이가 지긋한 문사다운 풍모가 돋보였다.
특히 길게 기른 턱수염과 탕건을 쓴 모습은 마치 제갈세가의 시조인 제갈량이 무덤에서 되살아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때문에 잘 모르는 무림인들은 제갈혁을 일공자로 착각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기 앉으시지요.”
탁자 앞에는 미리 준비해 둔 의자 세 개가 있었다.
서백 일행이 자리에 앉자 제갈혁은 인사치레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갈세가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서백은 사자상 앞에서 간단히 했던 얘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왕가 요새에서 잠시 몸을 의탁했는데 왕씨세가가 피난민들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얘기. 이후 망자 떼를 따돌리고 가까운 융중으로 왔다는 얘기.
그리고 제갈세가가 명재상 제갈량의 후손이며 중원 무림의 오대세가 중 으뜸으로 꼽힌다고 알고 있다는 얘기 등등.
마지막 얘기는 슬쩍 덧붙인 것이었다.
제갈량과 오대세가 언급을 했으니 명예를 위해서라도 피난민들을 함부로 내치지 못할 테니까.
“그럼 제갈세가에 따로 볼일이 있으신 건 아닌지요?”
“아닙니다. 저는 소림사로 가는 중입니다.”
“소림사라면 무림맹에 볼일이? 망자 창궐을 막기 위한 일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소림사가 사천에서 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분 아니신지요?”
“…맞습니다.”
“어떤 일인지 여쭤봐도 실례가 아닐지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술술 대화를 나누던 서백은 갑자기 일언지하에 제갈혁의 부탁을 거절했다.
제갈혁은 무례를 범하지 않겠다는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제갈세가의 이공자입니다. 일공자인 형님은 무림맹에 계시죠. 제가 알면 여러분을 도울 수 있을 텐데요?”
“스승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면서 소림사 방장님께 직접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중간에 누설하면 안 된다고 말이죠.”
“그렇군요.”
“피난민들에게 건물을 내주신 것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점 감사합니다.”
서백이 그렇게 얘기를 끝마치자 제갈혁도 더 캐물을 생각이 없는지 말했다.
“세 분은 따로 모실 테니 푹 쉬시지요.”
제갈혁이 고갯짓을 하자 하인 한 명이 서백 일행을 밖으로 안내했다.
서백 일행은 하인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하인은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여러 번 모퉁이를 돌면서 일행을 안내했다.
하인 역시 서백과 청의인처럼 나무 바닥을 밟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경신법을 익힌 움직임.
발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걸음걸이로 봐서 그냥 하인이 아니라 제갈세가의 무사인 게 틀림없었다.
하인이 안내한 방은 복도 끝에 있는 제법 큰 방이었다.
서백 일행이 방에 들어가자 하인은 측간이 어디 있는지 설명한 다음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곧이어 문 너머에서 하인이 빠르게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휴우, 이제야 좀 살겠군.”
왕이삼은 마음이 놓여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융중에 도착한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사자상과 수수께끼의 정원을 돌파하는 등 사건이 벌어져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의인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아쉽지만 긴장을 풀지 마시오.”
“제갈세가의 환대를 받고 있는데 무슨 소리요?”
왕이삼은 괴팍한 청의인이 또 무슨 흰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그러자 청의인과 서백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무림맹에 제갈세가의 첩자가 있소.”
“무림맹에 제갈혁이 심어 놓은 첩자가 있습니다.”
“뭐라고? 첩자?”
“네.”
서백이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했다.
“제가 사천에서 소림사로 가고 있다는 얘기는 소림사 방장과 무림맹의 원로들만 아는 사실입니다. 제갈세가의 이공자가 알고 있을 리 없습니다.”
“……!”
왕이삼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명문정파와 오대세가가 서장 구륜사와의 결전을 위해 창설한 무림맹.
구륜사 결전이 끝나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무림맹의 명성은 과거만 못하지만 중원 최고의 연맹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무림맹에 감히 첩자를 심어 놨다고?
왕이삼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제갈세가 일공자가 무림맹에 있다고 했으니 형한테 얘기를 들은 것 아닐까?”
“잘 짚었소. 그게 가장 큰 문제요.”
청의인이 대답했다.
왕이삼은 어리둥절했다. 잘 짚었다는 청의인의 말은 분명 칭찬인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갈세가 일공자는 나이는 젊지만 무림맹의 원로이며 소림사 방장의 오른팔이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그런 자가 동생에게 함부로 무림맹의 중대사를 발설했을 리 없소. 즉 제갈혁은 일공자인 형의 수훈을 가로챌 속셈이오.”
“……!”
그 말에 왕이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림밥을 오래 먹은 그는 장문인이나 방주 자리를 놓고 집안싸움을 벌이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장강삼협수로채와 철장방도 그러지 않았는가?
혈연이 중요한 세가는 집안싸움이 더욱 심했다.
세가의 형제자매가 가주 자리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암투를 벌이는 일은 셀 수 없었다. 한 핏줄이면 사이가 좋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러니 제갈혁이 일공자인 형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무림맹에 첩자를 심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제갈세가의 시조인 제갈량이 저승에서 본다면 혀를 차며 꾸짖을 일!
“그런 사정이 있었군.”
왕이삼은 서백과 청의인의 설명을 듣고 반은 놀라고 반은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서백은 일부러 침묵한 채 청의인의 반응을 살피는 중이었다.
제갈혁이 소림사에 전할 전갈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서백은 일부러 말을 숨겼다. 마치 직접 구두로 전해야 된다는 것처럼.
그 이유는 서찰 때문이었다.
만약 제갈세가가 서백을 죽인 다음 의복을 조사한다면 서찰은 쉽게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서백이 소림사 방장에게 전할 말을 머릿속으로 기억해 두었다고 여긴다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터.
즉 제갈혁에게 서찰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만약 청의인이 이런 식으로 슬쩍 떠본다면?
-소림사 방장에게 전할 전갈이 무엇이오? 안전하게 보관하는 편이 좋겠소.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유도신문!
그럴 경우 청의인은 제갈혁이 심어놓은 이중 첩자이리라.
이중 첩자를 심은 뒤 상대가 안심하고 있을 때 비밀을 누설하게 만드는 것은 병법의 기초니까.
‘왕가 요새에서 청의인을 만났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제갈혁이 사천에서 소림사로 가는 자를 찾기 위해 첩자들을 미리 사방에 풀었을지 모르는 일.’
다행이 청의인은 소림사에 전하는 전갈에 대해서 서백에게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서백은 자신이 의심한다는 것을 청의인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왕씨세가가 망자 떼를 유인하도록 내버려 둔 자가 그걸 모를 리 없지.’
아마도 서백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말조차 꺼내지 않는 것일 터.
서백은 침묵한 채 생각했다.
‘제갈혁의 첩자는 아니라고 봐야겠군.’
적어도 아직까지는.
물론 왕이삼은 서백과 청의인이 복잡한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보다 제갈혁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닫자 평소 그답게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냐? 빨리 제갈세가를 떠야지!”
“제갈세가의 이름값에다 피난민들이 보는 눈까지 있으니 당장 어쩌진 못할 겁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내일 해가 뜨면 바로 출발합시다.”
서백의 말에 청의인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를 표했다.
“모처럼 편한 침상에서 자고 좋은 밥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술도 줄까?”
“이런 판에도 술타령이십니까.”
“뭐 어때. 어차피 당장 나가지 않을 건데 뽑아 먹을 건 뽑아 먹어야지.”
“배짱 하나는 두둑하시군요.”
서백 일행은 모처럼 여장을 풀고 푹 쉬었다.
마치 전투가 시작되기 전날 배불리 밥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 * *
한편 제갈혁은 탁자에 앉아 붓을 들고 무언가 글귀를 적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삼십여 명의 하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공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들.
그나마 낮에 손님들을 안내할 때는 하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허리춤에 검 한 자루를 차고 세 개의 비수가 꽂혀 있는 가죽 혁대를 가슴에 두른 모습이었다.
무림에서 행동이 가장 신속하기로 유명한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무사들의 수장이 제갈혁에게 낮 동안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다.
“…명의 피난민들 중에 도검을 소지한 무림인들은 사분지일입니다.”
“그중에서 주목할 놈은 보이느냐?”
“대부분 소속 문파가 없는 삼류입니다.”
“그렇군. 하지만 고수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철저히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신경 써야 될 놈은 그 세 놈뿐인가.”
제갈혁이 서백 일행 세 명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청의인과 소년은 무공 수위를 알기 힘든 고수로 보입니다. 나머지 중년인은 박도를 다루는 것 같으나 잘 쳐줘도 일류 수준일 겁니다.”
“좋다. 세 놈을 철저히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언제 일을 도모하실 생각이십니까?”
“자정이 지나고 한 시진 뒤다. 일단 청의인과 중년인을 소년한테서 떼어 놓는다.”
“그런 다음… 죽일까요?”
“아니, 생포하라.”
“네.”
“잠깐. 굳이 생포할 필요 없다. 놈은 지하로 떨궈 놓는다.”
그 말에 냉혹한 표정이던 수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 방법을 쓰시려는 겁니까?”
“물론이다. 소림사로 전하는 말도 듣고 실험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지.”
“고집이 세 보이는 소년입니다. 순순히 입을 열까요?”
“열지 않을 수 없을걸.”
탁. 제갈혁이 글귀를 적던 붓을 탁자에 놓았다.
그런데 그가 한 폭의 종이에 적던 것은 글자도 그림도 아니었다.
또한 붓은 검은 먹물이 아니라 시뻘건 액체로 듬뿍 젖어 있었다.
제갈혁이 만든 것은 핏물을 써서 그린 부적이었다.
바로 기문둔갑의 술(術)!
“고작 저런 어린놈을 기다리고 있다니. 무림맹도 세가 다했군. 저 무림맹의 하수인들에게 제갈세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보여 줘라.”
“존명!”
무사들이 일제히 포권지례를 올리며 제갈혁의 명령을 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