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제갈세가 이공자의 음모(2)
왕이삼은 할 말을 잃었다.
제갈세가에 온 뒤부터 각종 기관장치가 펼쳐져 있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서백과 청의인은 어린 아이가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제갈세가의 기관장치를 하나씩 파훼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둘이 손발이 척척 맞는 게 신기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어느 때는 청의인이 실마리를 던져 주고 서백이 해결한다면, 어느 때는 청의인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있고 서백이 나서서 해결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판결이 신속정확하기로 유명했던 명판관 포청천과 그의 호위무사인 명수사관 전조를 보는 것 같은 모습!
서백은 방에 놓여 있는 기름불을 들고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왕이삼이 멍청히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선배님, 안 가십니까?”
“가, 가야지.”
왕이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백과 청의인을 뒤따라갔다.
비밀 통로를 조금 걷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일행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로 가자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의 폭은 성인 두 명이 걸으면 어깨가 닿을 정도로 좁았다. 일행은 서백, 왕이삼, 청의인의 순서로 일렬로 이동했다.
먼저 지상의 복도는 어둡다고 해도 모퉁이마다 기름불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걷고 있는 지하의 비밀 통로는 칠흑 같은 어둠 그 자체였다.
서백이 기름불을 들고 있지만 불과 일 장 앞만 밝힐 정도.
왕이삼은 망자 떼를 향해서도 박도를 휘두르며 뛰어드는 용맹한 도검수였다.
그러나 칠흑 같은 폐쇄 공간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망자 떼한테 돌격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정신적 피로감이 압박을 가했다.
기분 탓인지 갈수록 통로가 좁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제길, 이거야 쥐구멍 속을 헤매는 것이나 마찬가지군.”
왕이삼이 불평하자 뒤따라오는 청의인이 물었다.
“잠행이 처음이오?”
“잠행? 그건 첩자나 하는 짓 아니오?”
왕이삼이 알기로는 잠행이란 신분을 숨긴 채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의인의 말은 달랐다.
“표사들이 말하는 잠행은 출입이 금지된 구역을 은밀히 잠입해서 임무를 끝내고 탈출하는 것을 말하오.”
“헹, 그런 도둑놈 같이 머리 쓰는 짓을 무림인이 왜…….”
“검을 들고 비무하는 것만 무림이 아니오.”
“…….”
딴지를 걸던 왕이삼도 그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서백을 만났을 때부터 평생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박도만 휘두르면 되는 줄 알았던 왕이삼도 이제는 청의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의인의 다음 말에 감탄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걱정 마시오. 당신은 머리 쓸 일이 없을 테니까.”
“뭐라고?”
왕이삼이 버럭 화를 내려고 하자 청의인이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머리는 앞에서 쓰고 있소.”
그 말은 맞았다. 서백은 무공이 고강한 것은 물론 두뇌 또한 명석하니까.
왕이삼은 청의인이 내심 불만이었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데 무슨 수로 화를 낸단 말인가.
그러는 중에도 복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청의인에게 화를 못 내자 왕이삼은 엉뚱한 곳에다 울분을 터뜨렸다.
“미치겠네! 무슨 놈의 집이 이렇게 복잡해?”
“비밀 통로니까 복잡한 것이 당연하오.”
청의인의 말이 다시 한번 왕이삼의 성미를 건드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를 내기 전에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천하 무공의 근원이 소림사라고 한다면 천하 기관진식의 근원은 제갈세가라고 할 수 있소. 그 지식이 수백 년 쌓인 곳이오. 세가 구석구석에 기관진식이 즐비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지.”
“그렇군…….”
청의인의 설명은 이번에도 논리정연했다.
그러자 왕이삼은 엉뚱한 상상을 했다.
청의인이 말만 번지르르한 반면 무공은 별 볼일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림에서 머리 좋고 말재주 있는 자들은 처음에는 돋보이지만 정작 싸움이 벌어지면 뒤로 발뺌하기 일쑤였다.
‘머리 좋은 게 최고면 무공은 왜 배워? 차라리 과거 시험을 보지!’
그렇게 청의인을 깎아내리자 왕이삼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때 갑자기 서백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제자리에 섰다.
발을 멈추라는 신호.
왕이삼은 서백의 뒤에 바싹 붙어서 속삭였다.
“뭐야? 앞에 제갈세가 놈이라도 있냐?”
“앞이 아니라 아래입니다.”
“아래?”
왕이삼은 무심코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발밑의 바닥에 희미하게 틈새가 나 있는 것이 아닌가?
돌로 된 바닥에 난 틈새는 거칠기는커녕 칼로 자른 듯이 반듯했다. 낡아서 깨지거나 벌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었다는 뜻.
서백이 몸을 낮추고 틈새에 기름불을 가까이 해서 아래를 살폈다.
“사람들이 있군요.”
“사람들? 지하에 사람들이 산다고?”
“지하는 맞지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그러자 청의인이 서백의 말을 돕는 것처럼 끼어들어서 설명했다.
“지하에 있는데 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하나요. 망자라는 얘기지.”
“……!”
왕이삼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바로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자는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일행의 밑에 있는 셈이니 뒤로 물러선다 한들 똑같지 않은가!
그러는 중에도 서백은 기름불을 바닥 틈새에 가까이 대고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후배, 괜찮나? 망자가 혹시 본다면…….”
“망자는 평범한 불빛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
그 말에 왕이삼은 촉도관행 마차를 운송할 때 서백이 망자밭에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망자 앞에서 절대 피해야 되는 세 가지.
숨결, 피 냄새, 희노애락의 감정.
지금 일행 중에 피를 흘리는 자는 없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들킬 걱정도 없었다.
설령 망자가 고개를 든다고 해도 이런 어둠 속에서는 천정 위의 틈새 너머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숨결뿐.
“숨결이 망자에게 닿지 않게만 조심하면 됩니다. 이 거리에서는 일부러 숨을 몰아쉬지 않는 이상 문제없을 겁니다.”
어느새 청의인도 서백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틈새에 얼굴을 바싹 대고 밑을 살피고 있었다.
“지하의 비밀 통로 밑에 또 다른 비밀 장소가 있다니. 과연 말로만 듣던 기관진식의 총본산인 제갈세가답군.”
“그러게 말입니다.”
둘이 자신만 쏙 빼놓고 대화하자 왕이삼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몸을 낮춰서 틈새에 눈을 갖다 댔다.
바닥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왕이삼은 마음 놓고 숨을 쉴 수 없었다.
말이 지하지 천정을 사이에 두고 불과 일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틈새 아래는 지금 있는 통로와 비슷했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는 복도라는 점이 비슷할 뿐 통로의 높이와 폭이 달랐다.
먼저 천정까지의 층고가 높았다. 무림인이라면 문제없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있는 힘껏 뛰어도 손이 닿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지하에 있는 자들이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 둔 것이리라.
또한 일행이 지나온 통로는 비좁은데 반해 지하는 폭이 몇 배 이상 넓었다. 바닥에 가늘게 난 틈새로는 어느 정도 폭인지 확실하게 알기 힘들었다.
지하에 펼쳐진 넓은 공간.
그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지하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지하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인영들이 보였다.
불빛은 흐리지만 왕이삼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망자다!
망자가 창궐한 중원.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망자 척결을 위해 힘쓰고 있는 판에 망자를 잡아서 지하에 가둬 두었다고?
그것도 명문정파 중에서 이름 높은 제갈세가가!
그때 청의인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가 막 왕이삼의 바로 아래 쪽을 지나가고 있는 망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등에 박도를 메고 있는 자를 보시오.”
“보고 있소.”
“박도 날이 등에 닿지 않도록 고리를 비틀어서 비스듬히 메고 있소. 또한 고리가 갈고리처럼 휘어지지 않아서 박도를 치켜들 때 걸리지 않게 해 놓았소.”
불빛은 어두웠지만 확실히 청의인의 말대로였다.
왕이삼은 눈썰미도 참 대단하다 싶어서 감탄하며 물었다.
“말한 대로군.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요?”
“등에 멘 박도를 단숨에 수직으로 베어서 상대를 일도양단하는 수법으로 무림을 종횡무진했던 자가 있소. 기억하오?”
“설마 풍운일검 탁상도?”
왕이삼은 깜짝 놀라서 두 눈을 부릅 뜨고 망자를 다시 살폈다.
풍운일검 탁상도는 중원 무림에 꽤 이름이 알려진 고수였다.
특히 탁상도는 박도를 다루는 데 능했다.
왕이삼은 박도의 고수인 그를 언제 한번 만나서 눈도장이라도 찍고 싶었다. 자신도 박도를 주무기로 쓰고 있으니 탁상도의 수법을 눈앞에서 직접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탁상도가 망자가 돼서 제갈세가의 지하를 떠돌고 있다고?
평소 왕이삼이었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라며 넘겨 버렸을 말.
하지만 망자가 등에 멘 박도는 검잡이 부분이 용의 머리로 되어 있었다.
탁상도의 박도가 바로 저랬다.
용의 입에서 검날이 나오는 것처럼 주조되어서 용구도(龍口刀)란 별명이 붙은 박도.
청의인이 왕이삼의 눈빛을 보고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용구도가 맞소.”
“……!”
왕이삼은 망자가 된 탁상도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청의인한테도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눈썰미가 뛰어난 것은 물론 상대의 마음까지 독심술을 쓴 것처럼 알아맞히니 왕이삼으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청의인은 지하를 배회하는 망자들이 누구인지 하나씩 알아맞혔다.
어떤 망자는 탁상도처럼 몸에 지닌 병장기를 보고 신분을 맞혔다. 어떤 망자는 의복이나 차림새를 보고 신분을 맞혔다.
그러는 중 왕이삼도 한 명의 망자를 알아맞혔다.
“저기 대머리에 독수리 문신이 있는 놈, 저거 사파 고수 곽칠 아닌가?”
“맞는 것 같소.”
대머리가 불빛에 번쩍거려서 문신이 잘 보이니 왕이삼도 한눈에 사파 고수 곽칠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청의인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왕이삼이 곽칠 한 명을 알아보는 사이 청의인은 십여 명이 넘게 망자의 신분을 열거했으니 말이다.
마치 중원 무림을 손바닥에 꿰고 있는 듯한 청의인의 눈썰미!
기가 막힌 왕이삼은 아무 망자나 골라서 검지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망자는 누구요?”
병장기도 의복도 차림새도 아무 특징이 없는 망자였다. 왕이삼은 어디 이것도 맞히는지 보자는 심보로 일부러 그 망자를 찍은 것이었다.
그러자 청의인이 무심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모르오.”
“헹, 이번에는 왜 모르실까? 중원 무림 정보가 바닥이 났나 보군!”
“아무 특징도 없고 하물며 얼굴도 볼 수 없는데 제아무리 정보가 있다 한들 무슨 수로 알겠소?”
“…….”
왕이삼은 재차 우문현답을 저지른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왕이삼은 화낼 곳을 찾다가 제갈세가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망자를 잡아 놓고 있다니! 제갈세가 놈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런데 청의인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잡아 놓은 건 맞지만 망자를 잡은 건지는 알 수 없소.”
“그게 무슨 뜻이오?”
왕이삼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지하를 응시하던 서백이 끼어들면서 왕이삼의 물음에 대답했다.
“망자를 잡아다 놓은 게 아니라 산 사람을 잡은 뒤 망자로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
왕이삼은 경악해서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갈세가 같은 명문정파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저지르고도 남습니다. 세상에 정파 사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악행을 저지르는 순간 사파가 되는 거니까요. 제갈세가는 스스로 정파의 길을 벗어난 겁니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몰라서 물으십니까?”
서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천리를 거스른 제갈세가를 응징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