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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50화 (50/123)

50화 제갈세가의 초대(2)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자상은 철을 녹여서 주조한 것으로 용접한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즉 한 번 만들면 다시 녹이거나 부수지 않는 이상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뜻.

그런데 사자상이 말을 한다고?

만약 사자상 속에 사람이 있다면 영영 나오지 못할 곳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사자상이 계속해서 말했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왕이삼은 물론 서백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무림인들은 기이한 광경에 등골이 오싹했다.

사자상의 뒤쪽에는 낮은 담장이 있고 그 안에 일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같았다.

“오랜 피난길에 모두 지치셨군요. 건물 옆에 우물이 있습니다. 그 옆에 화덕이 있고 불을 피울 화섭자가 있으니 사용하십시오.”

사자상의 말은 친절했지만 사람들은 기분이 꺼림칙했다.

모두 지쳤다는 것을 지적한 사자상.

말을 하는 것도 기이한데 마치 사자상이 두 눈알을 굴리며 자신들을 살피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섰다.

청의인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왕이삼을 포함한 사람들도 주섬주섬 눈치를 보며 뒤따라갔다.

서백을 선두로 해서 사람들은 건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건물은 굉장히 넓어서 수백 명이 누울 자리가 충분했다.

벽과 천정에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간 벽을 제거하고 공간을 넓게 튼 것 같았다.

과거에는 객지 무림인들을 초대하는 곳이었다면, 망자가 창궐한 이후 피난민들을 받기 위해서 건물을 개조한 것이리라.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고 여장을 풀었다.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은 피곤에 지쳐서 바로 드러눕는 자들도 있었다.

삼 일 간 어디서 망자가 나타날지 몰라 마음을 졸였는데 이제 천정과 벽이 있는 곳에 들어오자 모두 긴장이 풀어졌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포권지례를 하며 서백에게 감사를 표했다.

“소협 덕분에 목숨을 건졌소.”

이제 사람들은 약관이 안 된 서백을 두고 소협(小俠)이라 불렀다.

“과찬이십니다. 모두 푹 쉬십시오.”

서백도 포권지례를 하며 답례 인사를 했다.

왕이삼이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왕가 요새의 천막보다는 훨씬 낫군.”

“피난민들을 위해 마련한 장소일 겁니다.”

제갈세가의 용의주도함을 깨닫고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석가장 분과 동행하신 두 분은 북쪽에 있는 문으로 나와서 정원으로 오시지요. 정원에 본관이 있으니 그리 들어오시면 됩니다.”

서백이 앞장서며 말했다.

“가시죠.”

“나도?”

“저와 동행 둘이라고 했으니 선배님도 포함입니다.”

“쩝. 나는 왠지 내키지 않는데.”

사자상 목소리의 주인은 서백과 청의인 그리고 왕이삼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이끄는 수장으로 여긴 것이었다.

왕이삼은 안 그래도 기이한 곳에 왔는데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기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서백과 청의인이 문을 나서자 자기 혼자 남아 있기는 뭐 해서 결국 허겁지겁 따라갔다.

서백 옆으로 붙은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사자상이 말을 하더니 이제 벽이 말을 다 하는군.”

왕이삼이 듣기에 사자상의 목소리는 전음이 아니었다.

그는 살면서 몇 번 고수를 만나봤는데 간혹 전음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전음은 메아리를 듣는 것처럼 머리속에서 목소리가 은은하게 퍼지는 반면, 사자상의 목소리는 귓가에 똑똑히 들리는 것이 그냥 육성인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서백이 왕이삼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사자상이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전음도 아닙니다.”

“뭐라고? 그럼 대체 어떻게…….”

“관입니다.”

“관(管)?”

“네. 땅밑에 기다란 관을 묻어서 사자상으로 연결해 놓은 겁니다.”

“아아…….”

왕이삼은 그제야 사자상의 비밀을 알아차렸다.

그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했던 장난이 떠올랐다.

강가에서 갈대 대롱을 따서 친구의 귀에 끝부분을 대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목소리가 전달되던 장난.

즉 제갈세가의 인물은 긴 관을 사자상에 연결한 뒤 다른 장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건물 기둥에도 틈새가 있더군요. 기둥 속에 관을 심어둔 뒤 목소리를 전달했을 겁니다.”

“그랬군…….”

제갈세가는 무림에 배출한 기인이사가 셀 수 없으며 온갖 기이한 기관장치로 유명한 곳이다.

왕이삼은 무림에서 가장 기상천외한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자상의 비밀을 깨닫자 왕이삼은 다른 것도 궁금해졌다. 그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말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어디서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왕이삼이 물었을 때 서백과 청의인은 어느새 멀리 가고 있어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왕이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쁘게 둘을 따라갔다.

잠시 후 셋은 목소리가 말했던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 주위는 울창한 숲으로,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 아담한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에는 공들여서 관리한 수풀과 돌담 그리고 중앙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셋은 연못을 빙 돌아서 반대편으로 갔다.

그곳에 한 건물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말한 제갈세가의 본관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본관 어디에도 문이 없는 것이 아닌가?

건물의 문은 보통 남향에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눈앞의 건물은 문은커녕 창문조차 하나 없었다.

왕이삼은 혹시 몰라서 모퉁이를 돌아 옆을 살폈지만 마찬가지로 문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도 문이 없는데? 뒤에 문이 있나?”

왕이삼이 건물 뒤로 돌아가려 하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청의인이 입을 열었다.

“남향에 문이 없으니 다른 방위에도 없을 거요.”

“쳇,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쇼?”

왕이삼이 퉁명스럽게 쏘았지만 뜻밖에도 서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청의인의 말에 동의했다.

“동감입니다.”

서백마저 그러자 왕이삼은 할 말이 없어졌다.

말을 하는 사자상이 기상천외한 기관장치였다면 이번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문이 없는 집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제갈세가에 오자마자 기이한 일이 거듭 계속되니 왕이삼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아니, 제갈세가에 온 것이 맞는지 의심까지 됐다. 코앞에 본관이 있지만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때 서백이 주위를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바둑이군요.”

“바둑?”

“네. 이 정원은 바둑판의 모양을 본 따서 설계되어 있습니다.”

왕이삼은 재차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장기는 제법 둘 줄 알지만 바둑은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청의인이 서백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바둑이 맞소.”

“헹, 그걸 이제야 아셨나?”

왕이삼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왕가 요새에서부터 매번 청의인이 먼저 말을 꺼낸 뒤 서백이 동의하는 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서백이 상황을 깨달은 뒤 청의인이 뒤늦게 알아차리자 왕이삼은 마치 자기가 이긴 것처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뭐 바둑이라고 치자. 근데 문 없는 집이랑 바둑이 무슨 상관이냐?”

왕이삼이 묻자 서백이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연못을 가리켰다.

“예를 들어 저 연못은 바둑의 유명한 사활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습니다.”

“사활?”

“매화육궁이란 사활입니다.”

바둑이 까막눈인 왕이삼은 서백의 설명을 조용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서백은 평소와 달리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매화육궁은 바둑에서 유명한 사활 묘수입니다. 스승님과 사모님은 바둑을 종종 두셨는데 사모님이 매화육궁으로 스승님의 돌을 잡으면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죠.”

서백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아련해 보였다.

하지만 거칠고 단순한 왕이삼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매화육궁이 뭐냐?”

“바둑은 한 무더기의 돌이 두 개의 집이 나야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화육궁은 여섯 집이 나더라도 결국 죽게 되는 모양이죠.”

바둑을 모르는 왕이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바둑에 까막눈이지만 집이 여섯 개나 되는데 두 집이 안 난다고? 그게 말이 되냐?”

“바둑에서는 말이 됩니다. 가로 세로 열아홉 줄이 그어진 바둑판 위에서는 어떤 모양도 나올 수 있으니까요.”

왕이삼은 계속 캐물었지만 청의인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백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매화육궁의 한가운데 돌을 놓으면 두 집이 나지 않아서 죽게 됩니다. 마침 저 연못에 징검다리가 있군요.”

서백의 말대로 연못은 물에 빠지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중간에 둥근 돌로 된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저 중에 딱 매화육궁의 급소 자리에 놓여 있는 돌이 있습니다. 바로…….”

휙. 서백이 깃털처럼 가볍게 몸을 날려서 방금 가리킨 돌 위에 착지했다.

“이 돌이 문 없는 건물의 해답입니다.”

서백의 몸무게가 더해지자 순간 징검다리 돌이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건물 정면에 위치한 벽이 갑자기 금이 가면서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끼이이익. 쿠구구구.

마치 거대한 회전문이 열리는 듯한 광경.

바둑판을 본 따 만든 정원의 징검다리가 사방이 꽉 막힌 건물의 문을 열도록 만드는 비밀 기관진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백은 한눈에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파훼한 것이었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짝.

이어서 사자상의 목소리가 말했다.

“과연 대단하시오. 세 분이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신 걸 잘 알겠소. 오늘 세 분을 제갈세가에 모시겠으니 들어오시지요.”

그 말에 따라 건물 안에서 은은한 불빛이 밝아지면서 서백 일행을 비추었다.

“들어가시죠.”

서백이 앞장서자 청의인도 고개를 끄덕인 뒤 뒤를 따랐다.

왕이삼은 그런 둘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서백과 청의인은 사자상의 말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름 석 자밖에 못 쓰는 까막눈이며 무공 또한 그럭저럭 실력 있는 도검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제갈세가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왕이삼은 회전문이 닫힐까 봐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건물이었지만 막상 안에 들어오자 그 안이 무척 넓었다.

끼익끼익끼익.

복도는 나무로 되어 있어서 왕이삼이 발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났다.

반면 서백과 청의인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왕이삼은 신경이 쓰여서 도둑처럼 발을 들고 사뿐히 걸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소리는 더욱 시끄럽게 날 뿐이었다.

‘젠장할. 경신법이 별로면 도둑질도 못하겠군.’

왕이삼은 속으로 불평했는데, 실은 그게 복도를 나무로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제갈세가의 건물들은 자객이나 도둑을 막기 위해 세세한 곳까지 의도를 가진 채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제갈세가의 비밀을 하나 추리해 낸 왕이삼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곧이어 긴 복도가 끝나고 창호지를 바른 문이 나왔다.

서백 일행이 다가가자 문짝 두 개가 양옆으로 스르르 열렸다.

그걸 보고 왕이삼은 흠칫 놀랐다.

목소리를 내는 사자상에다 문이 없는 집까지 봤는데 이번에는 자동으로 열리는 문이라고?

그런데 다시 보자 방 안에 하인 둘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문을 열고 있는 게 아닌가?

왕이삼은 괜히 놀란 것이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방 정면에 보이는 탁자에는 젊은 문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저는 제갈세가의 이공자인 제갈혁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자상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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