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제갈세가의 초대(1)
왕이삼은 서백과 청의인을 따라가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 둘 정말 생전 처음 보는 거 맞나?’
청의인과 서백은 나이로 볼 때 한 문파의 대사형과 막내 사제라고 하면 딱 맞았다.
게다가 둘은 공통점이 여럿 있었다.
타인의 정곡을 찌르는 말투.
괴상하게 보일 만큼 무심한 행동거지.
무엇보다 전광석화처럼 돌아가는 빠른 두뇌 회전!
잠시 허튼 생각에 빠져 있던 왕이삼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지웠다.
‘둘이 닮았든 말든 알게 뭐냐.’
무림밥을 오래 먹으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
바로 무공이 강하면 강할수록 괴팍하다는 것!
사람들은 방벽과 멀리 떨어진 요새 중앙 쪽으로 이동했다.
불과 몇 시진 전만 해도 왕씨세가의 위엄이 서려 있었던 중앙 천막은 이제 지키는 무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말끝마다 문파와 소속을 따지지 않겠다던 왕충과 주위 인물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야반도주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천막 안과 주위에 자리를 찾아서 주섬주섬 앉았다. 요새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자 시장바닥처럼 비좁았다.
하지만 소란스럽기는커녕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적막했다.
방벽 너머에 망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들 침 삼키는 소리까지 참을 정도로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서 해가 중천에 떴다.
그러자 서백이 일어서며 말했다.
“떠날 시간이군요.”
청의인은 별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반면 왕이삼은 서백이 지금 떠나자고 하는 말을 꺼낸 이유가 궁금했다.
“밖에 망자가 돌아다니는데 벌써 떠나자는 말이냐?”
“지금은 요새 밖에 망자가 없을 겁니다.”
서백은 왕이삼에게 대답한 뒤 자신을 바라보는 좌중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면 망자 떼가 산 사람의 기척을 찾아서 다시 요새 근처로 돌아올 겁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즉 지금이 요새를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
그 말이 결정타였다.
왕씨세가가 도망친 뒤 사태를 수습했던 서백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하자 사람들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일단 요새를 떠나서 북쪽으로 이동합시다. 융중으로 가면 제갈세가에게 안전을 부탁할 수 있을 겁니다.”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이번 말을 듣고 안도했다.
촉나라의 명재상 제갈량의 후손인 제갈세가.
제갈세가는 중원 무림에서 손꼽히는 명문정파이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 제갈세가라면 믿을 수 있겠지.
사람들의 얼굴은 동일한 생각으로 희망에 찼다.
불과 반나절 전에 왕씨세가에게 배신당하고서 다시 명문정파를 믿는 사람들.
무림인이 아닌 자가 봤다면 바보가 따로 없다며 비웃었을 장면이리라.
그러나 서백은 무심하게 넘겨 버렸다.
현실이 불안할수록 무언가 믿음에 매달리는 게 군중들의 심리니까.
“그럼 요새를 나갑시다.”
서백이 앞장을 서자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곧이어 방벽 앞에 도착했다.
서백이 요새의 이중문을 여는 기관장치를 돌리기 시작했다.
무림인들 몇몇이 서백을 도우려고 나섰지만 서백이 먼저처럼 혼자서 기관장치를 돌려 버리자 다들 침을 삼킨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덜컹덜컹덜컹.
그러자 몇몇 무림인들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저 소년이 기관장치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몇 명이 붙어도 꿈쩍하지 않던 기관장치가 강한 물살을 맞은 물레방아처럼 쉽게 돌아갈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이 엉뚱한 착각을 하는 것은 무공과 경험이 보잘것없어서였다.
왕씨세가가 무사들을 이끌고 떠나자 요새에 남은 무림인들은 대부분 삼류였다.
문파와 소속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안 되겠지만 그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서백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곧이어 서백이 요새의 이중문을 모두 열었다.
요새 밖의 풍경이 눈앞에 드러나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저기 어딘가에 혹시 망자가 있지 않을까?
다행이 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서백과 청의인은 서슴없는 걸음걸이로 척척 요새 밖으로 나갔다.
서백이 고개를 돌려서 왕이삼을 불렀다.
“안 오고 뭐 하십니까?”
“가, 가야지…….”
멍청히 서 있던 왕이삼은 흠칫 놀라 대답한 뒤 서백을 따라갔다.
그러자 사람들도 하나둘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림인과 피난민을 합해서 수백이 넘는 인원이 요새 밖으로 나와서 이동을 시작했다.
서백이 지도를 보며 청의인에게 말했다.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으로 가려면 이쪽이 가장 빠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감이오.”
청의인의 대답은 짧고 무심했다.
“선두는 본인이 맡겠소.”
“후미는 제가 맡겠습니다.”
청의인이 일행의 맨 앞으로 가자 서백은 반대로 맨 뒤로 가서 후방을 지키며 걸었다.
왕이삼은 둘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허, 아주 둘이서 무림맹을 결성했군.’
왕이삼은 농담 삼아서 투덜거렸지만 막상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서백과 청의인 둘이 정말 무림맹의 중심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행의 이동 속도가 좀처럼 빨라지지 않았다.
서백을 따라 후미에서 걷고 있던 왕이삼은 좀이 쑤셨다.
“피난 가는데 어떤 놈이 늑장부리는 거야?”
왕이삼은 까치발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속도가 느린 이유가 바로 나왔다. 선두에 있는 청의인이 산책하듯이 느릿느릿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성미가 급한 왕이삼은 열불이 터졌다.
“내가 가서 뭐라고 한마디 할까? 어디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뭐 저렇게 느려?”
그러자 서백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지금 속도가 가장 좋습니다.”
“뭐야? 굼벵이도 이거보단 빠르겠다.”
“빨리 움직이면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무림인은 잠시 호흡을 멈추거나 억지로 참는 게 가능하지만 피난민들은 쉽지 않겠죠.”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 속도로 가면 피난민들도 숨을 몰아쉴 필요가 없습니다. 망자가 산 사람의 숨결을 알아차릴 위험이 최소화되는 거죠.”
“……!”
왕이삼은 그제야 서백의 의도를 깨달았다.
촉도관행 때 장우명 패거리가 습격한 뒤 망자밭을 통과할 때도 서백은 일부러 천천히 이동하지 않았던가!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은 왕이삼은 입맛을 다시며 길을 걸었다.
어느새 요새를 떠난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왕이삼은 망자가 나올까 봐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런 낌새가 없자 허세를 떨며 말했다.
“망자는커녕 망자 할애비도 안 보이는군. 왕씨세가는 대체 왜 도망친 거지?”
“그때는 새벽이지 않았습니까.”
“그새 망자 떼가 가 버렸단 말이냐?”
“네.”
“반나절 동안 요새에서 죽친 보람이 있었군.”
그러자 서백이 왕이삼의 말을 정정했다.
“반나절이 아니라 꼬박 하루 기다린 셈입니다.”
“왜?”
“어젯밤부터 계산하면 하루가 되니까요.”
“어젯밤이라니?”
“밤에 말 울음소리가 들릴 때 왕씨세가가 야반도주하는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저 빌어먹을 놈처럼 후배도 알고 있었냐? 그럼 왜 밤에 깨워서 미리 말을 안 해 준…….”
순간 왕이삼은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치는 바람에 말을 삼켰다.
“후배 혹시 설마…….”
“네. 청의인도 저도 일부러 기다린 겁니다.”
“……!”
“간단한 병법이죠.”
왕이삼은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서백과 청의인은 왕씨세가가 도주하는 낌새를 어젯밤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은 물론 오늘 오후까지 요새에서 머물렀다.
즉 서백과 청의인은 왕씨세가가 도망칠 때 망자 떼가 그들을 따라가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게다가 왕씨세가는 말들을 몽땅 끌고 갔으니 망자 떼의 이목은 그쪽으로 쏠렸을 터.
사람들을 배신하고 자기 목숨만 챙긴 왕씨세가.
그런데 서백과 청의인은 오히려 왕씨세가를 미끼로 써서 망자 떼를 멀리 보내 버린 셈이 아닌가?
미끼를 써서 적을 유인하는 수법.
삼국연의를 깨나 읽은 왕이삼도 미끼 유인책은 잘 아는 병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호사가들이 떠드는 얘기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 현실은 다르다고 여겼다.
현실에서 왕씨세가가 도망치는데 망자 떼가 그들을 따라갈 것이라 예측하고 눈감아 준다고?
그게 어디 정상적인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인가!
그러나 지금 일행에 비정상적인 인물이 둘 있었으니, 바로 서백과 청의인이었다.
“왕씨세가한테 진작 경고해 줬어야 되지 않았냐?”
왕이삼의 말에 서백이 무심한 표정을 지우고 웬일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문파도 소속도 없는 무림인의 말을 들었을 것 같습니까?”
“…….”
서백의 말이 맞았다.
바로 어제만 해도 왕충과 무림인들은 청의인의 조언을 일언지하에 무시하지 않았는가?
왕이삼은 서백의 소름 끼치도록 냉혹한 일처리에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서백과 함께 이번 작전을 지휘한 것이나 다름없는 청의인의 정체도 더욱 궁금해졌다.
서백 일행은 낮 동안 쉬지 않고 이동한 뒤 밤이 되자 들판에서 노숙을 했다.
사람들은 옷이나 천으로 머리를 덮어서 간신히 밤이슬만 막은 뒤 억지로 잠을 청했다.
“혹시 밤에 망자가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 마십시오. 망자 떼가 이곳을 지나갔으니 당분간은 안전할 겁니다.”
수만 구의 망자 떼는 왕씨세가를 따라갔으니 괜찮다는 말. 왕이삼은 서백의 말을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잠을 설쳤다.
걱정과 달리 밤중에 망자 출현은 없었다.
서백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뜻.
계속해서 서백 일행은 지도를 따라 제갈세가가 있는 융중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삼 일 밤낮을 들판에서 노숙하며 이동했을 때 드디어 여정이 끝나고 융중에 도착했다.
서백 일행이 한 언덕을 넘었을 때였다.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달린 깃발이 보였다.
하얀 깃털이 수놓인 깃발.
촉나라의 명재상 제갈량은 평소 깃털로 짠 부채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제갈세가는 그걸 기리는 뜻에서 깃털을 문장으로 새긴 깃발을 내건 것으로 보였다.
“융중입니다.”
“그래. 촉황제가 삼고초려를 한 곳이지.”
제갈세가의 인물들은 중원 전역에 퍼져서 활약하고 있으나 융중은 제갈세가가 시작된 곳인 만큼 서백의 감회는 새로웠다.
그러나 깃발 앞에 도착했지만 마을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왕이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도 죄다 피난 갔나 보군.”
“깃발에 흙먼지가 앉지 않았습니다. 매일 깃발을 청소하고 있는 것 같으니 제갈세가 사람은 분명 있을 겁니다.”
서백은 실망하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마을 중앙에 난 길을 따라 이동하자 곧 작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에는 바둑판처럼 돌로 된 단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철로 주조된 사자상이 서 있었다.
사자상은 길의 정면을 보고 있는 자세라서 마치 두 눈을 부릅뜨고 중원의 들판을 응시하는 듯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때 사자상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인기척은 없지만 마을에 도착해서 안심하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사자상을 쳐다봤다.
특히 왕이삼은 사자상이 얼마나 값어치 나갈까 궁금해서 주위를 돌며 살피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사자상이 말을 한다고?”
그러자 서백이 왕이삼의 앞으로 나서며 사자상을 향해 포권지례를 했다.
“남쪽에 있는 왕가 요새에서 망자 떼를 피해 온 사람들이 제갈세가에 도움을 청합니다.”
“…….”
“저는 사천 석가장 출신의 서백으로 현재 스승님의 명에 따라 소림사로 가는 중입니다.”
“…….”
서백이 소개를 했으나 사자상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사자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갈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