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청의를 걸친 남자(4)
그때였다. 무림인 하나가 서백과 같은 의문을 품고 청의인에게 물었다.
“잠깐! 독순술을 써서 왕씨세가의 배신을 알고 있었다고 했소?”
“그렇소.”
“그럼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요? 혹시 왕씨세가한테 뒷거래로 뇌물을 받은 건 아니오?”
그 말에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청의인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왕씨세가와 손을 잡았다면 함께 도망쳤지 왜 혼자 요새에 남아 있겠소?”
“그건 그렇지만…….”
무림인은 입을 다물었다.
청의인의 대답은 짧지만 논리정연해서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서백이 무림인 대신 질문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요새에 남은 이유는 왕씨세가가 말을 끌고 갔기 때문이 아닙니까?”
“맞소.”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재차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끌고 도망치는데 태연히 요새에 남았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서백과 청의인의 문답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자 왕이삼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후배, 그게 무슨 소리냐?”
“간단합니다. 말은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왕이삼은 기가 막혔다.
서백의 입에서 간단하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정작 쉽게 이해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 예민한 거랑 도망치지 않은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왕이삼이 목소리를 높이자 서백이 평소처럼 무심하게, 동시에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말은 사람보다 소리를 잘 듣고 냄새도 잘 맡습니다. 또한 감각이 예민해서 위험한 낌새를 잘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망자가 근처로 접근하면 사람보다 말이 먼저 알아차릴 겁니다. 말이 공포에 질려서 투레질을 하면 망자도 말의 호흡을 느끼고 역으로 낌새를 알아차리기 쉬워집니다.”
방벽 전역에 낭랑한 목소리가 똑똑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서백이 약관도 안 된 소년이라 내심 무시하고 있었는데 설명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동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두 마리라면 숨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요새의 말을 전부 끌고 갔으니 망자 떼는 기척을 느끼고 그쪽으로 이동할 겁니다.”
“……!”
듣고 나니 서백의 설명은 간단했다.
함부로 말을 끌고 갔다간 망자에게 들킨다는 것!
망자가 창궐한 중원에서 말은 확실히 안전과 위험 요소를 동시에 안고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망자한테서 도망치려면 빠른 말을 타는 게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중원을 떠도는 망자 떼는 그 숫자가 수천수만에 달한다.
수만의 망자 떼가 들판을 뒤덮고 있는데 말을 타고 있다고 해서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그럴 때는 차라리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는 것만 못할 터.
즉 왕씨세가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도망치는 중에도 말들을 몽땅 챙기겠다는 욕심이 화를 부른 셈!
“망자 떼가 요새 근처를 지나갈 테니 지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망자와 마주칠 수 있습니다.”
“…….”
이제 사람들은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서백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래도 나가야겠다면 다른 사람들은 요새 중앙으로 가서 숨어 있을 테니 그다음에 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
이번에는 서백의 말에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요새를 나가든 말든 당신 자유다.
하지만 당신이 죽든 말든 그것도 자유라는 선포!
사람들이 기에 눌려서 침묵하고 있자 왕이삼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면 좋냐?”
“망자 떼가 피 냄새를 맡게 하면 안 됩니다.”
서백은 방벽에 모인 사람들을 좌우로 한 번 훑은 다음 말했다.
“일단 피를 흘리는 중상자는 없으니 안심해도 좋겠군요.”
그 말에 사람들은 무심코 양옆을 돌아보며 옆 사람을 살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자기도 모르게 서백의 말을 따르게 된 것이었다.
그때 청의인이 나직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여인.”
“아…….”
서백이 그답지 않게 눈썹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실례지만 달거리하는 여인이 있다면 빨리 방벽과 떨어져서 요새 중앙으로 가십시오.”
무림인 중에는 여인이 몇 없었지만 피난민들 속에는 꽤 많은 수의 여인들이 있었다. 서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는 여인 몇몇이 조용히 인파 속에서 몸을 빼낸 뒤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서백의 명령을 일사불란하게 따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방벽 근처에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모두 중앙 천막 주위에서 기다립시다.”
서백이 명령하자 청의인도 동의한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 피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요새 중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방벽 너머 어딘가에 망자가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은 게 당연했다.
사람들은 혹시라도 망자 떼한테 들킬까 봐 발소리를 죽이고 엉거주춤 걷고 있었다.
그러나 서백과 청의인은 서슴없이 척척 걸었다.
왕이삼은 서백이 그러는 거야 잘 알았지만 청의인 역시 행동에 거침이 없자 의문이 생겼다.
왕이삼이 슬쩍 귓속말을 했다.
“저 청의인 말야. 망자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군. 뭐 후배만큼은 못하겠지만.”
“아닙니다. 저보다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후배는 지나치게 겸손한 게 탈이야.”
“아까 달거리하는 여인이 있을지 모른다고 지적하지 않았습니까.”
“…….”
그 말에 왕이삼은 할 말을 잃었다.
무림인에게 피 냄새를 조심하라고 하면 부상 입은 자부터 신경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청의인은 상처 말고 피 냄새를 풍길지 모르는 다른 가능성까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약관이 안 된 소년인 서백이 여인의 일을 깜빡해서 지나치려던 것을 재빠르게 지적한 거라면?
그야말로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다는 뜻!
왕이삼은 평생 서백만큼 두뇌 회전이 빠른 무림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청의인도 서백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뛰어날지도…….
그래서일까?
왕이삼은 나란히 이동하고 있는 서백과 청의인을 슬쩍 훔쳐보며 생각했다.
‘저 둘 왠지 닮은 것 같은데?’
물론 서백과 왕이삼의 외모는 전혀 비슷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둘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똑같았다.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형제처럼.
* * *
왕씨세가와 무림인 일당은 동이 막 트기 시작해서 아직 어두운 숲속을 이동하고 있었다.
왕충과 십여 명의 무림인 지배층은 말을 타고 있었다. 다른 무사들은 병장기를 메고 도보로 이동 중이었다.
한밤중에 왕가 요새를 빠져나온 것이 불과 한 시진 전.
요새 근처를 지날 때 무사들은 숲속 어딘가에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망자 떼가 이동하는 소리이리라.
무사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한참을 이동하자 망자들의 기척이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왕가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뒤에야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무림인 중 하나가 왕충에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왕씨세가의 선택은 과연 훌륭했소. 요새를 나오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소이다.”
“모두 여러분이 신경 써준 덕분입니다.”
왕충은 턱수염을 만지며 겸양을 떨었다.
공들여 세운 요새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왕충과 무림인들은 아쉬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요새? 요새야 다시 세우면 그만이다.
일단 목숨부터 구하고 봐야 하지 않는가?
왕씨세가가 요새를 세운다고 하면 삼류 무림인들이 떡밥을 노리고 몰려들 것이다. 갈 곳 없는 피난민들도 모여들 게 뻔했다.
벌레들은 불빛을 향해 모이게 마련이니까.
피난처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뒤 요새 건설은 그들에게 시키면 된다.
과거 중원이 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왕씨세가가 명성을 높인 방법이었다. 왕충은 조상들의 지혜에 감사를 드렸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무림인들은 서로 포권지례를 하며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무사들도 잡담을 하며 숲속을 이동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말들이 투레질을 시작했다.
푸르르릉.
처음에는 밤에 잠을 못 자고 오랜 시간 사람을 태우느라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충과 십여 명의 무림인들을 태우지 않고 그냥 무사들이 끌고 가는 말들까지 심하게 투레질을 하는 것이었다.
푸르르릉! 히이이잉!
투레질은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투레질뿐 아니라 거칠게 울부짖는 말이 나왔다. 어떤 말은 걸음을 멈추고 네 발을 땅에 박은 채 고삐를 당기기도 했다.
마치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듯한 동작.
“이놈들이 왜 이래?”
무사들이 진정시키려 했지만 말들은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왕충이 묻자 무사들의 수장이 대답했다.
“아침 여물도 못 주고 이동하는 바람에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한낱 짐승일 뿐. 정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 마리를 본보기 삼아서 목을 베어라.”
“존명.”
무사가 검을 뽑아들고 가장 심하게 투레질을 하는 말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숲속 옆의 덤불에서 무사 하나가 소변이라도 보고 오는지 나오는 것이었다.
수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주님이 보기 전에 얼른 자리로 돌아가라.”
왕충은 세가의 녹을 먹는 무사들에게 철저하게 실리를 따지며 냉혹하게 대했다.
차별 금지? 그건 삼류 무림인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이동 중에 자리를 비운 것을 알면 왕충은 무사를 해고하는 것은 물론 말들이 불안해진 것까지 누명을 덮어씌울지도 모르는 일.
왕씨세가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주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몇 배는 신경 써야 되는데 어디서 저런 멍청한 놈이…….
그때였다.
무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개처럼 양쪽 입술을 말아올리는 것이 아닌가?
크르르르.
수장은 무림밥을 오래 먹었지만 하필 망자 경험이 전무했다. 망자와 싸운 적도 직접 본 적도 없었다.
그 우연이 화를 불렀다.
망자가 턱주가리를 벌리고 수장에게 덤볐다.
꾸웨에엑!
“이게 뭐야?”
수장은 깜짝 놀라는 중에도 보법을 밟아 몸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툭.
망자의 목이 일검에 떨어졌다.
하지만 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자의 몸뚱이는 두 손을 휘저으며 수장한테 다가왔다.
“빌어먹을……!”
수장은 마구잡이로 몸뚱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십여 번이 넘는 난도질을 당하자 몸뚱이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생명이 붙어 있는지 아직 꿈틀거렸다.
어쨌든 망자가 힘을 잃자 수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했어도 모자랄 판에 온갖 난동을 피웠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무사들이 술렁거리자 왕충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망자가 나온 것 같습니다.”
“뭐라고? 모두 전속력으로 숲을 빠져나간다!”
“존명!”
왕충과 무림인들이 정신없이 말을 몰기 시작했다.
반면 일백에 가까운 왕씨세가의 무사들은 말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두 발로 달려야 했다.
전쟁터에서 말이 없는 병사가 낙오된다면 남는 것은 죽음뿐!
무사들은 미친 듯이 숲속을 달렸다.
등 뒤의 숲속 어딘가에서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키에에엑.
다행이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잠시 후 왕씨세가 일당은 숲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왕충과 무림인들은 안도하며 대화를 나눴다.
“망자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졌으니 숲을 나온 이상 위험은 없을 겁니다.”
“역시 가주님의 판단은 신속하십니다.”
곧이어 두 발로 뛰어온 무사들이 숲에서 나왔다.
“모두 전열을 정비하고 이동을 재개한다.”
무사들은 탈진해서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왕충은 신경 쓰지 않고 명령했다.
그런데 앞으로 고개를 돌리던 왕충은 무언가를 보고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눈앞에 펼쳐진 들판에서 수만 구의 망자 떼가 왕씨세가 일당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