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중원 땅에 들어서다(2)
서백 일행은 촉도관 대신 장강삼협을 통과해서 예상보다 빠르게 중원 땅에 도착했다.
그러나 장강삼협의 험난한 협곡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깎아지른 봉우리를 몇 개 넘자 들판이 나온 것도 잠시. 들판을 지나면 다시 절벽이 나와서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행은 절벽을 우회해서 이동했다.
그런데 한 번 길을 우회하자 계속 돌아가야 됐다.
“어째 가면 갈수록 협곡이 점점 더 많아지냐? 설마 사천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해가 뜨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그건 아닐 겁니다. 다만…….”
“다만 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루 종일 협곡을 헤맨 끝에 서백은 현재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일행이 지도 상에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냐?”
“어떡하긴 뭘. 이대로 계속 가야지.”
왕이삼이 분통을 터뜨리자 유소운이 끼어들었다.
“길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가자는 거냐?”
“그럼 왔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는 없지.”
“이거 하늘이 무너져도 웃을 놈이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모르나?”
유소운이 낙천적으로 받아치자 왕이삼은 혀를 찼다.
서백은 유소운처럼 낙천적이지 않은 대신 철저히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성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소운의 말이 맞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설령 돌아간다고 해도 지도가 엉망이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방향을 틀었다가는 협곡에서 영영 헤맬지도 모르는 일!
그런데 길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일행을 괴롭혔다.
바로 식사 문제였다.
협곡을 따라 이동하느라 물은 충분했다.
그러나 음식은 구할 수 없었다. 어쩌다 구하는 산열매 말고는 먹을 식량이 없었다. 물살이 빠른 협곡만 나오는 바람에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다.
서백이 겨울 동안 준비한 육포는 물에 젖어서 불어터지는 바람에 곰팡이가 펴서 못 먹게 되었다.
유소운이 갖고 있던 벽곡단 역시 마찬가지.
왕이삼은 따로 지니고 있던 식량이 없었다. 그렇다고 은원보를 씹어먹을 수도 없는 일.
서백은 육포를 꼼꼼히 살폈지만 결국 포기했다.
“이 육포들은 버려야겠습니다.”
“사슴고기로 만든 육포라고 했지? 쓰읍, 아까운데.”
“이걸 먹으면 만독불침의 몸이라도 속이 뒤집히고 배탈이 날 겁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 없을까?”
서백이 버리려는 육포를 보고 왕이삼이 아까워하자 유소운이 말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어떤 방법이냐?”
“일단 한 번 먹어 보라고. 배탈이 나면 먹어도 되고 아니면 버리면 그만이니까.”
“뭐라고? 지금 내 몸으로 시험해 보겠다는 거냐?”
“육포가 아까워서 침을 흘리는 사람한테 먹어 보라고 한 것도 잘못인가?”
“이 자식! 네놈 목구멍에 먼저 육포를 처넣어 주마!”
장강삼협에서 죽을 위기를 함께 겪은 뒤라 그런지 둘의 대화는 어느 때보다 정겨웠다.
주위는 사냥할 짐승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바위 밭.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장강삼협을 헤엄쳐서 가는 건데. 그럼 물고기라도 잡아먹었을 것 아니냐?”
왕이삼이 투덜거리자 서백과 유소운도 그 말에 동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극히 드문 일이었다.
결국 셋은 이틀 밤낮을 쫄딱 굶으며 이동했다. 그동안 물만 마시느라 불룩 나온 배를 안고서.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걷던 왕이삼이 자신의 발을 쳐다봤다. 그가 신고 있는 가죽 장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먹을 수 있을까? 이 가죽 살아 있을 때 소였다고. 소는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고 하잖아?”
“못 먹습니다.”
“국으로 끓이면 어떨까? 국물에 고기 맛은 밸 거 아냐?”
“선배님 발냄새만 밸 겁니다.”
서백 일행은 굶주린 배를 안고 하염없이 길을 갔다.
중원은 어딜 가도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릴 만큼 사람이 넘쳐나는 곳이다. 게다가 장강삼협을 지나왔으니 민가나 상인 행렬이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또한 망자 창궐의 폐해.
“어떻게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안 보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일행이 쫄쫄 굶으며 이동한 지 삼 일째 되는 날.
절벽을 하나 돌아가자 숲이 나왔다. 그런데 숲을 지나가던 중 서백이 갑자기 주먹을 들었다.
멈추라는 수신호.
“망자냐.”
“…….”
서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망자가 나타난 것도 아니니 굳이 목소리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서백이 수신호를 한 것은 굶어서 말할 힘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럼 뭔데?”
“덫이 있습니다.”
“덫?”
그 말을 듣고 왕이삼과 유소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나무 그루터기 옆에 큼지막한 덫이 장치되어 있었다.
“사냥덫이다!”
왕이삼이 신바람을 내며 달려갔다.
그러나 덫 앞에 도착하자 왕이삼은 풀이 죽어서 고개를 떨궜다.
“빈 덫이었군…….”
덫의 이빨은 맞물려 있었지만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덫에 걸린 짐승이 용케 몸을 빼내서 도망친 것이리라.
“제기랄. 배 좀 채우나 했더니.”
“운 좋은 놈인가 보군.”
“우리 운은 어쩌고? 여기서 더 운이 나빴다간 굶어죽을 지경이다!”
“나 보고 어쩌라고.”
왕이삼이 버럭 하자 유소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둘이 정겹게 대화를 나눌 때 서백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덫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하군.’
“후배, 빈 덫을 뭐 그렇게 들여다보냐?”
“그냥 빈 덫이 아닙니다. 핏물과 함께 이상한 게 걸려 있습니다.”
“알게 뭐야? 짐승도 도망쳤는데.”
“짐승은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죠.”
“뭔데?”
“누군가 덫을 설치했다는 것은 근방에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
왕이삼이 깜짝 놀랄 때, 한 발 빠른 유소운은 이미 나무 위로 몸을 날린 뒤였다.
유소운은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곧이어 유소운이 땅에 내려오자 서백이 물었다.
“어디입니까?”
“사(巳) 방위(남남동쪽)다.”
궁수 유소운. 활을 쏴서 먼 거리의 목표를 맞추려면 시력이 좋은 것은 필수다.
때문에 서백은 더 묻지 않고 유소운이 말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소운도 서백을 따라 달리자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
“멀리 공터에 천막이 세워진 걸 봤소.”
“천막?”
“마침 사냥꾼들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지.”
“사냥꾼들이 있다고? 그럼 음식도 있겠구나!”
그제야 왕이삼도 신바람을 냈다.
셋은 배고픔도 잊고 정신없이 숲을 달렸다.
잠시 후 숲이 끝나고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에는 간이 천막이 몇 개 세워져 있었다.
서백 일행은 공터로 다가갔다. 보초를 서고 있던 무림인 두 명이 일행을 발견하고 외쳤다.
“거기 멈춰라!”
동시에 무림인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서백 일행을 포위했다.
서백은 무림인들을 재빨리 훑어 봤다.
누런 황건을 쓰고 황의를 걸친 자들.
복장이 단정하고 통일된 것으로 보아 무림의 정파인들로 보였다. 하지만 복장만 봐서는 어느 문파인지 알기 힘들었다.
스릉. 무림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수상한데? 혹시 망자 아냐?”
서백이 그 말을 반박했다.
“망자 아닙니다. 물린 자국이 없지 않습니까?”
“…….”
그 말에 무림인들이 서백 일행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서백 일행은 굶어서 몰골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장강삼협에 빠진 뒤 협곡에서 옷을 말려 입었기 때문에 의복은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때 무림인들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망자로 보이지는 않는군.”
무림인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열었다. 그 사이로 무림인들의 수장이 걸어 나왔다.
그는 삼십대 중반 가량 되는 사내였다. 무림인들의 수장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젊은 것도 모자라 얼굴 표정이 온화했다.
사내 역시 황건과 황의를 걸쳤지만 다른 무림인들과 달리 얼굴과 몸짓에 기품이 배어 있었다.
무림인 하나가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방주님, 이자들이 갑자기 진영에 접근했습니다.”
“타 문파 사람들 앞에서는 아직 방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네, 방주님. 아니…….”
무림인이 말을 흐렸지만 사내는 피식 웃으며 더는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서백 일행을 향해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본인은 철장방의 천리형이라고 하오.”
“……!”
철장방(鐵掌幇).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는 끼지 않으나 최근 급격하게 세를 불리고 있다는 방파.
일행 앞에 있는 사내는 철장방의 방주인 천리형이었다. 천리형이 방도에게 아직 방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 걸 보면 어떤 사정이 있는 것 같았지만.
왕이삼과 유소운이 한숨을 쉬며 서로를 쳐다봤다.
“기어이 철장산까지 왔나 보군.”
“그러게 말이요.”
서백 일행은 해 뜨는 동쪽을 기준 삼아서 융중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절벽을 우회하는 바람에 이동선이 점점 남쪽으로 치우쳤다. 급기야 동남쪽에 있는 철장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젠장! 결국 길을 빙 돌아가는 셈이 됐잖아?”
왕이삼이 투덜거리자 서백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실수한 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잊어버리시죠.”
“후배는 속도 편해서 좋겠어!”
“앞일만 생각해도 쉽지 않은 게 인생입니다.”
반면 유소운은 넉살 좋게 씨익 웃었다.
“역시 서백이 우리 중에 가장 나잇값을 하는군.”
“쳇, 어련하실까!”
왕이삼은 유소운의 딴지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천리형에게 말했다.
“나는 철장방 부방주 손식과 아는 사이오. 부방주는 지금 어디 있소?”
그러자 천리형이 방도들과 한 차례 시선을 주고받은 다음 대답했다.
“부방주님은 망자 떼에 휘말려서 돌아가셨소.”
“아, 저런… 정말 안됐소…….”
왕이삼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런 왕이삼을 보며 유소운과 서백은 슬쩍 귓속말을 나눴다.
“사람이 죽어서 안됐다는 건지 연줄이 사라져서 안됐다는 건지 모르겠군.”
“둘 다겠지만 돈을 걸라면 후자에 걸겠습니다.”
천리형이 재차 질문했다.
“당신들은 어느 문파 소속이오?”
“저희는 딱히 소속은 없는 무림인들입니다. 장강삼협을 넘어온 뒤 길을 잃은 와중에 여러분을 뵙는군요.”
서백이 포권지례를 하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그 말에 철장방도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서백 일행을 내리깔아보며 무시하는 눈빛!
-소속 문파도 없는 떠돌이라고?
-망자 떼가 창궐하니까 문파도 없는 놈들마저 무림인이랍시고 나서는군!
“이 근처는 철장산과 가까운 곳이라 철장방이 다스리고 있소. 철장방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온화하던 천리형의 목소리에도 어딘가 모르게 서백 일행을 얕잡아보는 기색이 엿보였다.
“철장방에 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사천에서 아미파 장문인 정수사태의 인도를 받아 장강삼협을 통과했습니다.”
“아미파? 아미파의 장문인을 뵈었다는 거요?”
“네.”
서백의 말에 천리형이 순간 움찔했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명의 철장방도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를 쳐다봤다.
명문정파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미파.
그 아미파의 장문인을 만나고 인도를 받았다는 말을 듣자 서백 일행을 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이었다.
놀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 소림사 방장님을 뵈러 가는 중입니다.”
“……!”
소속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무림인 세 명이 아미파 장문인을 만난 것도 모자라 소림사 방장을 만나러 가고 있다고?
잠깐 놀라던 철장방도들은 서백의 말이 허풍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서백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아미파 정수사태께서 주신 지도가 물에 젖었습니다. 해서 길을 잘못 들어 철장산까지 왔군요.”
먹물이 번져서 알아보기 힘든 지도.
그러나 맨 위에 찍혀 있는 붉은 인장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미파의 인장이다!
철장방도들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하지만 서백은 철장방도들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지도를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