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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29화 (29/123)

29화 중원 땅에 들어서다(1)

서백이 물을 향해 뛰어들자 사슬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왕이삼은 기겁을 하며 놀랐다.

“후배! 지금 제정신…….”

그런데 서백이 물 위에 착지하는 게 아닌가?

“설마 등평도수?”

왕이삼은 서백이 물 위를 달리는 경공, 즉 등평도수를 시전한 게 아닌가 싶어서 경악했다.

하지만 서백은 물에 떠 있는 보의 잔해를 밟고 선 것에 불과했다.

보의 잔해까지만 오면 뭍으로 헤엄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암초밭에 걸린 채주선이 가라앉고 있어서 닻 사슬이 끌려간다는 것.

“서두르십시오!”

일행은 서백이 당기고 있는 밧줄을 잡고 사슬 위를 이동했다. 유소운은 사슬 위를 나는 듯이 달렸고 왕이삼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사슬을 이동하던 양소소가 무언가를 보더니 발을 멈췄다. 밧줄 사다리에 걸려 있는 궤짝이었다.

궤짝을 옮기던 채도가 배가 요동치는 바람에 물속에 떨어진 뒤, 궤짝은 밧줄에 얽힌 채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저기 아버님의 신물과 은괴가 있소!”

양소소는 몸을 돌려서 밧줄로 건너뛰었다. 그리고 밧줄을 타고 궤짝으로 갔다.

보의 잔해가 한계에 달하자 서백이 외쳤다.

“시간이 없으니 돌아오십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광기에 찬 양소소의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요? 여기 장강삼협수로채의 신물과 은괴가 있소! 신물과 은괴가 있으면 수로채는 얼마든지 재건할 수 있…….”

그때 채주선이 거대한 암초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콰콰콰쾅. 쩌억.

채주선의 밑둥이 굉음과 함께 박살났다.

거대한 채주선이 요동치자 닻 사슬은 물론 밧줄이 줄넘기를 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그 바람에 막 궤짝을 잡은 양소소는 공중에 붕 떴다.

“아아아악…….”

양소소의 신형이 궤짝과 함께 어두운 하늘 속으로 날아갔다. 얼마나 높이 떠올랐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참 뒤에 멀리서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백은 물을 살폈지만 석가심결을 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게 없었다.

잠시 후 허우적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져 버렸다. 양소소와 궤짝은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거친 장강 밑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양소소가 정말 원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방파? 장강수로채의 신물? 은괴 궤짝?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무림에서 실력 없이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탐욕일 뿐!

탐욕의 대가는 컸다. 서백은 양소소의 명복을 빌었지만 슬퍼하지는 않았다.

‘약자가 탐욕까지 부렸으니 그 끝은 뻔할 터.’

죽은 자에게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서백에게는 일행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

닻 사슬이 출렁거리자 유소운은 오히려 그 반탄력으로 공중에 도약해서 서백의 옆에 착지했다.

유소운이야 처음부터 걱정하지 않았다. 반면 왕이삼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물속에 빠졌다.

“나 참. 은원보 여덟 개가 장강에 빠졌는데 그냥 놔 둘 수도 없고.”

유소운이 그답게 여유 넘치는 농담을 하며 왕이삼을 끌어당겼다. 왕이삼이 밧줄을 쥔 채 끌려왔다.

곧이어 셋은 물속에서 나와 보의 잔해 위에 섰다.

일행은 보의 잔해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뛰었다. 잠시 후, 일행은 물에서 완전히 벗어나 땅에 발을 딛는 데 성공했다.

협곡의 한가운데에서는 채주선이 침몰하고 있었다.

셋은 멀리서 가라앉고 있는 채주선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거대한 채주선도 한 번 밑창에 구멍이 나자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배가 물속에 잠기는 순간에도 망자들이 부르는 뱃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피 냄새가 멀어지자 다시 생전에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배의 고물이 완전히 물밑으로 가라앉자 부글거리는 물거품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군. 정말 고맙네.”

“별말씀을. 은원보 여덟 개나 혼자 삼키지 마시오.”

“물에서 건져 줬다고 은원보를 더 내놓을 생각은 없으니 단념하라고.”

“어련하실까.”

유소운과 왕이삼이 정겨운 대화를 주고받을 때, 서백은 협곡의 반대편 너머로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지평선에서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험한 협곡만이 계속되는 줄 알았는데, 눈앞의 암벽 너머로 장대한 벌판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등 뒤는 세찬 물살이 흐르는 장강삼협인데 앞은 광활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산과 협곡이 겹겹이 남아 있지만 적어도 벌판이 나왔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서백이 멍한 눈으로 벌판을 보고 있자 유소운이 물었다.

“왜 그래? 중원 땅 처음 보는가?”

“네. 처음입니다.”

서백은 협곡과 산맥으로 둘러싸인 사천 땅을 벗어나 드디어 중원 땅에 도착한 것이었다.

서백이 조용히 중원 벌판을 바라보고 있자 유소운과 왕이삼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한 뒤 말을 걸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이윽고 서백이 입을 열었다.

“출발합시다.”

어느새 서백의 머릿속에는 사천 땅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감쪽같이 지워졌다.

이제 서백은 지금부터 어떻게 망자 구역을 돌파해나갈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망자가 창궐한 중원 땅.

그러나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 소림사.

서백은 소림사를 향해 중원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 * *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중원 땅.

이제 다음 행선지를 결정해야 할 때.

서백은 가슴에 손을 얹고 의복을 살폈다.

서백의 두툼한 상의 속에는 한 권의 서책이 들어 있었다. 스승이 소림사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서책이었다.

석가장을 떠나기 전, 서백은 기름 먹인 천에 싸서 서책을 밀봉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상의 옷감 속에 집어넣고 바느질로 꿰맸다.

옷이 불타기 전에는, 아니, 서백이 죽기 전에는 서책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터.

‘서책은 걱정 없다.’

손으로 눌렀을 때 눅눅한 느낌이 나지 않았다. 서책에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뜻.

서책은 무사했다.

반면 지도는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정수사태가 준 지도는 장강삼협의 협곡과 복잡하게 얽힌 장강 지류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지도만 있으면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장강삼협 물속에 빠지는 바람에 옷과 혁낭이 흠뻑 젖어 버린 것이었다.

일행은 옷을 벗은 뒤 나뭇가지에 걸고 말렸다. 화섭자는 불씨를 만들어서 다시 채워 넣었다.

하지만 물에 흠뻑 젖어서 먹물이 번져 버린 지도는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

‘지도도 서책과 함께 밀봉해서 옷 속에 두었어야 했나?’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동이일 뿐.

평생을 산에 있는 석가장에서 산 서백.

그는 준비가 철저한 성품이지만 장강삼협에서 몇 번씩 배가 난파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서백은 아쉬운 마음으로 먹물이 번진 지도를 펼쳤다.

왕이삼과 유소운이 머리를 들이밀고 지도를 봤다.

“지도는 왜 펼치냐?”

“몰라서 묻소? 다음 행선지를 정해야 길을 떠나지.”

“오호라, 그렇게 준비를 잘해서 길치가 되셨나?”

“길을 모르니 더욱 준비를 잘해야 되지 않겠소?”

둘이 정겨운 대화를 나눌 때, 서백은 지도를 유심히 살피며 행선지를 찾았다.

“장강삼협을 통과했으니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이 근방일 겁니다.”

서백이 지도의 한 지점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가장 가까운 문파를 찾아보죠.”

무림의 각 문파와 세가는 망자 창궐 이후 관문이나 요새를 만들어서 망자 떼를 막고 있었다.

즉 망자 떼를 피하기 위해서는 관문과 요새를 징검다리처럼 거치면서 이동해야 했다. 먼저도 촉도관에 들러서 여정 준비를 하지 않았는가.

“어디 보자.”

왕이삼이 지도를 슥 한 번 훑더니 말했다.

“여기서 가까운 문파는 대략 세 군데다.”

“어디입니까?”

“무당파, 철장방, 제갈세가.”

“그럼 세 군데 중 한 곳을 행선지로 정해야겠군요. 무당파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무당파가 있는 무당산은 지도에서 동북 방향이었다.

소림사와 함께 무림의 양대산맥인 무당파.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대표적인 명문정파다.

그러나 유소운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무당파는 제외하자.”

“왜입니까?”

“무당파는 무림맹과 척을 지고 관과 손을 잡았다. 우리가 방문해도 반기지 않을 거다.”

“그렇군요.”

“게다가 무당산은 장강삼협 못지않게 험준하지. 무당산을 오를 바에는 차라리 돌아가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셈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철장방은 어떤 곳입니까?”

“철장방은 잘 모르겠군. 실전 무공으로 소문이 난 곳인데 유명한 고수가 없어서 무림맹도 정보가 적다.”

유소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왕이삼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철장방은 내가 잘 안다. 부방주랑 술 대작을 한 적이 있거든.”

“역시 술로 친구를 사귀셨군요.”

“아무렴! 죽마고우보다 더 절친한 사이가 술친구란 말 못 들어 봤냐?”

서백이 슬쩍 놀렸지만 왕이삼은 깨닫지 못하고 자화자찬을 했다.

그러나 철장방을 행선지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거리와 방향이었다.

“아쉽게도 철장산은 가장 멀군요.”

“그건 그렇지…….”

한껏 들떴던 왕이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철장방이 있는 철장산은 현재 일행이 있는 곳에서 가장 멀었다.

게다가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철장산이 있는 동남쪽은 소림사와는 거의 반대 방향이지 않은가?

유소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철장산으로 가면 길을 돌아가는 셈이군. 술을 못 마셔서 아쉽겠소?”

“내가 무슨 술고래냐? 그깟 술 좀 못 마셔도 아무 상관 없다!”

왕이삼이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서백과 유소운은 속으로 웃었다. 왕이삼이 물주머니에다 술을 넣고 다닌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서백이 진지한 목소리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행선지는 제갈세가로 하겠습니다.”

촉나라의 명승상 제갈량에서 유래된 제갈세가.

제갈세가는 수많은 인재들이 중원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세가의 본관은 호북의 구석에 위치한 융중에 있었다. 제갈량이 소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 융중이었기 때문이다.

무당산이 동북쪽, 철장산이 동남쪽인데 반해 융중은 두 곳의 중간인 동쪽에 위치했다. 당연히 거리도 세 곳 중에서 가장 가까웠다.

현재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

유소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좋은 선택이다. 마침 제갈세가의 일공자님도 무림맹에 계신다. 내가 수행하는 무림맹 일도 일공자님이 지시하는 거지.”

“쳇, 연줄 하나 잘 잡았군. 나도 찬성이다.”

왕이삼은 유소운의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제갈세가의 명성은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모두 찬성했으니 행선지는 정해졌다.

문제는 지도의 먹물이 번져서 융중으로 향하는 길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지도가 잘 안 보이는 게 흠이군요.”

“걱정 마라. 융중은 여기서 동쪽에 있지 않냐? 길을 좀 헤매도 해 뜨는 곳으로 쭉 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

평소 대충 넘겨짚는 왕이삼의 말이 이번에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해 뜨는 방향으로 곧장 간다.

행방을 알 수 없을 때 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

지도가 불분명한 지금은 왕이삼이 말한 방법이 최선이었다.

“왕 선배 말씀대로 하죠. 해 뜨는 방향으로 이동해서 융중으로 갑시다.”

간소한 회의를 끝낸 일행은 다시 여정에 나섰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면 융중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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