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중원 땅에 들어서다(3)
철장방의 임시 방주 천리형.
무림인으로서 그의 사고방식은 단 하나였다.
-무림에서는 실력이 최우선!
철장방도가 불청객 서백 일행을 발견했을 때.
천리형은 온화한 눈빛 뒤에 숨겨진 냉철한 시선으로 서백 일행을 살폈다.
서백 일행은 외모가 전부 딴판이라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나이 많은 순으로 하나씩 따져 봐야겠군.’
첫 번째,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
낡아빠진 박도를 애병으로 차고 있는 것을 보면 무림에 잔뼈가 굵은 도검수가 확실했다.
하지만 내공은 대단치 않아 보였다.
‘실전 경험은 많지만 일류급 고수는 아니군.’
두 번째, 키가 훌쩍 큰 청년.
얼굴이 여인처럼 새하얀 청년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냥 봐서는 평생 글만 읽은 백면서생으로 생각되지만…….
‘자세가 이상하군. 활을 쓰나?’
궁수는 활을 쏠 때 옆으로 비껴서는 자세가 몸에 익는다. 청년의 자세가 그랬다.
무림인은 활을 쓸 바에 차라리 비검술을 익힌다. 명문정파에서는 활을 쓰면 자객이나 녹림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도검이 아니라 활을 수련하다니.
청년의 정체는 확실히 수상했다.
그런데 일행의 마지막 소년은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세 번째, 약관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
자기 몸집보다 큰 대검을 등에 멘 소년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유명세가에서는 자식이 장성할 때를 위해 신체보다 큰 병장기를 수련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대검은 너무 컸다.
그밖에도 목에 두른 가죽과 토시와 각반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망자 대비용인가? 준비 정신은 칭찬해 주지, 꼬마야.’
하지만 천리형의 눈에는 과잉 대응으로 보였다.
망자 떼는 맞서 싸우지 않고 피하면 그만이다.
굳이 중무장을 하는 것은 오히려 몸이 무거워지는 역효과를 부를 터.
‘망자를 피하는 중에 길이 같아서 의기투합한 자들이군.’
그런데 소년이 대뜸 아미파와 소림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소년의 눈빛과 목소리는 무림의 두 명문정파를 얘기하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는 보잘 것 없는 삼류무사들.
하지만 천리형은 겉모습만 보고 서백 일행을 얕보지 않았다.
‘실력은 있는 꼬마였나? 하긴 망자판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겠지.’
그는 서백을 제법 실력을 갖춘 소년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신중한 천리형도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천리형은 서백이 망자 떼를 뚫고 사투를 벌이며 중원 땅에 왔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 * *
천리형이 방도 하나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 방도는 고향이 사천으로, 과거 사천에서 표국에 있을 때 아미파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지도를 살핀 방도가 천리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파의 인장이 맞습니다.”
귓속말로 말했지만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컸다. 때문에 철장방도들 모두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철장방도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제 결론은 두 가지.
서백 일행은 진짜 중요 인물들, 그게 아니면 천하의 대사기꾼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기꾼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고작 세 명이 아미파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인다고? 목숨이 열 개라도 된다는 말인가?
내심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보던 철장방도들.
이제 그들은 서백 일행을 무림맹의 중요 인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철장방이 도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
서백의 낭랑한 목소리에 철장방도들은 흠칫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사천에서 오느라 일행이 많이 지쳤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초라한 행색으로 밥을 달라고 하면 거지 취급, 잘해야 개방 사람이라고 업신여김 받는 것이 무림이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서백 일행을 무시하는 눈길로 보지 않았다.
천리형이 명령하자 방도가 음식을 갖고 왔다. 상하지 않도록 식초를 뿌려서 만든 주먹밥이었다.
“감사합니다.”
서백 일행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쳇! 명문정파가 고작 주먹밥을 내놓다니.”
“뻑뻑한 벽곡단 씹는 것보다야 백 배 낫습니다.”
왕이삼 말대로 주먹밥은 철장방쯤 되는 곳이 대접하는 음식치곤 초라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삼 일을 굶은 서백 일행은 어른 주먹보다 커다란 주먹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방도가 준 주먹밥은 모두 일곱 개라서 셋이 두 개씩 먹자 하나가 남았다.
“후배 하나 더 먹지?”
“선배님이 마저 드십시오.”
“그래도 될까?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나한테는 먹어 보란 말도 안 하는군.”
“당연하지. 서백 후배랑 네놈이 같냐?”
왕이삼은 마지막 남은 주먹밥을 유소운에게 빼앗길까 봐 얼른 입에 처넣었다.
서백은 밥알을 삼키면서 철장방도들을 살폈다.
그들은 멀찍이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주먹밥을 다 먹은 서백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철장방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후배, 어딜 가나?”
“밥을 얻어먹었으니 밥값을 해야죠.”
서백이 다가오자 철장방도들이 힐끗 쳐다봤다.
방파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있었는지 날카로운 눈빛들!
그런데 서백의 말 한 마디에 방도들의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
방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천리형을 쳐다봤다.
서백의 말이 의표를 찌른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찾는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천리형이 서백에게 물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목소리는 가시가 돋힌 듯이 날카로웠다.
“덫에 사람이 걸렸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덫?”
“네. 이빨이 맞물린 덫을 봤습니다.”
“그럼 빈 덫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아미파 인장을 알아봤던 중년인 방도가 끼어들며 말했다.
“나 참! 빈 덫을 보고 사람이 걸렸다고 한 거냐? 이 근처는 멧돼지가 자주 나온다. 멧돼지가 덫에 걸렸다가 운 좋게 발을 빼내고 도망친 거겠지.”
그 말에 다른 방도들도 서로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소림사와 아미파에 연줄이 있다고 스스로 명문정파인 줄 착각하지 말라는 눈빛들!
그러나 서백은 그들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멧돼지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 빈 덫에 무슨 증거가…….”
“덫 이빨에 찢어진 옷감 조각이 걸려 있었습니다.”
“……!”
서백을 비웃던 방도들이 이번 말에는 깜짝 놀랐다.
천리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디서 봤지?”
“여기서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달리면 나오는 곳입니다.”
서백은 천리형에게 일행이 온 방향을 역으로 가르쳐 줬다.
서백이 가리킨 방향을 보고 중년인이 말했다.
“놈들이 도주했을 경로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그렇군.”
“덫에 걸렸으니 얼마 못 갔을 겁니다. 당장 추격하면 한 시진 안에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서백이 중년인의 말을 반박했다.
“아닙니다. 덫을 풀고 도주한 지 최소 하루가 지났을 겁니다.”
“뭐라고? 그걸 어떻게 아냐?”
“옷감 조각이 물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물기? 비에 젖은 것 아니냐?”
“어젯밤에 이 근방에는 비가 오지 않았죠. 비가 아니라 새벽이슬에 젖었다는 뜻입니다.”
“…….”
중년인이 입을 다물자 천리형이 말했다.
“적어도 반나절 이전에 도주했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역시 차기 방주라서 이해가 빠르군.’
그러나 여유롭던 천리형도 서백의 다음 말에는 경악하고 말았다.
“도주하는 자들은 최소 두 명에서 세 명이군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그냥 추리해 봤을 뿐입니다. 덫에 걸린 자는 숲길을 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자일 겁니다. 반면 덫을 해체하고 도주 계획을 짠 자는 숲을 잘 알고 신중한 자겠죠.”
“계속하시게.”
“그런데 덫에 걸린 옷감이 제법 값이 나가는 비단천이었습니다. 무림인이 아니거나 신분이 높은 자라는 뜻이죠. 그럴 경우 하인이 있을 겁니다. 신중한 자, 그렇지 못한 자, 하인. 즉 당신들이 찾는 자들은 세 명쯤 될 겁니다.”
“…….”
천리형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반대로 뒤에 있는 방도들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철장방의 비밀을 서백이 속속들이 밝혀냈다는 증거!
서백의 추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백은 자신이 추리한 것을 하나씩 짚어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먹은 주먹밥이 밥알이 식지 않았습니다. 서둘러서 식사를 준비하셨나 봅니다.”
“무림에 명성이 높은 철장방치곤 추격대 인원이 얼마 안 되는군요.”
“천막은 빨리 접을 수 있도록 임시로 쳐 놓았고 모닥불조차 피우지 않았군요. 잠시 쉬다가 당장 떠날 생각 아닙니까?”
“즉 철장방은 급하게 추격대를 꾸렸다는 뜻이죠.”
이윽고 서백의 긴 추리가 끝나자 방도들은 딱 벌린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자기 몸보다 큰 대검을 메고 다니는 소년.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꼬마로 여겼는데, 실은 누구보다 두뇌명석한 모사꾼이 아닌가?
촉나라의 명재상 제갈량이 되살아난다면 눈앞의 소년과 같을 터!
천리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백을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무시 못 할 꼬마로군.’
잠시 침음하던 천리형이 입을 열었다.
“내 아버님이자 철장방의 전대 방주님께서 망자 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부방주도 그때 함께 싸우다 숨을 거두셨지.”
서백이 철장방의 현 상황을 추리하자 천리형도 숨기고 있던 사정을 밝히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왕이삼이 끼어들었다.
“내가 뭐랬냐? 부방주랑 아는 사이인데 안 보이니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그러나 방도들의 싸늘한 눈빛을 깨달은 왕이삼은 그제야 말실수를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철장방이 혼란한 틈을 타서 신물과 비급을 훔친 자가 나왔지. 바로 부방주의 아들이다.”
“…….”
이어지는 천리형의 말에 왕이삼은 더욱 식겁했다.
자신이 부방주의 연줄이 있다고 떠들었는데 그 아들이 철장방을 배신했으니 일이 공교롭게 된 셈이 아닌가?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왕이삼은 고개를 돌리고 방도들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했다.
“그자는 신물과 비급을 들고 다른 문파로 가서 도움을 청할 속셈이다. 소림사나 아미파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지.”
“그랬군요.”
“덫에 걸린 흔적을 찾았으니 추격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 점 감사한다.”
“별말씀을. 대접해 주신 음식 잘 먹었습니다.”
서백은 은근슬쩍 밥값을 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얘기가 끝나고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천리형이 재차 말을 걸었다.
“소림사로 간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배신자들 도주 경로에 소림사도 있다.”
“그런데요?”
“급하게 철장산을 떠나느라 추격대 인원이 열두 명밖에 없다.”
“그렇군요.”
그쯤 되면 천리형이 어떤 제안을 하는 건지 알아차릴 법도 하건만 서백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스승이 말했던 충고 때문이었다.
-거래를 할 때는 최대한 상대의 애를 태워라.
-안달난 상대는 더 큰 보상을 제시할 것이다.
“중원 땅은 넓다. 협곡에서 배신자들을 찾는 것은 짚더미에 떨어진 바늘 줍기보다 어려울 터.”
“다다익선(多多益善). 추격전에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드디어 서백이 맞장구를 치자 천리형은 본론을 말했다.
“세 분께 부탁드리오. 철장방의 배신자들을 잡는 데 도움을 주지 않겠소?”
천리형은 존대를 하는 것도 모자라 서백 일행을 향해 포권지례까지 했다.
이는 명문정파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무림 방파의 임시 방주가 소속도 없는 무림인들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 것!
서백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같은 무림인이니 마땅히 도와드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