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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28화 (28/123)

28화 유령선(5)

채도를 희생양으로 삼은 모혁광의 흉계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당했군.’

서백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중원은 흉계를 꾸며서 서로 속고 속이는 곳이다.

스승이 그렇게 강조하던 말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심복을 죽일 정도로 극악한 자를 처음 만난 것일 뿐.

이제 강호에서 모혁광보다 더욱 악한 자들을 수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실수는 다시 범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이번 일은 독이 아니라 쓴 약이 될 터.

망자들이 서백을 향해 몰려왔다.

두 배를 연결한 갈고리 밧줄과 닻 사슬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에 망자들이 쉽게 올라타지 못했다.

피 냄새에 눈이 벌게진 망자들은 마구잡이로 몸을 던지다가 어두운 물속으로 속속 떨어졌다.

하지만 워낙 많은 망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밧줄 위가 망자로 빽빽해졌다. 망자들은 동료의 몸을 발판으로 삼아서 서백에게 달려들었다.

서백은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검이 한 차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망자들의 팔다리가 후두둑 떨어졌다.

바로 그때, 굉음이 터지면서 채주선이 높이 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쿠우웅.

배가 암초밭에 들어선 것이다. 채주선을 요동치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바위뿌리가 서 있는 암초밭!

꾸웨에엑.

사슬이 위아래로 크게 출렁이자 망자들이 후두둑 물속으로 떨어졌다. 서백은 다리를 빙글 돌려서 밧줄에 발목을 감고 매달렸다.

그런데 공중에 높이 뜬 망자가 하필 서백 바로 위로 떨어졌다.

망자가 서백을 덮치면서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턱주가리를 크게 벌렸다.

쩌억.

‘목을 물리면 끝장이다.’

서백은 최대한 목을 움츠렸다. 망자가 턱을 내밀고 이빨을 부딪치며 서백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딱딱딱… 와직.

다행이 망자의 이빨은 목 위에 덧댄 가죽에 박혔다. 망자의 턱힘은 사냥꾼의 덫처럼 강했지만 서백이 공들여서 무두질한 가죽을 단번에 꿰뚫기는 역부족이었다.

서백이 북을 두드리듯이 두 주먹으로 망자의 배를 연타했다.

텅텅텅텅.

그러나 망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죽은 시체이니 서백의 권격에 근골이 산산조각 나도 끌어안은 두 팔을 풀지 않는 것이었다.

중원 무림의 숱한 고수가 무공을 모르는 망자, 정확히는 혈귀한테 당한 것이 그 때문이다. 어떤 외가무공이나 내가무공도 통하지 않는 시체의 몸.

망자는 산 사람을 한번 물거나 붙잡으면 턱뼈나 손가락이 잘라지지 않는 이상 풀지 않는다.

때문에 망자를 상대할 때는 도검으로 베면서 절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배가 요동치는 바람에 공중에서 망자가 떨어졌으니…….

질긴 가죽을 물어뜯던 망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이번에는 서백의 얼굴을 노리고 턱을 내밀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개!”

서백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순간 망자의 목을 뚫고 화살촉이 튀어나왔다.

꾸웩……!

갑판으로 올라온 유소운이 활을 쏴서 망자의 목을 관통한 것이었다.

그 옆에는 왕이삼이 주위 망자들을 향해 미친 듯이 박도를 휘두르며 유소운을 호위하고 있었다.

화살촉이 혈선충의 심맥을 관통하자 망자의 두 팔이 축 늘어졌다. 서백은 몸을 회전시켜서 망자를 떨군 뒤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접근하는 망자들을 도륙했다.

‘동료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일검으로 망자들 대여섯 구를 도륙한 서백은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모혁광을 향해 떨어졌다.

휙.

서백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사슬 위에 착지했다. 바로 배 쪽으로 향하는 사슬 위였다.

즉 모혁광은 이제 서백을 처치하지 못하는 이상 배로 복귀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모혁광의 눈썹이 활처럼 휘어졌다.

등 뒤에는 망자들, 눈앞에는 무림의 고수.

어느 쪽이든 도망칠 곳이 없는 외나무다리.

수로채는 무공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과 짐을 옮기며 장사를 하는 일이다.

평생 수로채에서 뱃일을 한 모혁광. 그는 이득 챙기는 것과 두뇌 회전이 빨랐다.

“역시 대단하군. 네 무공 수위는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모혁광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서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궤짝에는 장강삼협수로채의 신물과 은괴가 가득 들어 있다. 우리 둘이 나눠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다. 어떠냐? 저놈들을 버리고 나와 손잡는 것이!”

그러나 서백은 단칼에 거절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뭐라고? 왜?”

“명예를 잃고 평생 놀고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명예? 명예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모혁광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백을 쳐다봤다. 은괴 반 궤짝을 거절한다는 말이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좋다. 그럼 나랑 손잡을 필요는 없으니 이대로 배를 타고 떠나자. 그럼 은괴를 나눠주겠…….”

“싫습니다.”

“은괴가 싫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당신의 제안이 싫다는 말입니다.”

스윽. 서백이 검을 앞으로 뻗어 모혁광을 겨누며 말했다.

“죽어 마땅한 자의 말은 귀에 안 들어와서 말입니다.”

“……!”

“하나 더. 당신은 지금 여기서 죽습니다. 평생 놀고먹을 일은 영영 없을 테니 은괴도 필요 없을 겁니다.”

그때 채도들이 모혁광을 도우려고 서백을 향해 손도끼들을 투척했다.

그러나 서백은 고개도 안 돌리고 검만 휘둘러서 모조리 쳐 내 버렸다.

까까까깡.

십여 개의 손도끼들은 몽땅 어두운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수로채의 도끼 다루는 솜씨는 명문정파 못지않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헛소문이었군요.”

“…….”

모혁광이 말을 못 잇고 있을 때, 이번에는 서백이 보지 못하는 사각에서 채도 하나가 창을 들어 서백의 등을 겨냥했다.

그러나 창을 던지려는 찰나, 쉬익 하는 파공음이 들리더니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 한 발이 채도의 양미간 사이를 꿰뚫었다.

퍽. 끄윽…….

채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창을 놓치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화살을 쏜 것은 유소운이었다.

그는 왕이삼과 함께 주위 망자들과 싸우면서도 멀리 있는 서백의 호위를 등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백은 등 뒤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실은 일부러 유소운에게 처리를 맡겨 본 것이었다.

믿음직한 동료의 존재는 적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뜨릴 테니까.

서백의 선택이 옳았다.

“흉계라는 게 고작 이게 답니까?”

“…….”

모혁광은 제대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채도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모두 동시에 창을 던져라. 빨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창은 날아오지 않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일발필살을 자랑하는 궁수가 서백을 호위하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더 이상 모혁광을 위해 나서는 채도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채도들은 하나둘 난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갑판을 부순 닻을 빼내기 위해 다들 덤벼들었다.

부채주, 아니, 이제 채주가 될 모혁광을 버리고 자기들끼리 도망치리고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서백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보셨습니까? 돈을 약속하고 손잡은 자들이 어떠한지 말입니다.”

“저놈들이…….”

모혁광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뒈져라!”

모혁광이 등 뒤의 허리춤에 꽂아둔 손도끼 두 개를 뽑아들고 서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뜻밖에도 모혁광의 운신법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얼어붙은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사슬 위로 이동했다. 평생 뱃일을 했으니 밧줄과 사슬을 타는 것쯤은 수로채 사람들에게 식은 죽 먹기.

두 개의 손도끼도 무시할 게 아니었다.

길이가 짧지만 근골을 부수는 살상력은 그 어떤 도검과도 맞먹을 정도.

서백은 검을 비스듬히 회전하며 모혁광의 손도끼를 막았다.

까앙.

대검과 묵직한 손도끼가 부딪치자 어두운 물 위에 불꽃이 튀었다.

그때 모혁광이 뒤로 몸을 회전하며 반대편 손에 쥔 손도끼를 서백을 향해 던졌다.

살상력에 더한 손도끼의 또 다른 장점.

바로 암기처럼 투척이 가능하다는 것!

손도끼가 서백의 이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수로채 사람들에게 환도가 병장기라면, 밧줄을 자르고 나무를 쪼개는 손도끼는 손발과 같았다.

두 개의 손도끼를 수족처럼 부리는 모혁광이 마지막으로 숨겨 둔 비장의 일초.

손도끼가 서백의 이마를 두쪽으로 갈라 버렸다.

까앙.

모혁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뒈졌구나!”

그러나 그의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방금 귓가에 들린 소리, 까앙.

손도끼가 서백의 이마를 쪼갰다면 뼈가 부서지는 쩌억 소리가 들려야 정상일 터인데…….

방금 그건 검으로 손도끼를 쳐 낼 때 나는 소리가 아닌가?

모혁광이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눈앞에서 무언가가 빙빙 회전하며 날아왔다.

“으악!”

모혁광은 급히 몸을 비틀며 피했다.

날아온 것은 방금 던졌던 자신의 손도끼였다. 그대로 있었다면 되돌아온 손도끼를 맞고 얼굴이 피떡이 되었으리라.

“그놈은 대체 어디에…….”

“여깁니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모혁광이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사라졌던 서백이 공중 높은 곳에서 떨어지며 검을 휘둘렀다.

휘이이잉.

질풍이 모혁광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간 찰나, 그의 몸에 두 줄의 검광이 비스듬히 박혔다.

파팟.

석가검법 제이로(第二路) 거두망명월(擧頭望明月).

처음에 모혁광은 가슴이 뜨끔할 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몰라서 물으십니까? 죽어 마땅한 자를 징벌했습니다.”

“내가… 내가 죽는다고? 날 죽일 셈이냐……?”

“아닙니다.”

서백은 검을 아래로 내린 뒤 모혁광은 이제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미 죽었는데 뭘 더 죽인단 말입니까?”

“……!”

순간 모혁광의 가슴이 네 갈래로 벌어지며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아악.

모혁광은 한참을 피분수를 뿜어내더니 통나무처럼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서백은 얼음처럼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주제에 편히 눕지도 못하는군.”

서백은 무심히 검을 들어 모혁광의 몸을 툭 쳤다.

간신히 서 있던 모혁광의 시체가 균형을 잃고 기울다가 물속으로 떨어졌다.

풍덩.

이미 목숨줄이 끊어진 그는 헤엄 한 번 쳐 보지 못하고 그대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 채주선이 또 한 번 위로 떠오르며 요동쳤다.

쿠우우웅.

이제 어두운 물밑으로 직접 보일 만큼 암초밭이 거대했다. 문제는 채주선의 진로가 암초밭을 정통으로 지나간다는 것.

“암초밭이다! 피해야 된다!”

배에 탄 수십 명의 채도들이 우왕좌왕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서백이 던진 닻이 갑판을 부수었는데, 채주선의 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점점 깊숙이 박히는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채도들이 탄 배가 암초에 부딪쳤다.

콰아아앙.

배는 채주선에 끌려가고 있는 만큼 위로 튕겨 오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암초를 훑고 지나갔다. 밑창이 생선배 가르듯이 순식간에 박살나며 세찬 물살이 안으로 들어왔다.

촤아아아.

“배가 침몰한다!”

시커먼 물이 배를 점점 집어삼켰다.

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닻 사슬을 끊으려는 채도, 배를 포기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채도, 넋이 나가서 멍하니 서 있는 채도…….

서백은 채도들한테서 몸을 돌렸다. 서백이 관심 있는 것은 오직 동료들뿐이었다.

유소운과 왕이삼은 주위 망자들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 중이었다.

그나마 채주선의 갑판이 넓어서 이리저리 도망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좁은 곳에서 포위되었다면 벌써 망자들에게 물어뜯기고도 남았을 것.

서백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망자들을 베어 넘겼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서백의 말을 듣고 왕이삼이 망나니처럼 박도를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었다.

명문정파의 고수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하급 병장기 박도. 그러나 망자들 상대로 마구잡이로 싸우기에는 그만한 병장기가 없었다.

서백과 왕이삼이 양쪽에서 병장기를 휘두르자 길이 뚫렸다.

“빨리!”

유소운, 왕이삼, 양소소가 망자들 틈을 뚫고 달렸다.

서백은 뒤를 돌아보며 상황을 살폈다. 마침 가라앉는 배의 잔해가 무너져 있던 보를 지나가고 있었다.

‘채주선은 망자가 얼마나 더 나올지 알 수 없다. 양소소의 배는 이미 침몰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목숨을 건 도박.

일행이 채주선의 난간에 도착했을 때, 서백이 닻 사슬 위를 달리며 소리쳤다.

“줄!”

서백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슬 위를 달렸다.

타타타탓.

유소운의 행동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사슬 위를 달리는 서백 옆으로 유소운이 투척한 줄이 날아왔다. 서백은 발을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줄을 낚아챘다.

이제 달릴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슬이 물속으로 계속 잠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휙.

서백은 발이 물을 밟아서 축축해질 때까지 달리다가 있는 힘을 다해서 공중으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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