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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27화 (27/123)

27화 유령선(4)

암습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왕이삼은 유소운의 활솜씨를 못 믿겠는지 서백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망자가 둘인데 그걸 한꺼번에 처리하겠다고?

서백은 대답 대신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닥치고 지켜보죠.

이어서 서백은 양손의 검지를 세운 뒤 좌우로 멀리 벌렸다가 다시 가운데로 모으기를 반복했다. 두 망자가 복도를 왕복하는 모습을 표시한 것이었다.

유소운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서 망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망자는 서로를 향해 복도 중앙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유소운은 몸을 숨긴 뒤 망자들이 걷는 속도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일, 이, 삼, 사…….

두 망자가 복도 중간에서 만나 막 몸을 돌리는 찰나, 유소운이 몸을 내민 뒤 활시위를 놓았다.

피잉. 퍽.

소리 없이 날아간 화살이 반대편 복도를 향해 몸을 돌린 망자의 목 뒤에 꽂혔다.

양쪽 귓볼에 가상의 선을 그으면 목의 중심선과 십(十) 자 모양으로 겹친다. 바로 혈선충의 심맥이 자리하는 곳.

화살촉이 정확히 혈선충의 심맥을 관통해서 찢어발겼다.

켁… 털퍽.

망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통나무처럼 스르르 쓰러졌다.

흔들리는 배의 밑창, 어른거리는 불빛.

그런 악조건 하에서 유소운은 일발필살의 활솜씨를 선보인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동료 망자가 쓰러지자 이쪽으로 걸어오던 망자가 기척을 느끼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유소운은 방금 활을 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오른팔만 돌려 화살통에서 새 화살을 꺼냈다. 그리고 화살을 시위에 메긴 다음 두 번째 화살을 발사했다.

그 모든 동작을 눈 깜짝할 사이에 끝냈다.

피잉. 퍽.

날아간 화살이 고개를 돌린 망자의 뒷목에 꽂혔다. 망자는 방금 동료처럼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꾸웩… 털퍽.

유소운이 일행을 보며 오른손 손날로 목을 두 번 그었다. 망자 둘을 제거했다는 뜻.

눈앞에서 유소운의 솜씨를 본 왕이삼은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은 진짜다!’

유소운이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쏘는 것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상대가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화살에 꿰인 다음이리라.

명문정파의 이름난 고수가 아니라면 그의 화살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뜻!

절정의 활 실력을 선보인 유소운.

그런데 서백은 무표정한 얼굴로 유소운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 정도 실력은 당연하다는 표정.

무림에 잔뼈가 굵은 왕이삼도 서백의 무심한 반응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망자를 처치하자 일행은 잠시 숨을 쉰 뒤 다시 호흡을 참았다. 그리고 쓰러진 망자들을 넘고 이동을 재개했다.

바로 그때. 서백은 발바닥에서 수상쩍은 진동을 감지했다.

구우우웅.

‘뭐지?’

배가 암초에 부딪쳤다면 더 큰 충격이 느껴지면서 밑창이 요동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느껴진 진동은 달랐다. 배가 무언가에 걸린 듯이 기우뚱하는 느낌.

‘이건…….’

서백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망자 떼를 돌파하고 나가겠습니다.”

“뭐라고? 후배, 갑자기 왜 그러냐?”

“지금 진동 못 느끼셨습니까?”

“느꼈다. 배가 뭔가에 걸린 것 같은데. 바닥도 조금 기울었고.”

왕이삼이 고개를 갸웃거린 반면, 유소운은 서백이 짐작하는 것과 똑같이 말을 했다.

“배에서 채주선에 건 갈고리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배를 채주선에 가까이 대려는 것이죠.”

“……!”

그제야 일행도 서백의 말뜻을 깨달았다.

“모혁광 일당이 밧줄을 타고 도망치려는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돌려 복도를 달렸다. 일행도 서백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보초를 서는 망자 둘이 나왔다.

서백은 이제 들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배 밑창의 좁은 복도에서 휘두르자 대검이 벽면을 가르며 망자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혈선충의 심맥을 제대로 파괴했는지 살필 여유도 없었다.

한 칼에 망자 두 구의 목을 벤 서백은 그대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갑판에는 백여 구의 망자들이 썩어서 손상된 성대로 뱃노래를 부르며 생전에 하던 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일대채주 양곡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망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망자들이 그 명령을 알아듣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서백이 갑판에 올라왔지만 주위 망자들은 산 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숨을 참고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

서백은 갈고리가 걸린 갑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끼익끼익.

난간에 깊숙이 박힌 갈고리 발톱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밧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짐작이 맞았군.’

모혁광 일당이 쉽게 건널 수 있도록 밧줄을 팽팽히 당겨서 배를 채주선에 바싹 접근시킨 것이리라.

휙. 타타타탓.

허공에 몸을 날린 서백은 갑판에 늘어서 있는 망자들의 머리를 징검다리 삼아서 밟고 달렸다. 망자들은 고개가 휙휙 젖혀졌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멀뚱히 주위를 돌아볼 뿐이었다.

예상대로였다. 부채주 모혁광과 채도들이 밧줄을 타며 큼지막한 궤짝을 옮기고 있었다.

모혁광이 고개를 돌리다가 서백을 발견하고 말했다.

“들켰다. 밧줄을 끊어라.”

“존명.”

채도 둘이 밧줄에 다리를 얽어매서 균형을 잡은 뒤 환도로 밧줄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갈고리 밧줄이 몇 겹을 꼬은 거라 칼질 한 번에 끊어지지 않는 것이 서백한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밧줄이 끊어지면 배와 채주선은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

서백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판에 놓여 있는 닻을 발견했다. 서백이 닻을 향해 몸을 날리자 망자 몇 구가 두 팔을 휘저으며 달려들었다.

키에에엑.

서백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서 망자들을 베었다. 혈선충의 심맥을 찾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망자 몇 구가 난도질당해서 바닥을 뒹굴자 공백이 생겼다. 서백은 검을 등에 멘 뒤 두 손으로 갑판에 있는 닻을 잡았다.

웅장한 채주선에 걸맞게 닻 역시 거대했다.

산공독에 당해서 석가심결을 시전할 수 없는 상태.

서백은 순전히 외공만으로, 즉 근육의 힘만으로 닻을 들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은 실핏줄이 터지는 가운데, 서백은 닻을 번쩍 들어서 한 바퀴 휘두른 다음 난간 너머로 투척했다.

부우우웅. 콰차창.

닻이 모혁광 일당의 위를 훌쩍 넘어서 배로 날아간 뒤 갑판을 통째로 부수면서 처박혔다.

경악할 광경에 모혁광이 욕설을 내뱉으며 외쳤다.

“저 미친 놈… 닻을 물속으로 던져라!”

“존명!”

배에 있던 채도들이 닻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채주선을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는 닻은 크기도 클 뿐더러 무게가 엄청났다.

채도들은 갑판에 박힌 닻을 빼내기는커녕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낑낑거렸다.

“뭣들 하느냐? 빨리 떼어 내지 않고!”

“채주선의 속도가 빨라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닻이 너무 무거워서…….”

“어린 애가 집어던진 닻이 무겁다고? 쓸모없는 놈들!”

“…….”

채도들은 말문이 막혔다.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들지 못하는 닻을 약관도 안 된 소년이 어떻게 집어던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닻이 무겁기도 하지만 채주선의 속도도 문제였다.

거대한 채주선이 물살을 타기 시작하자 갈고리 밧줄과 닻의 사슬이 팽팽히 당겨져서 더욱 풀기 힘들어졌다.

그 바람에 배는 채주선에게 끌려서 물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배가 뒤집어져서 좌초하고 맙니다!”

“닻의 사슬을 끊어라!”

“어떻게 말입니까…….”

“도끼는 뒀다가 뭐 하냐? 도끼로 내려쳐라!”

채도들은 도끼를 들고 닻에 연결된 사슬을 내려쳤다. 깡깡깡. 하지만 강철로 주조한 굵직한 쇠사슬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오히려 도끼가 이가 빠졌다.

“빌어먹을!”

모혁광은 재빨리 잔머리를 굴렸다.

갑판에 박힌 닻을 빼지도 못하고 사슬을 절단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아예 사슬이 연결된 채주선의 난간 부분을 부숴 버리면 될 터.

모혁광은 밧줄을 밟고 일어선 뒤 채주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인영이 날아와 모혁광 앞의 밧줄을 밟고 섰다.

서백이었다.

모혁광이 서백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네놈이 수장이었군. 약관도 안 된 어린놈이 재주 하나는 제법 쓸 만하구나.”

“재주는 당신 같은 자들이 부리는 것을 말하는 거죠.”

“뭐라고?”

“수로채의 신물을 훔치다가 들켜서 일대채주를 죽이고 도망친 뒤 그 딸을 이대채주로 모시고 눈속임을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걸 두고 잔재주라고 부릅니다.”

“그걸 어떻게…….”

“망자판이 된 채주선이 장강을 떠돌자 신물을 빼낼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미끼로 쓸 무림인들이 생기니까 그동안 꾸민 계획을 실행한 게 아닙니까?”

“네놈…….”

서백이 모든 진상을 폭로하자 모혁광의 얼굴이 구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갑자기 모혁광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오냐, 채주의 딸년도 네놈들도 모두 미끼였다.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습니다.”

스윽. 서백이 등에 멘 검을 잡으며 말했다.

“목을 베는 건 제 일이니까요.”

“흐흐흐, 산공독을 들이마셔서 내공도 못 쓰는 몸으로 나를 대적할 수 있을까?”

“대적? 그건 실력이 비슷한 둘이 싸울 때 하는 말이죠. 나이도 어리고 외공밖에 못 쓰지만 당신 같은 일개 수로채의 잔당은 별것 아닙니다.”

“…….”

모혁광은 눈썹을 찡그렸다. 서백의 목소리에서 허세가 아니라 자신감이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장강삼협수로채에 들어오기 전, 한 유명세가의 도검수로 일하면서 숱한 고수들을 목격했다.

명문정파의 진짜 고수들은 나이와 상관이 없었다.

나이 어린 동자가 엄청난 내공을 지녔는가 하면, 관짝에 들어갈 노인이 장대한 근골과 외공을 지닌 경우도 있었다.

명문정파의 절정 고수는 손가락 하나로 수십 명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런 고수와 무공으로 정면 상대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일.

지금 서백에게서 명문정파의 고수에게만 있는 기백이 느껴졌다.

아니, 생전 처음 느끼는 엄청난 기백이…….

하지만 모혁광은 씨익 웃었다.

배 위에서 뱃사람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모혁광은 마음속으로 작전을 바꾼 뒤 외쳤다.

“궤짝은 놔두고 저놈부터 죽여라!”

“존명!”

채도 하나가 동료에게 궤짝을 맡긴 뒤 밧줄을 밟고 일어섰다. 그가 환도를 치켜들며 서백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순간 서백이 채도가 달려드는 선상으로 일직선이 되게 검을 뻗었다.

흔들리는 밧줄 위이니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자기 발로 검을 향해 뛰어든 셈이 되자 채도는 경악했다.

그런데 채도가 검에 목이 꿰이기도 전에 입에서 시뻘건 선혈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푸흐으읍……!

채도의 가슴팍에서 날카로운 환도가 튀어나와 있었다. 모혁광이 채도의 뒤로 달려든 뒤 환도로 몸통을 찔러서 관통한 것이었다.

“와하하하, 이거나 받아라!”

모혁광이 환도를 빼며 채도의 등을 발로 찼다. 이미 숨진 채도가 서백을 향해 날아왔다.

서백은 검면으로 채도를 쳐서 옆으로 날렸다.

절명한 채도는 서백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숨진 채도가 입과 가슴에서 뿜어 낸 선혈이 서백의 전신을 흠뻑 적셨던 것이다.

채주선의 갑판에서 넋을 잃은 채 생전에 하던 일을 반복하던 망자들. 또한 서백 일행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달려들던 십여 구의 망자들.

그 망자들이 동시에 피 냄새를 맡았다.

키에에에엑!

수십여 구의 망자들이 일제히 서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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