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질풍무사-26화 (26/123)

26화 유령선(3)

서백이 유소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전에 내공진기를 모아보십시오.”

“그러지.”

유소운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한 차례 호흡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소운이 눈썹을 찡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서백처럼 숨이 멈추면서 단전으로 향하는 혈맥이 뜨끔했던 것이다.

“이건… 독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서백과 유소운의 냉정한 대화에 오히려 왕이삼이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뭐라고? 중독되었다는 거냐?”

“네.”

“그럼 나는 왜 멀쩡하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왕이삼이 유소운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말했다. 서백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배님은 외공만 쓰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뭐?”

“저와 유선배가 중독된 독은 산공독입니다.”

“……!”

내공심결을 수련하지 않은 왕이삼도 무림인인 만큼 산공독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산공독이 중독되면 내공을 못 쓰는 것 아니냐?”

“누가 아니랍니까.”

문제는 어떻게 중독됐냐는 것.

서백은 주위를 재빨리 살피며 해답을 찾았다.

그런데 해답은 의외로 빨리 나왔다. 양소소가 흠칫 놀라며 말했던 것이다.

“설마 산공독이 퍼질 줄은…….”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장강삼협수로채의 채주선에는 산공독이 설치되어 있소.”

“……!”

양소소의 말에 서백 일행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수로채도 도검과 무공을 수련하지만 정파나 사파의 고수들은 버거운 게 사실이오. 만약 그들이 배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살겁을 벌인다면…….”

“도검만으로 이기기 어려우니 내공심결을 못 쓰도록 산공독을 설치한 것입니까?”

“그렇소. 채주선에 설치된 것은 신선폐요.”

신선폐(神仙廢).

내공심결을 시전하면 단전에 모인 진기가 급격히 해체되는 산공독의 일종. 아니, 산공독 중에서 가장 효과가 뛰어나기로 악명 높은 독!

“기관장치를 작동시키면 천정과 벽의 틈에 매달아둔 신선폐 주머니를 침이 찔러서 가루가 공기 중에 퍼지게 되어 있소.”

“꼼꼼하게 잘도 만들었군요.”

서백이 그답지 않게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산공독이 퍼졌을 리 없소! 기관장치를 만지지 않는 이상 절대 주머니에서 새어나오지 않으니까. 기관장치는 기관실에 있는데 채주와 부채주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곳에…….”

순간 양소소는 흠칫하며 말을 멈췄다.

자신의 말 속에 산공독을 퍼뜨린 자가 누구인지 해답이 들어 있지 않은가?

서백이 그 사실을 재확인하며 말했다.

“우리는 신물을 찾으러 채주실로 잠입하고, 부채주와 채도 두 명은 고장난 키를 확인하러 기관실로 갔습니다. 산공독 장치를 작동시킨 자는 부채주가 틀림없군요.”

“정파 사파의 고수가 무서워서 산공독을 설치했다고? 수로채가 독을 뿌리고 강도로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군!”

왕이삼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자 서백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바로 냉랭한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이제 내공을 쓰지 않고 망자 떼를 뚫어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이삼이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말했다.

“난 내공 따위 모르지만 박도 한 자루면 충분하다.”

유소운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내공을 못 쓰기 때문에 외공만으로 망자 구역에 잠입했던 적이.”

“뭐라? 탈출하는 것도 모자라 잠입을 했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내 말이. 그래도 그때 사람들을 지휘하는 분이 있어서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이 든든했지.”

유소운이 옛일을 얘기하다가 슬쩍 서백을 보며 말했다.

“지금도 그때처럼 전혀 걱정이 안 되는군. 안 그런가?”

“그래야죠.”

서백 일행과 달리 양소소는 불안한 눈치였다.

무림인들을 믿었던 게 내공 때문이었는데, 산공독 탓에 내공을 못 쓰게 되니 못 미더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정말 괜찮겠소?”

“상관없습니다. 무림인이 외공만 쓴다고 해서 반쪽짜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드리죠.”

“미안하오. 빨리 기관실로 가서 부채주를 만나야겠소. 왜 내 허락 없이 산공독 장치를 작동시켰는지 물은 뒤에…….”

“들을 필요 없습니다.”

“뭐라고? 왜?”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서백은 차갑게 냉소하며 대답했다.

“부채주 모혁광이란 자가 우리를 배신한 겁니다.”

“그럴 리가 없소! 무림인들을 끌어들이자는 얘기도 부채주가 먼저 제안한 것이오. 그런 그가 당신들을 배신한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요!”

“…….”

양소소의 말에 서백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소만…….”

“그럼 더욱 기관실로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는 당신도 배신했습니다.”

“……!”

“처음부터 우리를 끌어들인 게 그래서였군요. 당신이 우리와 조를 짜서 채주실로 가는 동안 부채주는 심복인 채도들과 따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요.”

“부채주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오.”

“세상에 절대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배신당한 순진한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죠.”

“말도 안 돼…….”

양소소가 충격에 빠져서 말을 흐리고 있을 때, 서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구해준 보답으로 수로채 일을 돕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서백은 스승이 틈만 나면 꺼내던 말이 떠올랐다.

-은원을 빚진 채로 놔두면 무림인들이 너를 업신여길 것이다.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되갚아라.

‘그러겠습니다, 스승님.’

서백 일행은 부채주 모혁광이 놓은 덫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진짜 사냥꾼이 어느 쪽인지 알려 줄 시간이 되었다.

* * *

한편. 서백 일행이 채주실에 잠입하고 있을 때, 모혁광과 채도 두 명은 기관실에 도착했다.

“준비해라.”

모혁광이 말하자 셋은 품에서 검은 천을 꺼낸 다음 얼굴에 뒤집어썼다. 얼굴 아래쪽 절반을 가리는 검은 천은 일종의 복면으로 코와 입을 막아 주는 역할을 했다.

검은 누에인 흑잠(黑蠶)에서 나온 실로 짠 복면은 틈새가 사람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촘촘했다. 때문에 독과 물은 통과시키지 않는 반면 공기는 통했다.

복면 착용이 끝나자 모혁광은 채주와 부채주만 아는 모종의 장치를 작동시켰다.

구우우웅. 벽면이 진동하며 기계 장치가 작동됐다.

이제 채주선 안은 무색무취의 산공독 가루가 공기 중에 자욱하게 퍼져 나가리라. 산공독에 중독된 무림인들은 내공심결을 쓰지 못할 터.

내공을 못 쓰는 무림인은 반쪽짜리나 마찬가지!

“가자.”

모든 준비가 끝나자 모혁광은 채도들과 함께 기관실을 나온 뒤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배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선창이었다.

선창은 갑판 밑에 여러 군데가 있었다. 그중에서 그들이 간 곳은 식재료를 보관하는 선창, 즉 음식 창고였다.

선창에는 식재료를 담은 궤짝이 수없이 쌓여 있었다.

식재료가 썩었는지 궤짝들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망자가 음식 대신 사람 피만 먹는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았다.

모혁광은 궤짝들을 유심히 살피다가 찾는 것을 발견했다. 칼로 정(正) 자 금을 새긴 궤짝이었다.

“이거다. 열어라.”

채주들이 궤짝을 따로 빼낸 뒤 쇳대로 못을 빼내고 뚜껑을 열었다. 궤짝 안을 본 모혁광과 채주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찾았습니다!”

“와하하하, 흠집 하나 안 나고 그대로 있었군!”

채도가 궤짝 위에 횃불을 들이밀자 눈이 부실 만큼 빛이 뿜어져 나왔다. 궤짝 안에 벽돌만 한 은괴가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은괴 위에는 장강삼협수로채의 신물인 청룡환이 놓여 있었다.

모혁광은 처음부터 청룡환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다. 물건을 찾았으니 탈출하자.”

“채주선은 버리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신물도 내 손에 들어왔겠다, 은괴도 몽땅 내 것이 되었겠다, 이 정도 배는 얼마든지 다시 살 수 있다.”

“그렇군요. 감축드립니다, 채주님!”

“장강삼협수로채는 이제 채주님의 것입니다!”

채도들의 아부에 모혁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랜 세월 양곡 밑에서 고생했더니 이런 날이 오는군.”

“그럼 채주, 아니, 양소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미련한 것. 그냥 배에 남았으면 나중에 첩이나 삼으려 했는데 할 수 없지. 자기가 따라왔으니 스스로 명을 재촉한 셈. 그년은 무림인들과 함께 버리고 간다.”

“그래도 무림인들을 끌고 갔으니 미끼 역할은 한 셈이 아닙니까?”

“얘기가 그렇게 되나? 와하하하!”

모혁광과 채도들은 비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웃음을 멈춘 그들은 궤짝을 들고 선창을 나가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서백이 문을 열려는데 유소운이 단검을 건네며 말했다.

“좁은 곳에서 망자가 튀어나오면 위험하지만 난 아무래도 이걸 써야겠군.”

유소운은 혁낭에서 활을 꺼내고 활통을 허리에 찼다. 그런 다음 왕이삼을 보며 말했다.

“호위를 맡겨도 좋소?”

“당연하지. 네놈 주위에 망자가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마. 나도 그냥 박도를 쓰겠다.”

“그렇게 하십시오.”

서백은 둘의 단검을 받아 혁낭에 넣은 뒤 자신도 등에 멘 검을 내려서 손에 쥐었다.

단검은 몸을 숨겨서 은신하며 잠입할 때 쓰는 병장기.

이제 은신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망자에게 들키면 닥치는 대로 베어 버리며 탈출하는 것이 최선!

‘산공독에 당했지만 잠시 숨을 멈추는 것은 문제없다.’

문제는 석가심결이 시전 불가능하다는 것.

어두운 곳을 대낮처럼 보기는 힘들어졌으니 시야가 불투명해져서 운신에 제약이 생길지 모른다.

“그럼 방을 나가겠습니다.”

서백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금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복도 벽면에 횃불이 걸려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망자들이 생전의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들어 있던 망자들은 보름달이 뜨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횃불을 밝히고 배를 출발시킨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채주선이 장강 지류에 나타났던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었다.

서백은 고개를 내밀어 복도 양쪽을 살폈다. 망자들은 갑판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백이 손가락 세 개를 펴면서 신호하자 모두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참았다.

일행은 방에서 나와 이동을 개시했다.

서백이 선두.

그 뒤에 활을 든 유소운.

왕이삼과 양소소는 후미에서 따라오며 망자한테서 유소운을 호위.

서백은 양소소에게 말했듯이 기관실로 갈 생각이 없었다.

‘기관실에서 산공독을 작동시킨 것은 이미 도주할 준비를 끝냈다는 뜻.’

부채주 모혁광과 채도들은 이미 갑판으로 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들이 배를 옮겨 타기 전에 따라잡는 게 급선무였다.

서백은 양소소에게 말은 안 했지만 금고를 훔치다가 양곡과 칼부림을 벌인 자가 모혁광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모혁광은 이 일을 오랫동안 계획한 것이 틀림없다.’

바로 그때, 막 모퉁이를 돌던 서백은 발을 멈췄다.

서백이 멈추자 뒤에 따라오던 일행도 정지했다.

망자 둘이 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서백은 조심해서 고개를 내민 뒤 망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망자 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도를 걸어갔다가 끝까지 가면 몸을 돌려서 다시 중앙으로 걸었다.

긴 복도를 왕복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것 또한 생전의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일 터.

서백은 일행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망자가 둘 있다는 뜻.

유소운이 엄지로 자신과 활을 번갈아 가리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처리하지.

-믿어 보겠습니다.

서백이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소운이 활통에서 화살 한 발을 꺼내 활시위에 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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