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유령선(2)
양소소가 횃불로 복도를 밝히며 말했다.
“채주실은 복도를 직진한 다음 계단을 하나 내려가면 바로 있소.”
열쇠를 찾았으니 먼저처럼 우회할 필요는 없었다. 양소소가 앞장을 서자 일행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곧이어 일행은 채주실에 도착했다.
양소소가 채주실의 열쇠를 찾아서 구멍에 넣고 돌렸다.
그런데 막 문을 열려는 찰나, 서백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왜 그러오?”
“새로운 장소에 진입할 때는 망자의 유무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아까는 잘린 목이라서 다행이었죠.”
“……!”
양소소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흠칫했다.
잘린 목이라서 다행이라는 말.
즉 이번에는 문 뒤에서 몸뚱이가 붙은 망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 아닌가?
서백은 혁낭에서 단검 세 자루를 꺼내 자신이 한 자루를 갖고 왕이삼과 유소운에게 건넸다.
“배 밑이 좁으니 단검을 쓰시죠.”
“이럴 줄 알았으면 채도한테 손도끼를 빌릴 걸.”
“살상력은 손도끼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좁은 곳에서는 크게 휘둘러야 하는 손도끼보다 단검이 나을 겁니다.”
“그 말이 맞군.”
서백다운 냉철한 판단에 왕이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소소도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내 검을 쓰겠소.”
“그렇게 하시죠.”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서백은 문에 손을 대고 밀어젖힌 뒤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채주실 안은 깜깜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서백은 양소소에게 횃불을 빌린 다음 채주실로 들어가서 사방을 살폈다. 다행이 망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 없습니다.”
일행은 모두 채주실로 들어갔다.
양소소는 채주실에 오자 감회가 남달랐다. 그녀는 탁자를 한 차례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치 아버지의 온기가 탁자에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서백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수로채의 신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
양소소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금고가 있는 탁자 뒤로 돌아갔다.
그런데 금고를 본 순간 양소소는 흠칫 놀랐다.
금고가 경첩이 뜯어져서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금고 안은 신물은커녕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대체 누가…….”
양소소는 충격을 받아 말을 못 이었다.
서백은 그런 양소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한 방파를 이끌 여인은 못 되는군.’
강호출행을 한 뒤 지금까지 만난 여인은 모두 두 명이었다. 아미파 정수사태와 사천당문의 당홍.
한 명은 선인이고 한 명은 악인이지만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무공 수위가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 또한 굳건하다는 점.
반면 양소소는 둘 중 어느 것도 보잘것없었다.
일대채주가 실종되자 능력 없는 딸이 채주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유명세가가 아니면 그런 경우는 드물다. 세가는 혈통이 중요하지만 무림 방파는 실력이 전부니까.
‘양소소 같은 무능력자가 채주 자리를 이어받은 이유가 있을 터.’
서백은 장강삼협수로채에 아직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양소소가 텅 빈 금고를 하염없이 보고 있자 왕이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물도 없는데 이제 나가는 게 어떻소? 이 배는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산해서 기분이 영 안 좋군.”
“이미 망자가 나왔지 않소?”
유소운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거야 뭐, 서백이 처리했으니까 또 나오기 전에 튀자는 얘기지.”
“그 말은 동감이오.”
“알았소. 부채주가 간 기관실로 갑시다.”
양소소가 마음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왜 장강 지류를 표류하는지 알아내면 채주선을 다시 회수할 수…….”
그때 서백이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재빨리 문을 닫았다.
“쉿.”
“왜 그러시오?”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들었다.”
유소운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난 못 들었는데? 무슨 소린데 그러냐?”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노랫소리 같았는걸?”
“뭐라고? 어떤 미친놈이 여기서 노래를…….”
순간 닫힌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강삼협 굽이는 아흔아홉 굽이…….”
“장강삼협 수심은 아흔아홉 척…….”
소리를 들은 양소소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건 장강삼협 뱃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요! 배에 생존자가 있소!”
양소소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양소소는 등줄기가 시큰한 느낌을 받으면서 걸음을 멈췄다. 서백이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그녀의 등에 있는 혈도를 점혈한 것이었다.
“당신이 죽든 말든 제가 상관할 바 아닙니다. 하지만 장강삼협수로채 채주선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약속한 이상 일을 마무리할 것입니다.”
서백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서백은 꼼짝 못하는 양소소를 붙들고 뒤로 물러섰다.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갑자기 채주는 왜 점혈한 것이냐?”
“밖에 망자가 나왔습니다.”
“……!”
“이 배는 망자가 창궐한 게 분명합니다. 먼저 잘린 목은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는 사이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런데 하필 노랫소리가 일행이 있는 채주실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게다가 복도를 걷는 발소리.
틀림없었다. 망자는 채주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백은 일행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망자를 피하는 세 가지 방법을 실행하라는 뜻. 일행은 얼굴 표정을 굳히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멈췄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망자가 들어왔다.
왕이삼이 단검을 쥐며 서백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한 놈이군. 처치할까?
-잠깐. 좀 더 지켜보죠.
서백은 고개를 저으며 왕이삼을 말렸다.
동시에 손바닥을 앞으로 밀며 벽에 붙으라고 손짓했다. 일행은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섰다.
망자가 방 한가운데에 들어와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노래는 방에 들어오자 중단했다.
사람은 중년을 넘으면 관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동안 거쳐 온 세월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다.
망자 역시 그랬다.
살색은 푸르뎅뎅하고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서 썩고 있었지만 얼굴은 생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길게 길러서 사뭇 위엄이 서려 있는 오십대의 무림인.
망자를 본 순간 서백은 직감했다.
‘장강삼협수로채의 일대채주 양곡이군.’
서백의 짐작이 맞았다.
서백이 붙들고 있는 양소소의 눈빛이 흐려지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나타나자 감격에 젖은 것이다.
하지만 감회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노랫소리를 듣고 무작정 방을 나갔다면 아버지가 살아온 줄로 착각하고 망자에게 달려갔을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망자가 된 양곡이 손에 든 큼지막한 환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왕이삼이 기겁하며 눈신호를 보냈다.
-어떡하냐? 이래도 가만히 보고만 있어?
-예. 망자는 우리의 존재를 모릅니다.
서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양곡이 치켜든 환도를 아래로 내려쳤다. 하필이면 환도가 왕이삼의 코앞을 지나갔다.
번쩍.
“……!”
왕이삼은 기절초풍해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양곡은 왕이삼을 노린 게 아닌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며 계속 환도를 휘둘렀다. 일행은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있어서 허공을 가르는 환도를 피할 수 있었다.
붕붕붕붕.
사람 머리쯤은 수박처럼 쪼개버리는 환도가 코앞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데 서백의 눈빛은 냉정했고 유소운의 눈빛은 여유마저 감돌았다.
왕이삼은 둘을 보며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양곡이 산 사람을 베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왕이삼은 안심이 됐다.
그러나 서백의 표정은 더욱 무표정하게 굳었다.
‘양곡이 혼자서 검무를 출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서백이 양곡의 행동을 추리할 때, 복도에서 망자 여럿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청건을 머리에 쓴 것으로 보아 생전에 채도들이었으리라.
그런데 채도들이 각자 손에 든 환도를 치켜들고 양곡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챙챙챙챙.
양곡과 채도들이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괴이한 것은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 꼭 연극하듯이 서로 합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양곡과 채도들이 동작을 뚝 멈췄다. 그러더니 고개를 멍하니 들고 다시 뱃사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먼저는 양곡 혼자였지만 이제는 합창이 되었다.
망자들은 살이 썩고 성대가 끊어져 핏물과 공기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목소리에 겹쳐진다. 꼭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이어서 양곡과 채도들은 몸을 돌린 뒤 하나둘 채주실을 나가 복도로 사라졌다.
노랫소리가 점점 멀어져서 들리지 않게 되자 서백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왕이삼이 참았던 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이건 망자 배가 아니라 유령선이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된다고!”
서백도 그 말에 동감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채주선의 비밀이 무엇인지 실마리가 잡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증거를 찾는 것.
서백은 꼼짝 못 하는 양소소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혈을 풀 겁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방을 나가서 아버지를 찾으려고 하면 바로 다시 점혈하겠습니다.”
서백이 점혈을 풀었다. 양소소는 방을 뛰쳐나가진 않았지만 서백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오! 직접 보지 않았소?”
“아니, 방금 본 것은 망자입니다.”
서백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냉담했다.
“정 아버지가 망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일단 당신을 데리고 배를 탈출할 테니 이후 다른 채도들과 함께 와서 망자들과 싸우고 아버지를 구출하십시오.”
“알았소. 하지만 아버지가 망자라면 왜 살아 계신 것처럼 행동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되오.”
양소소는 서백의 충고를 받아들였지만 아직 아버지가 망자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왕이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긴 하네. 혼자서 검은 왜 휘두른 거야?”
“생전의 일을 반복하는 것이오.”
유소운이 왕이삼의 물음에 대답했다.
“망자는 평소 생전에 가장 강렬했던 기억을 반복해서 재현한다고 알고 있지. 허공에 검을 휘두르던 게 아니라 누군가와 싸웠던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차피 망자가 말도 안 되는 존재 아닌가?”
“그거야 뭐… 쳇, 할 말 없군.”
왕이삼이 투덜거렸지만 서백도 유소운의 말을 인정했다.
“저도 스승님께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망자는 이 방에서 누군가와 싸움을 벌이다가 뒤에 들이닥친 채도들의 칼을 맞고 죽었을 겁니다. 방금 망자들은 그날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말도 안 되오! 그럼 허황된 일이…….”
양소소가 반박했지만 서백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 증거로 탁자에 먼지가 한 점도 없군요.”
서백이 검지로 탁자를 슥 쓸었지만 먼지는 묻지 않았다. 먼저 양소소가 탁자를 쓰다듬을 때 손에 먼지가 묻지 않은 것을 봐 둔 것이었다.
“배가 산 사람이 사라진 채 날짜가 오래 지났는데 탁자에 먼지가 없다는 것은 망자가 이 방에서 생전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뜻이죠.”
“……!”
양소소는 서백의 설명을 듣고 놀라서 말을 못 이었다. 하지만 서백은 더욱 경악할 진상을 얘기했다.
“누군가가 채주실에 들어와 금고를 부수고 신물을 훔쳤습니다. 채주는 그와 싸우다가 배신한 채도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둑과 채도들이 한통속이었다는 뜻이죠.”
“……!”
“채주선은 누군가가 감염돼서 망자가 창궐했습니다. 이후 일대채주와 채도들은 망자가 되었고 장강을 표류하며 생전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채주선의 비밀입니다.”
서백의 말에 양소소는 물론 왕이삼도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유소운은 놀라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는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서백처럼 여러 증거를 한데 모아서 추리를 완성시키진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설명에 동감하자 서백이 말했다.
“비밀을 풀었으니 이 배를 탈출합시다.”
“…알았소.”
양소소도 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동의했다.
서백은 양소소에게 망자를 피하는 방법 세 가지를 설명했다.
“만약 아버지와 마주쳐도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지키십시오. 그런 다음 망자인지 아닌지 확인해도 늦지 않습니다.”
서백의 말에 양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서백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양곡이 망자라고 확신했다.
“그럼 탈출하겠습니다.”
서백은 숨을 멈추기 위해 석가심결을 시전했다.
그런데 가슴이 뜨끔하면서 내공진기가 모이지 않았다.
‘뭐지?’
석가심결에는 지켜야 할 주의사항이 있었다.
스승이 석가심결을 전수하며 경고했던 말.
-가장 좋은 것은 차 한 잔 마실 시간(15분) 동안 쓰는 거다.
-다음으로 좋은 차선은 밥 한 끼 먹을 시간(30분) 동안 쓰는 거다.
-목숨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반 시진(1시간) 동안 써도 좋다.
-명심해라. 그 이상 석가심결을 운용했다간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반 시진은커녕 지금 막 시전하려던 참이 아닌가?
주화입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전에 내공진기가 모이지 않을 뿐 신체에 이상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산공독(散功毒).’
산공독은 내공을 흩어지게 만드는 독이다.
내가무공을 못 쓰도록 만들기 때문에 무림인들이 가장 꺼리는 무색무취의 독.
서백은 산공독에 중독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