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촉도관으로 가는 길(1)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서백의 등장에 장우명 패거리는 물론 왕이삼마저 입을 딱 벌렸다.
왕이삼이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매복의 낌새가 느껴져서 나무 위로 올라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그 말이 왕이삼을 더욱 놀라게 했다.
‘매복의 낌새를 느꼈다고?’
그는 어이가 없어서 생각했다.
‘좋다. 방금까지 쿨쿨 자고 있던 녀석이 무슨 수로 알았는지 몰라도 매복을 깨닫고 잠에서 깼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틈에 들키지 않고 나무 위로 올라갔단 말이냐?’
특히 나무 위로 올라간 판단이 절묘했다.
위에서 아래를 공격하는 것은 전술의 기본이다.
매복해 있는 적들의 의표를 찌른 전법!
‘이 녀석, 검법만 강한 게 아니군.’
왕이삼은 새삼 서백을 다시 봤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 검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서백의 손속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검을 잡으면 반드시 상대의 목을 베는군.’
왕이삼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이자, 망자냐?”
“아닌데요.”
“그럼 왜 일검에 목을 벤 거지?”
“몰라서 물으십니까? 이자는 선배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어 마땅하죠.”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
차라리 서백의 목소리에 분노나 오만함이 실려 있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수긍했으리라.
그러나 무감정한 목소리가 오히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매복 작전을 역으로 받아친 서백의 노림수.
졸지에 검객 하나를 잃은 장우명은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아직 우리 쪽수가 더 많다! 놈들을 죽여라!”
동료를 잃은 검객들이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달려들었다.
“이 어린 놈이…….”
팟. 순간 검객 한 명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발을 멈췄다. 아니,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내리자, 거대한 검날이 배를 관통해서 등 뒤로 빠져나간 게 아닌가?
“헉…….”
검객이 달려드는 선상에 서백이 일직선으로 검을 뻗은 것이었다. 그 바람에 검객은 자기 발로 검에 뛰어드는 셈이 된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려는 짧은 찰나, 검객은 서백의 검법이 비무장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 체조 하듯이 대검을 느릿느릿 휘두르던 소년.
하지만 방금 자신과 동료를 벤 두 번의 초식은 전광석화 같았다.
그야말로 절정의 쾌검!
그는 숨이 끊어지면서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서백을 쳐다봤다. 비무장에서 이런 검법을 보여 줬다면 절대 시비를 걸지 않았을 텐데…….
휙. 퍽.
서백이 몸을 날려 검객을 차 버렸다.
몸을 관통한 검날이 단박에 쑥 뽑혔다. 검객은 멀리 날아가 나무에 등을 부딪친 뒤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백이 장우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쪽수가 같아졌군요.”
예의 무감정한 목소리.
한 명 남은 검객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공자, 도망칩시다.”
“빌어먹을! 저런 꼬마 놈 하나 못 죽인단 말이냐?”
“네, 무립니다. 두 명이 죽은 걸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시끄럽다!”
검객이 달래봤지만 장우명은 허세를 버리지 않았다.
검객은 장우명을 버리기로 생각을 바꿨다.
일단 중원으로 달아난다면 장씨세가가 무슨 수로 찾을 것인가? 목이 떨어지는 것보다야 백 배 나을 터.
휙. 검객이 몸을 돌리더니 숲속으로 도망쳤다.
“네, 네놈! 어, 어딜 가는 것이냐?”
검객이 자신을 호위해 주긴커녕 도망을 선택하자 장우명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왕이삼은 푸욱 한숨을 쉰 뒤 서백에게 물었다.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
“도망치겠다는데 굳이 목을 벨 필요는 없겠죠.”
서백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장우명을 응시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식객이었을 뿐, 세가에 충성을 맹세한 가솔은 아닐 겁니다. 공자라는 자의 목숨보다 자기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걸 봐선 말이죠.”
“이 꼬마 놈이…….”
장우명은 분통이 터졌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평소 말만 앞서던 그는 정작 위기가 닥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던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숲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악!”
방금 도망쳤던 검객이 뒷걸음질 치며 숲속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서백과 왕이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산발머리를 한 괴한이 검객을 끌어안은 채 턱주가리를 목덜미에 파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어서 괴한이 검객의 목덜미 살을 크게 한입 물어뜯었다.
콰직.
촤아아아악. 동맥이 끊겼는지 검객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아아아악…….”
검객이 발광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 바람에 피분수가 사방으로 쏟아져서 근처 수풀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피칠갑이 되고 말았다.
망자였다.
팟. 휘이이잉.
섬광과 질풍이 어두운 공기를 가로로 양단했다.
그러자 검객과 망자가 움직임을 뚝 멈췄다.
곧이어 둘의 목이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검격이 얼마나 크게 반원을 그렸는지 뒤쪽에 서 있는 나무 몇 그루마저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털퍼덕. 우당탕탕.
“도망친 사람까지 죽이다니… 이 악귀 같은 놈…….”
장우명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서백을 비난했다.
“이자는 망자에게 물렸습니다.”
서백이 무표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혈선충이 몸속을 파고들었을 테니 계속 놔둔다면 망자로 변할 겁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 편히 죽도록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
장우명도 망자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망자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일검에 목을 베는 서백을 보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서백이 쓰러진 망자의 목 단면을 살피고 말했다.
“혈선충의 심맥을 갈랐으니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겁니다.”
“망자가 여기까지 오다니, 사천도 큰일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서백은 왕이삼의 말에 대꾸한 뒤 주위 기척을 살폈다.
어두운 숲속은 발자국 소리는커녕 짐승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검객을 물어뜯은 것은 진석평 같은 망자가 아니라 혈귀였다.
혼백이 없이 짐승처럼 행동하는 혈귀는 걸음걸이와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서 발소리와 기척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방금 나타난 망자는 검객을 물기 전까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게 뜻하는 것은?
‘여기서 죽어 있던 시체가 막 되살아났군.’
망자는 전신에 피가 마르면 미이라처럼 변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산 자의 피를 흡수하는 순간 다시 혈귀로 돌아온다.
‘단 한 방울의 피로도 충분하지.’
방금 쓰러뜨린 두 검객.
하나는 목을 베었고 하나는 몸통을 찔렀다.
그들 중 누군가의 피가 숲속에 쓰러져 있던 망자의 몸에 흩뿌려졌을 것이다. 망자가 기척 없이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리라.
서백은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미 공기 중에 피비린내가 물씬 스며들어 있었다.
서백의 본능이 위험 신호를 알렸다.
‘숲속에 쓰러져 있는 시체가 한두 구가 아니다.’
사천당문에서 촉도관행이 출발할 때 세 가지 주의 사항을 말했던 당조정.
그는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을 빼놓고 말하지 않았다.
실수한 것일까? 사천당문의 인물이?
‘설마.’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다.
촉도관으로 가는 길은 망자 창궐 지역이라는 사실을!
‘사실을 밝히면 손해였겠지. 일을 그만두는 무림인이 나오거나, 보수를 더 달라고 하거나 했을 테니까.’
역시 사특한 뱀이 취할 법한 행동.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검객 셋의 피가 흩뿌려졌으니 몸에 피를 흡수한 망자들이 숲속에서 하나둘 몸을 일으킬 것이다.
“이 숲속은 망자밭입니다.”
“뭐라고?”
서백의 말을 듣고 왕이삼이 깜짝 놀랐다.
“피 냄새가 진동하니 곧 망자들이 되살아날 겁니다. 숫자가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군요.”
“서둘러서 자리를 떠야겠군.”
서백과 왕이삼은 몸을 돌려서 마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그런데 장우명이 두 팔을 벌리며 마차 앞을 막았다.
“잠깐!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
“…….”
서백은 당나귀 고삐를 놓은 뒤 검 자루에 손을 댔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래! 날 구해준다면 장씨세가가 사례를 할 것이다!”
“필요 없습니다.”
“제발…….”
서백이 들은 체도 하지 않을 때, 뜻밖에도 왕이삼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나 낼 거냐?”
“내다니, 뭐를…….”
“은원보 두 개 어떠냐? 촉도관까지 무사히 데려다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은원보 두 개? 좋다! 장씨세가가 보증하겠다!”
“말뿐인 보증은 됐고, 촉도관에 가면 각서나 쓰시지.”
“알았다! 반드시 그리 하지!”
살아날 길이 생기자 장우명은 앞뒤 가리지 않고 왕이삼의 흥정을 수락했다.
왕이삼이 서백과 눈빛을 교환하며 말했다.
“어때? 데리고 갈까, 그냥 놔두고 갈까?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네.”
“선배님 뜻대로 하시죠.”
“이럴 때는 선배님이군. 그럼 저놈은 내 인질이니 함부로 목을 베면 안 되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때도 거래를 하시는군요.”
“이게 세상 사는 지혜라는 걸세, 지혜.”
왕이삼은 세상의 때 묻은 도검수답게 씨익 웃었다. 서백은 그런 그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백은 고삐를 쥐고 당나귀를 몰았다. 왕이삼은 혹시 망자가 튀어나올지 몰라 마차 옆을 지켰다. 장우명은 마차 뒤에서 따라오라고 시켰다.
졸지에 파락호가 더해진 세 명의 일행은 어두운 숲속 길을 나아갔다.
* * *
반 시진쯤 길을 갔을 때, 서백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마차를 멈췄다.
“잠깐 멈추시죠.”
서백은 나직하게 속삭이며 마차를 세웠다.
“무슨 일인가?”
“쉿.”
서백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검지를 입가에 대자 왕이삼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서백은 앞으로 열 걸음을 나아갔다.
어둠 속에 홀로 선 서백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폐속에 가득 찬 공기를 천천히 내쉬었다.
후우우우.
석가심결이 시작되었다.
석가심결에는 두 가지 운용법이 있었다.
하나는 석가심결 특유의 기수식을 취해서 운기조식을 하며 내공을 쌓는 것. 다른 하나는 심결을 운용하면서 동시에 석가검법을 출수하는 것.
둘은 운용법이 상반되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귀식대법을 하듯이 호흡이 거의 멈춘다는 것이었다.
서백이 석가심결을 운용하자 코에서 나오던 숨결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곧이어 서백의 눈에 어둠 속 멀리 있는 물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라고 해도 제대로 사물을 분간하기 힘든 거리. 그러나 석가심결을 운용하는 서백의 두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숲속의 좁은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는 것은 촉도관행의 다른 마차였다.
‘시작됐군.’
서백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등 뒤에서 왕이삼이 물었다.
“뭐가 보이긴 하냐?”
“네.”
“저 어둠 속이 보인다고? 허…….”
서백의 능력을 잘 아는 왕이삼은 재차 혀를 내둘렀다.
“대체 뭐가 있길래 그렇게 조심하는 거냐?”
“마차입니다. 우리보다 바로 앞에 떠난 마차인 것 같군요.”
“마차? 무림인들은 어디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고? 그럼…….”
“네. 망자에게 당한 겁니다.”
서백의 무감정한 목소리는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왕이삼마저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다.
“여기는 망자밭 한복판입니다.”
“그럴 리가…….”
서백과 왕이삼이 이동을 멈추고 있자 장우명도 궁금했는지 앞으로 와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서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왕이삼과 장우명을 한 차례 번갈아 본 뒤 말했다.
“지금부터 망자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