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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9화 (9/123)

9화 촉도관으로 가는 길(2)

왕이삼과 장우명은 귀를 의심했다.

망자를 피하는 방법? 그런 게 세상에 있단 말인가?

장우명이 기가 막히다는 듯 외쳤다.

“망자를 피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목소리를 죽이시죠. 망자가 듣습니다.”

“……!”

장우명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실은 서백의 경고는 거짓말이었다.

망자는 산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든,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든 알아차리지 못한다.

일부러 장우명의 기를 죽인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

‘여기는 곧 망자판이 된다.’

하지만 왕이삼마저 서백에게 의문을 표했다.

“망자를 피해서 계속 길을 가자는 말이냐? 그건 무리다.”

“그럼 어떡하실 겁니까? 지금 와서 마차를 돌리실 겁니까?”

“…….”

“길을 돌아가도 이미 늦었습니다. 먼저 지나온 곳에서 망자들이 되살아났을 겁니다. 한밤중이라 다른 샛길을 찾기도 무리죠.”

서백의 말은 논리정연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

“망자를 피하려면 모두 세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서백이 설명을 시작했다.

“하나, 망자 앞에서는 숨을 멈추십시오.”

“숨을 멈추라고? 왜?”

“망자는 산 사람의 숨결을 알아차립니다. 대신 호흡을 멈추면 망자는 산 사람도 자신들처럼 죽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걸 믿으라는 거냐? 어이가 없군.”

장우명이 중간에 딴지를 걸든 말든 서백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둘, 피를 흘려선 안 됩니다. 망자는 피 냄새를 귀신처럼 맡고 몰려옵니다. 바다의 사어(沙魚)가 그렇듯이.”

그 말에 왕이삼이 의문점을 물었다.

“아까 세 명이 죽었으니 우리한테 피 냄새가 나면 어떡하냐?”

“직접 피를 흘린 게 아니니 상관없을 겁니다. 단지 피 냄새가 옷에 배어서 심하게 풍긴다면…….”

“심하다면?”

“재수 없는 셈 쳐야죠.”

“운 나쁘면 꼼짝 없이 죽는다는 소리군.”

어느새 왕이삼과 장우명은 무엇에 홀린 듯이 서벽의 설명을 들었다.

“셋, 마지막 조건이 가장 어렵습니다. 망자 앞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희로애락?”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 망자는 산 사람의 표정 변화에 민감합니다. 망자 앞에서 어떤 표정도 짓지 마십시오. 눈썹 한 올이라도 찡그렸다가는 망자가 존재를 알아차릴 겁니다.”

“…….”

믿기 힘든 얘기인지 왕이심과 장우명은 생각에 잠겼다.

왕이삼은 그래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지만, 장우명은 서백의 말을 웃어넘기는 게 티가 났다.

서백은 상관하지 않았다.

각자도생의 중원 무림. 남이 떠먹여 줘도 입을 다물고 있다면 못 먹는 수밖에.

“다행히 이곳엔 혈귀만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금 말한 세 가지를 지키면 무사히 빠져나갈 겁니다.”

서백이 말을 끝낸 뒤 몸을 돌렸다.

장우명이 침을 꿀꺽 삼키며 왕이삼에게 물었다.

“저 꼬마 진심으로 숲을 돌파할 생각이냐?”

“그래. 빈말은 안 하는 녀석이지.”

왕이삼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은 다음 서백을 따라갈 준비를 했다.

장우명은 그런 둘을 보며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망자를 피하는 세 가지 방법? 그런 해괴한 짓을 한다고 정말 망자가 알아차리지 못할까?

‘저 꼬마 놈은 미쳤어. 그래, 미친 게 분명해.’

불안감에 짓눌린 장우삼은 스스로를 그렇게 위안했다.

왕이삼은 그런 장우삼을 힐끗 훔쳐봤다.

‘저놈, 아무래도 저러다가 크게 사고를 치겠군.’

명문문파나 유명세가에서 어릴 때부터 곱게 무공을 수련하다가 처음 무림에 출행하는 애송이들이 대개 저렇다.

처음엔 자신만만해서 나대다가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나마 가진 재주도 다 펼치지 못하고 허둥댄다.

간혹 공포에 질린 나머지 미쳐 버리는 놈도 나온다.

지금 장우명이 딱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장우명은 사천당문이 뽑은 합격자 스무 명에도 끼지 못할 만큼 검법조차 형편없지 않은가?

졸지에 처치 곤란한 골칫덩이가 생긴 셈.

‘서백 말대로 버려두고 올걸 그랬나?’

왕이삼은 내심 후회가 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서백이 등에 멘 검을 손에 들며 말했다.

“제가 앞장 설 테니 마차를 부탁드립니다.”

서백이 앞장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왕이삼과 장우명도 각자 박도와 검을 들었다.

왕이삼이 마차를 끌고 서백을 따라가자 장우명도 불안한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장우명은 차라리 숲속을 달려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서백이 천천히 걷는 터라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지자 몸이 그에 반응했다. 긴장한 장우명은 전신에는 솜털이 섰고 입에는 침이 바싹 말랐다.

서백은 등 뒤에서 장우명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생각했다.

‘참아라. 망자 앞에서 급하면 죽는다.’

서둘러서 움직이다 보면 정작 망자와 마주쳤을 때 숨을 멈추기 쉽지 않다. 얼굴 표정 역시 자기도 모르게 무표정을 무너뜨리기 일쑤다.

그 때문에 서백은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버려진 마차에 접근했다.

서백은 마차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마차를 몰던 무림인 두 명은 보이지 않았다.

망자들도 없었다.

당나귀 두 마리는 마차에 묶인 채였고, 검은 천도 마차에 실린 궤짝을 그대로 덮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 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차.

모르는 자가 봤다면 귀신이 모는 마차로 여기고 간담이 서늘했을 모습.

안전을 확인하자 서백은 마차로 다가갔다. 당나귀 두 마리가 흥분해서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천당문에서 당나귀는 신경 썼군.’

당나귀는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다.

고집이 세다는 것은 인간으로 치면 담대하고 끈질기다는 뜻. 주위에서 살겁이 벌어져도 당나귀는 한가롭게 길가의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반면 말은 섬세한 동물이다. 망자는커녕 피 냄새만 맡아도 흥분해서 발광을 한다.

즉 사천당문이 말 대신 당나귀로 마차를 끌게 한 것은 치밀한 준비였다.

말보다 느려도 한참 느린 당나귀. 그러나 망자밭 한복판을 지나가려면 무감각한 당나귀가 백 배 낫다.

물론 말이 좋은 때도 있다.

워낙 섬세한 동물이라 망자가 접근하면 사람보다 먼저 낌새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중원에 들어가면 망자 창궐 지역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속도가 빠른 말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

일단 살아서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

막 뒤따라온 왕이삼이 서백에게 물었다.

“상황이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서백이 검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마차만 덩그러니 있고 무림인 둘은 어디 갔는지 안 보이는군요. 망자도 없고 싸운 흔적이나 핏자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우명이 끼어들며 말했다.

“망자가 없다면 잘된 일 아니냐? 무림인들이야 마차를 버리고 도망쳤을 테고.”

“아닙니다.”

서백은 고개를 저었다.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천당문의 일을 맡은 무림인이 마차를 버리고 달아났을 리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갔단 말이냐?”

“망자가 되었을 겁니다.”

“……!”

장우명이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백은 신경 쓰지 않고 왕이삼에게 말했다.

“제가 이 마차를 맡죠. 선배님은 우리 마차를 맡아주십시오.”

“좋다. 까짓거, 이렇게 된 이상 마차 한 대 더 옮기고 돈이나 챙기자.”

그 말에 장우명이 발작을 하며 외쳤다.

“지금 목숨이 위험한 판인데 돈이 중요하냐?”

그러자 서백과 왕이삼이 동시에 장우명을 돌아봤다.

“마차는 당나귀가 끄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직접 끌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죠.”

“…….”

서백의 단호한 말에 장우명은 말문이 막혔다.

“선배님, 갑시다.”

“그러지.”

서백이 마차를 끌고 선두로 나가자 왕이삼이 그 뒤를 따랐다. 두 대의 마차는 천천히 어둠 속을 통과했다.

당나귀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오히려 마차 바퀴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끼이이익. 삐걱 삐걱 삐걱.

간혹 돌덩이에 바퀴가 걸려서 마차가 덜컹거리면 심장도 함께 뛰었다.

어느새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숲속은 적막할 뿐 망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우명이 긴장이 풀렸는지 말했다.

“뭐야? 쥐새끼 한 마리도 없구만.”

그때 길 옆의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무슨 소리 못 들었냐?”

“들었습니다.”

서백이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으며 말했다.

“다들 아까 말한 세 가지 잊지 마십시오.”

“…….”

장우명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길 왼쪽의 숲에서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터벅 터벅 터벅…….

인영은 죽을 고생을 하느라 탈진했는지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두 팔은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고개는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장우명이 인영을 살피다가 말했다.

“잠깐… 나 저자가 누군지 안다. 비무장과 객잔에서 본 무림인이다. 그래, 틀림없다!”

“물러서십시오. 당장.”

서백이 장우명에게 경고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장씨세가의 삼공자인 장우명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

인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흑건과 흑의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이 맞았다.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깨닫자 장우명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는 무림인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같이 있던 동료는 어디 갔냐?”

“…….”

인영이 슬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말을 잘 못 들어서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못 들었냐? 다른 동료는 어디…….”

“크르르르.”

무림인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개 울음소리를 냈다. 위로 말려 올라간 입술 사이로 군침에 젖은 송곳니가 드러났다.

“…뭐야?”

장우명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망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장우명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콱. 꾸웨에에엑.

“크윽! 이거 놔라!”

장우명은 상체를 비틀며 손을 망자의 두 손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반대편으로 상체를 돌리며 손으로 반원을 그렸다.

적에게 잡힌 멱살을 푸는 금나수.

장우명은 가주인 아버지가 비싼 돈을 들여서 고용한 고수에게 어려서부터 금나수를 배웠다. 검법은 보잘것없었지만 금나수는 제법 기본기가 몸에 배어 있었다.

덜컥.

목을 잡은 망자의 손목이 옆으로 돌아가며 탈골됐다.

아버지가 봤다면 헛돈을 쓰지 않았다고 흐뭇해할 장면.

그러나 서백은 냉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헛수고.’

망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팔이 탈골되어도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으면서 움직인다.

이미 죽은 시체니까.

망자가 턱주가리를 활짝 벌린 뒤 장우명의 손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그런 다음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콰드드득. 와직.

장우명의 손가락 두 개와 손바닥 절반이 이빨 자국이 난 채 뜯겨져 나갔다.

“…아아아악! 내 손!”

멍한 눈으로 반쪽이 된 손을 쳐다보던 장우명이 발작하며 비명을 질렀다.

“멍청한 놈!”

왕이삼이 장우명을 구하려고 박도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막 망자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서백이 검면을 눕혀서 그의 앞을 막는 것이 아닌가?

“이미 늦었습니다.”

망자가 장우명에게 달려들자 둘은 땅에 쓰러져 한데 뒤엉켰다. 망자는 게걸스럽게 장우명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또 물어뜯었다.

콰득 콰득 콰득.

장우명이 짐승 멱 따는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끄아아아악!”

아무리 파락호지만 산 채로 망자에게 뜯어먹히는 모습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왕이삼은 장우명과 망자의 목을 베려고 했다.

“검을 치우게. 편히 죽게라도 해 줘야…….”

“그것도 이미 늦었습니다.”

“……!”

서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숲속에서 수십 구의 망자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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