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천당문의 의뢰(2)
그런데 합격자 발표에 불만을 터뜨린 자가 나왔다.
“나는 장씨세가의 삼공자다! 대체 내가 왜 불합격이냐? 내가 저 떨거지들보다 못한 게 뭔데?”
소동을 일으킨 자는 장우명이었다.
“합격자 명단은 당문에서 엄격히 뽑은 것이오.”
총관이 설명했지만 장우명은 듣지 않고 윽박질렀다.
“너 말고 당문 사람 나오라고 해!”
그때 언제 와 있었는지 총관 뒤에서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또 뭐냐?”
장우명의 호통에 청년이 대답했다.
“당문 사람 나오라면서?”
“……!”
그는 삼 층 방에서 이모 당홍과 함께 비무장을 지켜보던 당조정이었다.
사천당문의 인물이 나오자 장우명은 얼른 표정을 바꾸며 포권지례를 했다.
“이거 실례 많았소. 본인은 장씨세가의 삼공자인 장우명이라 하오.”
“당조정이다.”
당조정의 인사는 짧고 거만했다.
그는 장우명 같은 자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약자에게 강한 놈일수록 강자에게는 약한 법.
아니나 다를까, 총관한테는 삿대질을 하던 장우명이 당조정 앞에서는 실실 웃음을 지어 가며 말했다.
“내 사정 좀 들어 보시오. 장씨세가의 비전 검법을 시전했소만 저 총관 놈이 무공을 모르는 바람에 불합격을…….”
“합격자는 나와 이모님이 직접 뽑았다.”
“…….”
그 말에 당조정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당조정의 이모라면 그녀 역시 사천당문의 인물.
사천당문은 대대로 여인들의 입김이 셌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대를 잇고 데릴사위를 들여서 자식을 낳았다.
즉 사천당문의 여인이라면 당문의 핵심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천당문에 연줄을 만들러 왔는데 당문 사람과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장우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장우명이 조용해지자 당조정이 무림인들을 향해 외쳤다.
“사천당문의 일을 맡으러 와 줘서 고맙소. 소수 정예가 필요해서 더 선발 못 하는 점 양해 바라오. 다음 기회에 다시 지원하시오.”
낭랑한 목소리가 비무장에 울려퍼졌다.
중원에서 오만하기로 소문난 사천당문 치고는 정중한 인사말.
그러나 말과는 달리 당조정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슬쩍 도포 자락을 걷어서 허리춤에 찬 검을 내보였다.
이래도 돌아가지 않고 행패를 부린다면 사천당문의 무공을 보여 주겠다는 선언!
그러자 불만이 가득하던 무림인들도 뿔뿔이 몸을 돌려서 비무장을 떠났다.
더 이상 불평을 터뜨렸다가는 사천당문이 살겁을 펼칠지도 모른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실 수는 없는 일.
무림인들이 하나둘 떠나자 장우명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빌어먹을… 가자!”
그는 패거리를 이끌고 장원을 나갔다.
“파락호 놈, 중원 무림이 만만한 줄 알더니 꼴좋군.”
왕이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자시까지 어디서 시간을 죽이지?”
“객잔에 가서 국수나 한 그릇 먹죠.”
“좋지. 나는 국수에다 한 잔 걸쳐야겠네.”
“밤에 바로 일을 시작할 텐데 술을 드십니까?”
“한 잔이네, 한 잔! 박도에 기름칠하듯이 가끔씩 위장에도 기름칠 좀 해 줘야지.”
“박도 기름값보다 위장 기름값이 더 나가겠군요.”
서백과 왕이삼은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장원을 나섰다.
마을은 사천당문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참을 가야 했다. 마을에 도착한 둘은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둘은 자리에 앉아 국수와 백주를 시켰다.
객잔은 도검을 지닌 무림인들로 꽉 차 있었다.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할 순 없지만 모두 사천당문에 지원하러 온 자들이었다.
물론 무림인들 대부분은 불합격자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고작 스무 명 뽑겠다고 방문을 돌려?”
“당문이 하는 일이 그렇지. 명문정파 중에서도 오만하기 짝이 없다고 소문난 곳이 아닌가?”
“쉿! 말조심하게. 당문은 이런 촌구석에도 세작을 심어놓는다는 얘기 못 들었는가?”
그 말에 다들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반면 말없이 술을 마시는 자들도 있었다.
자격 시험의 합격자들.
다른 무림인들과는 눈빛부터 다른 그들은 쓸데없는 말을 삼간 채 조용히 술을 마시거나 국수를 먹을 뿐이었다.
그때 무림인 하나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근데 시험에 떨어진 게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른다.”
“뭐야? 왜?”
“이번 일의 행선지가 촉도관이란 얘기를 들었거든.”
“뭐라고? 거긴 언제 망자떼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곳이잖아?”
무림인들의 분위기가 대번에 술렁거렸다.
서백은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그랬었군.’
이어서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으면 물어뜯을 틈을 노리는 것이니 절대 방심하지 마라.
사천당문의 의뢰는 짐작했던 것처럼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사천은 동서남북이 산맥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벼랑과 절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을 넘는 것은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라는 일.
산맥을 넘지 않고 중원에서 사천으로 들어오려면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북쪽 한중에서 검문관을 통과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동쪽에 위치한 촉도관을 통과하는 것이다.
촉도관(蜀道關).
사천과 중원을 잇는 접경에 위치한 관문.
현재 사천은 곳곳에 망자가 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원은 사천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망자가 창궐해 있었다.
중원의 인구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다. 중원의 망자들은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많게는 수천수만에 이르기까지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만약 수만 명의 망자떼가 촉도관을 통과한다면?
사천도 망자판이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사천당문의 의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실력 있는 무림인들에게 촉도관까지 무언가를 운송하도록 시킨다.
망자들을 막을 무기일까?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위험천만한 일인 것은 분명할 터.
게다가 촉도관까지 가는 길은 망자가 출몰하는 지역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정을 깨닫자 무림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험에 떨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었군!”
“제 발로 촉도관에 가라고?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란 소리지.”
“사천당문이 어떤 놈들인가? 이번에 뽑은 놈들을 칼받이로 쓸 게 뻔하다고!”
무림인들은 목숨을 건진 걸 안도하며 건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왕이삼이 서백에게 물었다.
“자네를 사지(死地)로 끌고 와서 불만인가?”
“천만에요.”
서백은 마침 나온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삼키며 말했다.
“방구석에서 세상 불평만 하다가 늙어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동감일세.”
서백과 왕이삼은 뜨거운 국수를 후후 불어 가며 먹었다.
그런데 서백과 왕이삼을 훔쳐보는 무리가 있었다.
객잔 구석에 앉은 장우명 패거리였다.
“저놈 아까 비무장에서 본 놈 맞지?”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불합격 시켜 놓고 저런 꼬마를 뽑았다고? 당문 놈들, 오늘 일은 반드시 복수할 테다!”
“참으시죠. 당문 놈들이 좀 비열합니까?”
검객이 말리자 장우명은 분을 못 참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했다.
“잠깐. 이번 일이 촉도관으로 가는 거라고 했지?”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다들 이리 모여라.”
검객 셋이 탁자 한가운데로 머리를 모으자 장우명이 방금 떠올린 계획을 설명했다.
* * *
자시가 되었다.
서백과 왕이삼은 이미 장원에 도착해 있었다.
곧이어 시험에 합격한 열여덟 명의 무림인들이 속속들이 장원에 모였다.
그런데 장원의 분위기가 사뭇 이상했다. 한밤중이 되었는데 장원은 횃불은커녕 촛불 하나 밝히지 않고 있었다.
칠흑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림인들 스무 명의 눈빛만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당조정이 총관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총관은 작은 등불을 하나 들고 있었다.
총관이 명부를 들고 한 명씩 이름을 호명했다. 모두 스무 명의 무림인. 합격자 중 불참한 사람은 없었다.
인원 점호가 끝났을 때, 장원 내부에서 마차들이 줄을 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마차를 지켜봤다.
그런데 서백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차들이 나오자 총관이 몸을 돌려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장원은 다시 캄캄해졌다.
마차는 한 대마다 당나귀 두 마리가 끌고 있었다.
문제는 마차에 실린 물건이었다.
눈대중으로 볼 때 큼지막한 궤짝이 몇 개 실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은 천으로 마차를 통째로 덮어 놓았기 때문에 궤짝에 든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림인들은 잠시 궁금해하다가 잡념을 지웠다.
굳이 물건의 정체를 알 필요는 없다. 무림 문파의 의뢰. 맡은 일을 완수하고 약속된 보수를 받으면 그뿐.
“지금부터 할 일을 얘기하겠다. 두 명씩 조를 짜서 마차 한 대를 옮겨라.”
당조정이 설명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촉도관이다.”
객잔에 있었던 불합격자들이라면 대번에 술렁거렸을 말.
하지만 장원에 모인 스무 명의 무림인들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반드시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이 있다. 하나, 마차를 덮은 천을 절대 풀거나 들추지 말 것.”
사람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무림인들은 반사적으로 마차를 흘깃 쳐다봤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 실려 있길래?
“둘, 불을 밝히지 말 것. 담배 피우는 것도 금지다.”
이번 말은 냉철한 무림인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이 어두운 밤에 불 없이 가라고?
촉도관까지는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이동해야 간신히 도착할 거리다. 적어도 세 번을 어둠 속에서 이동해야 한다는 뜻.
“셋, 다른 마차를 돕지 말고 자기 마차만 지킬 것.”
각자도생. 각자 알아서 자기 일만 잘하라는 뜻. 사천당문다운 냉혹한 말이었다.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지켜라.”
그런데 당조정이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만약 주의 사항을 지키지 못하다가 목숨이 달아날 경우 사천당문을 원망하지 말아라.”
“…….”
대체 왜 지켜야 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주의 사항.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마차에 실린 물건이 목숨을 좌우할 만큼 위험하다는 사실!
당조정이 계속해서 다음 사항을 전달했다.
“보수는 촉도관에 도착하면 지급하겠다. 마차 한 대당 은원보 두 개다.”
“……!”
방금 주의 사항을 듣고 싸늘해진 무림인들의 눈빛이 대번에 기대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은원보 하나면 은이 오십 냥.
은 오십 냥은 서민이 몇 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되는 금액이다. 또한 은 백 냥은 도검수가 몇 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되는 금액.
냉철한 무림인들도 눈빛이 바뀔 만큼 엄청난 보수!
왕이삼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랬냐? 한 밑천 잡을 거라고 했지?”
그러나 서백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어려운 일일수록 보수가 높은 법이죠. 은 백 냥이 우리 목숨값이란 뜻입니다.”
“…그렇군.”
“위험한 일이니 중간에 도망치는 자도 나올 겁니다. 하지만 은 백 냥이 눈앞에 어른거리면 쉽게 도망치기 힘들겠죠. 사천당문은 은 백 냥으로 무림인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겁니다.”
“…그 말도 맞군.”
왕이삼은 서백의 냉철한 판단에 혀를 내둘렀다.
서백의 말이 옳았다.
도검수로 평생을 벌어도 만지기 힘든 돈, 은 백 냥. 사천당문이 이유 없이 그런 거금을 내놓을 리 없었다.
이번 일에 정체불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
“그럼 출발하라.”
당조정이 명령을 내렸다.
무림인들은 두 명씩 조를 만든 뒤 선두에 있는 자들부터 마차를 끌고 장원을 나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