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천당문의 의뢰(1)
장원의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이 나왔다.
‘대단하군.’
서백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작 마당에 불과한데 석가장의 장원 전체랑 비교될 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그 넓은 마당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얼핏 봐도 이삼백 명을 훌쩍 넘는 인파.
사람이 많은 만큼 각자 소지한 병장기도 다양했다.
도검, 창, 도끼는 물론 월아산이나 방천극처럼 독특한 병장기도 보였다.
마치 무림의 병장기 전시회를 보는 듯한 모습.
그런데 병장기는 제각각 다양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무림인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서백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몇 명이나 뽑는다고 하냐?”
“많아봤자 스무 명이라고 들었다.”
“모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고작? 제기랄.”
사람들 말이 맞다면 열 명 중 한 명 뽑힐까 말까 하다는 얘기가 된다.
즉 주위 모두가 경쟁자라는 뜻!
‘다들 신경이 날카로운 이유가 있었군.’
기록을 담당하는 서기가 탁자에 앉아서 명부를 작성하고 있었다.
서백과 왕이삼은 차례가 오자 앞으로 나갔다.
“이름, 소속, 자신 있는 무공이나 병장기를 말하시오.”
“왕이삼. 소속은 없고 박도를 쓰고 있소.”
“서백. 소속은 없고 검을 씁니다.”
서백과 왕이삼은 딱히 덧붙일 말이 없기 때문에 금방 순서가 끝났다.
막 몸을 돌리는데 인파 속에서 서백과 왕이삼을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냐? 문파도 소속도 없이 사천당문의 의뢰를 맡겠단다!”
“무림에 빌어먹는 떨거지가 하나둘이겠습니까?”
“사천당문이 방문을 내거니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는 속셈이겠죠, 흐흐흐.”
서백과 왕이삼을 비웃는 자는 사천 장씨세가의 삼공자인 장우명과 그 패거리였다.
장우명은 희고 곱상한 얼굴에 화려한 비단옷을 걸쳐서 누가 봐도 부유한 집안 자식인 걸 알 수 있었다.
왕이삼은 행여 서백이 화를 낼까 봐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중원에는 저런 밥맛없는 파락호가 득시글거리니까.”
“알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서백은 담담하게 대답하더니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머쓱해진 왕이삼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일검에 의혈방주 진석평의 목을 베었던 소년 맞아? 아무튼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군.’
뒤를 이어서 장우명의 차례가 왔다.
“장씨세가의 삼공자인 장우명이다. 내 장씨검법을 선보일 기회를 마련해 준 사천당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군.”
장우명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하지만 서기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명부를 작성한 뒤 말했다.
“다음 사람.”
“뭐야? 내 말은 듣지도 않는 거냐?”
장우명이 분통을 터뜨리자 패거리가 그를 달랬다.
“허드렛일이나 하는 놈한테 신경 쓰지 마시죠.”
“흠흠, 그러지.”
장우명은 패거리와 함께 거만한 걸음걸이로 그늘을 찾아서 쉬러 갔다.
“난세에도 저런 똥파리가 몰리다니, 사천당문의 위세를 알 만하군.”
“동감입니다.”
왕이삼의 말에 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세 명의 검객까지 끌고 다니는 장씨세가의 삼공자. 그가 굳이 목숨을 걸고 돈벌이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즉 장우명은 사천당문과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고 싶어서 찾아온 파락호였다.
“신청이 끝난 자는 비무장으로 가시오.”
서기의 말에 무림인들은 비무장으로 이동했다.
비무장은 장원 오른쪽의 담장을 따라 뒤로 돌아간 곳에 있었다.
비무장은 마당보다 더 넓었다. 무림인들이 속속 몰려왔지만 좁기는커녕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을 정도였다.
“전 무림인이 모여서 무림대회를 열어도 되겠군.”
왕이삼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곧이어 자격 시험이 시작되었다.
총관이 명부에서 한 번에 네 명의 이름을 불렀다.
“비무대의 동서남북 방위에서 각자 형(形)을 펼치시오.”
비무대에 올라간 무림인 넷이 동서남북으로 멀찍이 떨어진 뒤 무공을 시전했다. 병장기가 있는 자는 병장기를 썼고, 없는 자는 권각법을 출수했다.
지원자가 많다 보니 초식을 충분히 보여 주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잠시 명부에 무언가를 기록하던 총관이 다음 사람들을 호명했던 것이다.
“수고했소. 다음.”
네 명이 내려오자 새로 네 명이 올라갔다.
무림인들은 경쟁자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느라 비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서백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 총관은 무공을 모르는 전형적인 문사다.’
서백은 그 점이 수상했다.
사천당문이 이름을 걸고 사람을 뽑고 있는데 무공을 모르는 자가 무림인을 선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서백은 슬쩍 시선을 돌려서 주위를 살폈다.
눈길을 돌리던 서백은 멀리 떨어진 건물 삼 층의 창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짜 심판관은 총관이 아니라 저기 있군.’
비무대가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
사천당문의 인물이 삼 층 방에서 무림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봐야 될 이유라도 있나?’
서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총관이 왕이삼의 이름을 불렀다. 순서가 갈렸는지 서백은 부르지 않았다.
“나 먼저 나가네.”
“잘하고 오십시오.”
네 명의 무림인이 자리를 잡자 총관이 말했다.
“시작하시오.”
비무대의 동쪽 방위에 선 왕이삼은 박도가 하늘로 향하게 수직으로 치켜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이어서 왼발을 대각선 앞으로 밟으며 박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긴 검자루를 양손으로 쥐고 베는 박도술.
묵직한 박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붕 붕 부웅 붕.
박도는 검자루가 길어서 봉과 운용법이 흡사하다. 왕이삼은 그런 박도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었다.
묵직한 박도의 무게를 실어서 파괴력을 배가시킨 초식.
화려하진 않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자세.
왕이삼의 박도술은 철저한 실전 도법이었다.
다수의 적과 섞여서 혼잡한 백병전을 벌일 때 특히 효율적인 도법.
잠시 후 총관이 말했다.
“그만. 수고했소.”
왕이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총관이 다음 네 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중에 서백이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하고 오게.”
서백은 등에 멘 짐을 내려놓고 걸개에 검만 건 뒤 비무대로 올라갔다.
동쪽 방위에 서면서 서백은 슬쩍 삼 층 방을 봤다.
사천당문의 인물이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자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석가심결은 목숨의 위기처럼 부득이한 때가 아니면 중원 명문정파 놈들에게 보이지 마라.
스승의 명은 무엇이든 따르겠지만 그 말은 지키기 힘들 것 같았다. 결국 언젠가는 석가심결을 중원 무림에 선보일 날이 올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고작 이런 시험 무대에서 석가심결을 운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사천당문의 인물이 예의 주시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문제는 석가심결을 운용하지 않으면 석가검법 역시 펼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스윽.
서백은 등에 멘 검을 잡은 뒤 검날이 하늘로 향하게 수직으로 치켜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이어서 왼발을 대각선 앞으로 밟으며 검을 베었다.
검을 벤 순간 연속으로 정면을 향해 찔렀다.
바로 이어서 무릎을 굽혀서 몸을 낮추는 것과 동시에 회전하며 수평으로 검을 베었다.
대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부웅 부웅 부우우웅 부웅.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서백은 무공을 모르는 사람도 어떤 동작인지 알아볼 만큼 느릿느릿 움직였던 것이다.
어린 아이도 눈으로 보고 피할 법한 초식.
눈에 띄게 동작이 느리자 오히려 무림인들의 시선이 서백에게 집중됐다.
특히 장우명 패거리는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놈 뭐야? 무슨 검법이 저렇게 느려 터졌어?”
“무공이 아니라 건강 체조인가 봅니다!”
“하하하하!”
다른 무림인들도 서백의 초식을 구경하면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저런 얼치기도 지원을 하다니, 사천당문이란 이름값이 과연 대단하군.
그런데 무림인 중 몇몇은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서백을 지켜봤다.
그중 가장 놀란 것은 왕이삼이었다.
지금 서백이 출수하는 초식들이 먼저 왕이삼이 선보였던 초식과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저건… 내 박도술이잖아?’
왕이삼은 서백이 기수식을 취할 때부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짐작이 맞았다. 서백은 왕이삼이 방금 행한 동작들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따라하고 있었다.
단지 속도만 두세 배 느릴 뿐.
오히려 그게 더 놀라웠다.
‘저 크고 무거운 검으로 내 박도술을 따라한다고?’
왕이삼의 박도도 보통 도보다 길고 무겁지만 서백의 검은 박도보다 갑절은 더 크다.
왕이삼은 자신이 서백의 대검으로 박도술을 펼칠 수 있을지 상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검으로 박도술을? 절대 무리지.’
게다가 서백은 그냥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대검은 빨리 휘두르는 것만큼 느리게 휘두르는 것도 힘들다.
검을 높이 치켜들면 무게가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관성에 따라 빨리 벨 수 있다. 하지만 일부러 느리게 베려면 검의 무게를 계속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
손목과 팔의 힘은 물론, 전신이 외공으로 다져진 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동작!
‘하여간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왕이삼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생각했다.
한편, 음지에서 서백을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비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삼 층 방의 인물들이었다.
삼 층 방에서 비무대를 지켜보는 두 남녀.
그들은 이십대 중반의 청년 당조정과 사십대 중반의 여인 당홍이었다. 둘은 사천당문의 인물로, 당홍이 당조정의 이모였다.
당조정이 서백의 초식을 보며 말했다.
“앞의 놈이 한 도법을 소년이 따라 하는군요. 같은 문파일까요? 나이로 봐서는 사숙과 사질 뻘로 보이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당홍이 당조정을 질타하며 말했다.
“사질이 사숙의 무공을 따라해? 누굴 놀림거리로 만들려고? 소위 정파라는 놈들이 그런 하극상을 용납할까?”
“그건 몰랐습니다…….”
당조정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흐렸다.
당홍은 계속해서 당조정을 다그쳤다.
“저 소년의 도법에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중(重)입니다. 나이는 어린데 외공을 제법 튼실하게 수련했군요.”
“바보 같은 놈. 네가 그래서 무공 성취가 느린 거다.”
“네?”
“중(重)이 아니라 쾌(快)다! 저 소년은 쾌검을 숨기고 있어.”
“하지만 내공심결을 운용하는 기척도 없고 그냥 근골의 힘으로 검을 다루는 것 같은데…….”
“물론 지금은 외공만으로 검을 쓰고 있지. 하지만 실전에서는 내공심결을 운용할 거다.”
그 말에 당조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소년이 우리를 속이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래. 아주 영악한 놈이다.”
당홍이 뱀처럼 사특한 눈빛으로 서백을 보며 말했다.
“소속 문파, 내공심결, 검법의 핵심 요결. 무엇 하나 우리에게 보여 줄 생각이 없는 거야. 감히 사천당문의 눈을 속이려 들다니.”
“……!”
잠시 멍하니 있던 당조정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럼 저 소년을 따로 명부에 기록해 둘까요?”
“그럴 필요 없다.”
당홍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살아남는 놈은 없을 테니까.”
* * *
자격 시험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났다.
총관이 잠시 어딘가를 다녀온 다음 무림인들 앞에서 합격자를 발표했다.
합격자의 수는 모두 스무 명. 비무장에 모인 인파가 이삼백을 넘는다고 볼 때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서백과 왕이삼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우리 둘 다 합격이군!”
“잘되었습니다.”
이어서 총관이 말했다.
“오늘 밤 자시(子時)에 출발할 테니 합격자는 모두 이곳에 모이시오.”
당장 오늘 밤 자시에 출발한다는 통보.
사천당문의 일이 한 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급하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