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출석 요구서를 발부한 것을 보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것 같습니다.”
“증거를 확보하지 않았어도 조사차 출석 요구서를 발급하기도 하지 않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가 알아보니 진동훈 회장이 출석하면 조사 후에 바로 구속 영장을 신청할 거라고 합니다. 그걸 보면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겁니다. 아니면 제보받은 내용을 확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아버지가 구속되면 그 뒤를 이어 진성 그룹을 맡을 사람이 없게 된다.
물론 작은 엄마가 맡겠지만 그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될 거라 진성 그룹은 급격히 무너지게 될 거다.
작은아버지가 무능해도 작은 엄마보다는 훨씬 낫지.
“구속되면 진성 그룹이 많이 흔들리겠네요.”
“당연합니다. 현재 그룹 상황도 안 좋은데 구심점인 회장까지 구속되면 직원들이 심하게 흔들릴 겁니다. 또한, 거래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동훈 회장이 구속되는 순간부터 진성 그룹은 사실상 끝이 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알아보라는 내부 접촉자는 알아봤나요?”
“네.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룹 기획실 윤학훈 전무가 제일 적임자였습니다. 그자는 진성 그룹에서 한동훈 회장과 전미정 감사 뒤를 이은 실세입니다.”
“그 정도 실세라면 그룹을 살리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자는 원래 그룹의 실세가 아니었으나 전미정 감사에게 아부하여 그 자리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렇기에 침몰하는 배에 타지 않고 내리려고 할 겁니다. 아주 적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그런 자들이 꼭 있지. 이런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놈들이지.
“접촉은 했나요?”
“좀 더 지켜볼 생각으로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급격히 변하였으니 바로 접촉하겠습니다.”
“그래요. 접촉하고 나서 제가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동훈 회장이 구속되면 채권 은행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채권을 회수하려고 담보물을 매각하려고 할 겁니다.”
그럼 절대 안 되지.
담보를 제공했다는 것은 그룹에서 가치가 있는 것일 텐데 진성 그룹을 인수해도 껍데기만 인수하게 될 수도 있다.
“담보물 매각은 막아야 하니까 채권 은행 움직임도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박도진이 가고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내가 한국에 입국했다는 기사가 있어 눌렀다.
기사를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기사에는 내가 분당에 있는 작은 커피숍을 운영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상호나 정확한 위치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이미 소문이 났기에 아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공식적으로 기사가 난 이상 커피숍은 더욱더 사람들이 몰려들 거다.
소나기는 피하라고 했지.
정작 난 소나기를 피하는데 강성중과 김나영은 피하지 못해 한동안 고생하겠네. 그동안 편하게 지냈으니 고생해도 되지.
노크 소리가 들리고 희수가 들어왔다.
“고문님! 경성일보에서 고문님 인터뷰 요청 전화가 왔습니다.”
커피숍에 없으니 이젠 오션으로 전화를 하네. 이제 시작이구나. 앞으로 계속 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거절할까? 할까?
“뭐라고 했어요?”
“기자 연락처 받고 나중에 연락해 준다고 했습니다. 언론사에서 계속 올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연락처만 받아놔요.”
“알겠습니다.”
희수가 나가자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얼굴도 알려졌기에 무조건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바에는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좋겠지.
그래 전부는 아니어도 몇 번 정도는 인터뷰하자. 어디랑 할까?
가만! 기자 인터뷰할 거면 내가 아는 기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그 둘하고 하는 게 좋겠지.
근데 내가 한국에 입국한 것을 알 텐데 서하연 기자하고 구자성 기자는 왜 전화를 하지 않지?
핸드폰을 들었다.
* * *
진성 그룹 진동훈 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비서 실장이 들어오자 다그치듯 물었다.
“알아봤어?”
“네.”
다시 물으려다가 서 있는 비서실장을 보고서는 작게 말하였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네.”
비서실장이 소파에 앉자 다그치듯 물었다.
“뭐라고 해? 왜 출석 요구서를 보낸 거래?”
“제가 여러 경로로 알아봤지만,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검찰에서 지난번에 압수 수색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뭐라도 나왔대?”
“그건 알 수가 없지만, 뭔가가 나왔기에 출석 요구서를 보낸 겁니다.”
“출석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출석하시게 되면 일단 조사를 받게 되고 그 이후 일정은 검찰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 판단할 거라고 합니다.”
“조사받고 다시 나오는 거야?”
“특별한 범죄 혐의가 없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범죄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불구속 수사를 할 겁니다. 다만 최악의 경우 증거 인멸 등이 인정될 경우 구속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겁니다.”
진동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호사는 뭐래?”
“변호사도 같은 말입니다. 전례를 보면 불구속 수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이제 재판 준비를 해야겠네.”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에게 말해 검찰에 출석해 조사받을 때를 대비한 자료도 준비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변호사랑 같이 출석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때 문이 열리며 전미정이 들어왔다.
그걸 본 변호사가 일어났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비서실장이 나가자 전미정이 소파에 앉았다.
“뭐래?”
“알아봤는데…….”
비서실장이 한 말을 이야기하였다.
“그래? 별거 아니라 아무 일 없을 거야.”
진동훈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부인을 보면 끓어오르는 화를 속으로 삼켰다.
따지고 보면 비자금 조성이니 공금 횡령 등 자신이 검찰 조사를 받게 되는 대부분이 부인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니고 부인이 한 일이라고 검찰에서 말할 수도 없고 일은 부인이 치고 벌은 자신이 받게 되었다.
“이게 누구 때문에 생긴 일인데 함부로 말하지 마.”
“무슨 남자가 쫀쫀해. 사업하다 보면 별의별 일들을 다 겪는데 이런 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의례적인 일이야. 난 당신이 걱정할까 봐 말한 건데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왜 왔어?”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할 말 없으면 가.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게 말이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민재 말이야. 요즘 너무 잘나가는데 민재에게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 해서.”
진동훈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잖아. 민재는 없다고 생각해. 더구나 지금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도움을 받아?”
“민재 지금 한국에 들어왔어. 인터넷 기사가 올라와 알았어. 그리고 아무리 끝났다 해도 어려울 때 도움받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무 자르듯 끝낼 수 있어?”
“난 더는 민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 거야. 당신이 하든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잖아. 어떻게 당신은 물에 빠지고도 살 수 있는 커다란 배를 안 잡으려고 해? 내가 말하는 것보다 당신이 말하는 게 더 좋지. 엄연히 난 남이고 당신은 같은 핏줄이잖아.”
“솔직히 우리가 민재에게 잘해 준 게 뭐가 있어?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 못하지. 난 같은 핏줄이기에 미안해서라도 그렇게 못해. 다시는 내 앞에서 민재 이야기 꺼내지 마.”
전미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진동훈을 째려보았다.
“내가 저런 남자를 믿고 살아야 한다니. 당신은 아직 살 만한가 봐.”
냉기를 풀풀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전미정을 바라보며 한동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 * *
오늘은 진성 그룹 기획실 윤학훈 전무를 만나기로 하여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다.
박도진이 연락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나와 빠르게 만남이 성사되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들은 바로는 룸살롱 같은 곳이 어울리는 자일 것 같은데 생각과는 다르게 만나자고 한 장소가 전통 찻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십 대 초반의 남자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자인가 보네.
그 앞으로 가자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하여 순간 당황스러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학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앉으시죠.”
“네.”
자리에 앉았다.
“요즘 잘나가는 오션의 고문님이 저 같은 놈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무척 놀라기도 하고 기뻤습니다. 영광입니다.”
가만히 그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오기 전에 그자의 관상이 간신배 같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관상이었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고 진규촌 회장님 손자분 아니십니까?”
나를 알고 있네.
“제가 왜 만나자고 한지 아세요?”
“모릅니다.”
“요즘 들리는 소식을 들어보니 진성 그룹이 무척 어렵다고 하네요. 상황이 어떤가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처참할 정도입니다. 계열사도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심각한 경영 악화를 겪고 있어서 언제 파산할지 매각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또 다음 주 월요일에 진동훈 회장님이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게 되어 회사 분위기가 매우 안 좋습니다. 한마디로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진성 그룹이 그렇게까지 되었나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겁니다. 제 생각이 100%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애초에 진동훈 회장이 진성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도련님이 물려받았다면 지금과는 180도가 달라졌을 겁니다. 진동훈 회장은 무능력하고 그것보다 더한 것은 사모님이 감사로 들어와 그룹 경영에 참여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제입니다. 진성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많습니다.”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었다.
박도진 말로는 이 자는 한직에 있다가 작은 엄마 때문에 그룹 기획실 전무까지 승진했으면서 지금은 작은 엄마를 비난하고 있다.
물론 작은 엄마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저자는 변호해야 하지 않나?
“저도 걱정이 많아요. 다음 주 검찰 소환 조사에서 만약에 작은아버지가 구속된다면 진성은 급격히 무너질 거예요.”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사실 이번 검찰 조사가 전미정 감사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게 문제가 된 겁니다. 그걸 검찰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압수 수색까지 당했습니다. 제발 불구속 수사가 되었으면 하는데 최악까지도 생각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든 어떤 자가 내부 고발을 했을 거다. 박도진이 내부 고발자가 누군지 알아봤으나 확인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자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스스로 복을 차 버릴 인간은 아닐 테니까.
“이럴 때 누군가가 중심을 잡아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데 그룹 내에 그런 인재가 있을까요?”
“저라도 나서면 좋은데 제가 그 정도 능력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진동훈 회장님이 구속되면 그다음이 전미정 감사인데 전미정 감사가 진성을 맡게 되면 진성은 더욱 빠르게 무너질 겁니다. 도련님이라도 그룹에 들어오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도련님이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진성에 왜 들어가? 인수하면 끝인데.
“제가 진성 그룹에 들어갈 자격도 없고 있다 해도 지금 들어갈 시기는 아니에요. 차라리 제가 남은 계열사 두 곳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아요.”
놀란 눈을 하며 되물었다.
“도련님이 인수하시겠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