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정지희는 민재가 온다는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두려운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교차하였다.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찾아오고 싶은 마음도 없을 텐데 민재가 스스로 온다고 하자 꺼져 가던 불씨에 불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몇 시지?”
“4시야.”
“4시간밖에 안 남았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데. 나 뭐부터 해야지?”
“할 게 뭐가 있어? 마음이나 진정하면서 차분하게 기다려야지.”
“아니야. 나 미용실에 갔다가 올게.”
“아들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그래야지.”
“당신 예뻐.”
“나 갔다가 올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나가는 아내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 *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있는 GN 본사 회장실에는 찰스 노리스 회장과 피터 보가드 사장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노리스 회장이 생각난 듯 물었다.
“한국의 대유 자동차 인수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현재로서 진행은 잘되고 있습니다만 꼭 대유 자동차를 인수해야 하는지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만간에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지금은 내연 기관 자동차를 늘릴 때가 아니니까.”
갑자기 인상을 심하게 쓰는 회장이었다.
“어떻게 수소 내연 기관을 개발할 수가 있단 말이야? 우리는 그토록 개발에 많은 시간과 인력, 자본을 투입하고서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저도 오션의 발표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난 솔직히 아직도 그 말을 믿기가 힘들어. 아닐 수도 있어.”
“사실일 겁니다.”
“말만 요란하지 실체는 없잖아. 오션에서 개발했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의심스러운 면도 있어.”
“저도 믿기 힘들어 다방면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로버트 크레나 박사가 오션에 가서 개발 연구 자료와 설계도를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로버트 크레나 박사 말로는 진짜 개발한 것이 맞는다고 합니다.”
“뭐? 로버트 크레나 박사가 직접 확인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로버트 크레나 박사가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한평생을 수소 내연 기관 연구에 일생을 바친 분이고 세계적으로 수소 내연 기관 권위자이기에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로버트 크레나 박사는 현재 실리콘 밸리에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 갔다고 합니다.”
“크레나 박사가 확인했다면 정말로 오션에서 개발했다는 거네. 어떻게 그걸 개발했다는 거야?”
“저도 잘 모릅니다. 오션에서 직접 개발한 건지 용역을 주어 개발한 건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한번 자세히 알아봐.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션에서 직접 개발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어딘가에 용역을 주어 개발한 것 같아. 그 용역 한 곳을 알아내어 그곳 연구원들을 스카우트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회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오션에서 발표를 했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정말이란 말이지. 아주 심각한 상황이 되었어.”
“네. 그렇습니다.
오션에서 수소 내연 기관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을 때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한쪽은 우리처럼 유서 깊은 자동차 회사들도 실패했던 수소 내연 기관을 개발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며 완전한 개발에 성공한 것은 아닐 거라는 반응이었습니다.
한쪽은 그 발표를 사실로 믿는 반응이었습니다.
이제 사실로 밝혀진 만큼 우리도 대책 마련을 해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 GN에 크나큰 위기가 닥칠 겁니다.”
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변하였다.
“우리 GN이 설립된 지 어언 100년이 다 돼 가면서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걸 다 이겨 내고 지금까지 왔는데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지.”
“현재 최대 위기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대유 자동차 인수 건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인수하지 말자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사업을 축소해야 할 때이지 확장할 때가 아닙니다. 커다란 폭풍우가 거세게 몰려오고 있는데 해변에 나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리고 파드에서 오션과 접촉했다는 정보입니다.”
“뭐? 파드에서?”
“네. 그렇습니다.”
“왜?”
“저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파드는 오션의 발표를 처음부터 믿었던 쪽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최대 위기라 판단하고 살길을 도모하기 위함일 겁니다.”
“파드 놈들 이번에는 발 빠르게 움직이네. 항상 구렁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더니만.”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겁니다. 아마도 오션과 손잡고 다시 부흥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건가?”
“제가 판단하기에 오션의 수소 내연 기관 개발로 인해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은 오션을 중심으로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질 겁니다. 파드는 오션에 붙어 같이 가려는 전략일 겁니다. 우리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GN이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늦장 부리다가는 도태될 수 있습니다.”
잠시 생각한 회장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오션에서 당장 수소 내연 기관 자동차를 생산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그 시간 동안 오션과 사업적으로 친분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대유 자동차 인수를 포기하여 오션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겁니다. 대유 자동차를 놓고 오션과 경쟁한다면 오션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그것만은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대유 자동차야 포기하는 것은 일도 아니긴 한데. 왠지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지금은 기분에 좌우할 때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입니다.”
“알았어. 대유 자동차 인수는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하지.”
“알겠습니다. 오늘 공식적으로 대유 자동차 인수 포기 선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한다고?”
“할 거면 빨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았어. 그리고 자네가 오션과 접촉해 봐.”
“알겠습니다.”
* * *
커피숍에서 집으로 돌아와 계속 전화 통화만 했었다.
하도 통화를 많이 했더니 귀가 아플 정도라 나중에는 스피커 폰으로 해서 통화를 했는데 이제는 목이 아플 정도였다.
또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지겹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아는 지인들과는 대부분 통화를 끝내고 물을 마시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구시렁대며 전화를 받았다.
“진민재입니다.”
(나야! 손 회장!)
“안녕하세요? 회장님!”
(이제야 통화가 되네. 핸드폰은 왜 꺼 놓은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화했는 줄 알아?)
손 회장은 발표 이후 통화했는데 왜 전화를 또 한 거지?
“죄송해요. 하도 전화가 많이 와서 꺼 놓았어요.”
(하긴 그럴 거야. 그래도 연락이 안 되니까 무척 답답했어. 이런 일이 또 생길 수가 있으니 비상 연락망이라도 있어야겠어.)
“앞으로 연락이 안 되면 이메일 보내시면 되거든요. 제가 이메일은 매일 확인하니 이메일 보고 연락할게요.”
(그러면 되겠네. 이메일 주소나 알려 줘.)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무슨 일 있어요? 전화를 계속하시게요.”
(할 말이 있어서. 며칠 전에 일본 도요도 자동차 이시하라 사토미 회장에게 연락이 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거든. 이시하라 회장이 내가 자네랑 친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자네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자네 생각은 어때?)
도요도 이시하라 회장이 날 만나고 싶다고?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지만 의외였다.
내가 굳이 만날 필요가 있나?
“회장님! 저는 만나자고 하면 만나는 그런 쉬운 남자 아니에요.”
(재미없는 농담이야. 만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봐서 손해 볼 거는 없을 것 같아 말하는 거야. 이 기회에 이시하라 회장도 알아두면 좋은 거지. 사업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런 거물들과 알아두면 좋아.)
알아두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만나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진다.
에릭은 이런 걸 은근히 즐기는 것 같으니 웬만하면 에릭에게 넘겨야지. 내가 피곤하게 왜 만나?
“당분간 일본에 갈 일이 없거든요.”
(자네가 왜 일본에 와? 이시하라 회장보고 미국으로 가라고 해야지.)
“저 어제 한국에 들어왔어요.”
(뭐? 어제 왔다고? 한국 들어갈 때 일본 들렀다가 가라니까.)
“저만 있는 게 아니라 일행들이 있어서요.”
(같이 오면 되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한국에서 할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갈게요.”
(알았어. 꼭 오고. 어떻게 할 거야?)
“당분간은 만나지 않으려고요. 원래 아쉬운 사람이 급한 거거든요. 그래야 협상을 하더라도 유리한 입장이 되죠.”
(무슨 말인지 나도 알지. 하지만 만나더라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으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어. 내가 이시하라 회장에게는 바쁜 일이 있어서 만남을 조금 미룬다고 이야기할 테니까 나중에 한번 만나.)
“그럼 급하면 저 말고 오션 CEO에게 연락하라고 하세요.”
(그래도 돼?)
“저 만나는 것보다 그게 좋을 거예요.”
(알았어. 말해 볼게.)
“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쉬다 보니 엄마에게 갈 시간이 되어 일어났다.
운정 앞에 도착하니 문 앞에는 Close란 팻말이 달려 있었다.
막상 들어가려니 망설여졌다.
엄마의 반응은 어떨까? 내가 누군지 말하지 않고 엄마를 속였다고 화를 내면 어떡하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겠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 1이 나올지 6이 나올지 결과는 봐야겠지. 심호흡하고 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와 서희, 서희 아빠 셋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서희가 일어서며 말하였다.
“오빠 왔어? 이리로 와.”
난 엄마의 정을 받고 자라지 못해 엄마에 대한 정도 미련도 없을 줄 알았는데 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이 보이자 나도 눈가가 찡해졌다.
앞에 다가가자 서희 아빠가 일어섰다.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앉게.”
앉으라고 했지만, 왠지 앉을 수가 없어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신 뭐해?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던 엄마가 일어서더니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난생처음으로 엄마의 품에 안기니 마음이 이상하면서 작게만 보이던 엄마의 품 안이 마치 바다처럼 넓으면서 햇볕처럼 따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엄마의 품이구나!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품 안에서 자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둘의 모습을 보던 서희 아빠가 서희를 데리고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그동안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단어인가? 막상 입 밖으로 내뱉기가 힘들 것 같았는데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래 엄마야! 우리 아들 엄마가 없어서 고생 많이 했지? 엄마가 엄어마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해 너무 미안해.”
엄마의 진심 어린 말을 듣자 그동안 가슴속에 쌓여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녹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줄 알았다면 진작 엄마에게 말할걸.
“아니에요. 저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아 미안해요.”
“아니야. 엄마가 엄마다워야지 말하지. 내가 다 잘못한 거야.”
엄마가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 아들 엄마가 없어도 정말 잘 컸네. 잘생겼고.”
“우리 앉아서 이야기해요.”
“그래.”
마치 어릴 때 나를 빼앗긴 것이 한이 되었는지 다시는 뺏기지 않겠다는 듯 앉아서도 엄마가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