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라니지의 인기가 점점 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신상철의 서머위즈 워도 생각지도 않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난 직접 테스트를 해 보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강성중의 말을 들어보면 은근히 재미있다고 하였다.
특히 미국에서 선풍적인 몰이를 하고 있어 에릭도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게임이 한국 네이브 소유이지만 오션과 협력하여 미국과 유럽, 남미에 런칭한 거라 추후에 수익이 발생하면 일정 부분 나누어 가지게 되고 오션 수익 창출에 포함된다.
아울러 네이브 또한 오션의 자회사 개념이기에 네이브가 성장할수록 오션의 가치도 덩달아 올라가게 된다.
인기를 끌자 신상철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요즘 항상 싱글벙글하며 배상도하고도 짧지만, 대화도 나눈다.
비록 게임에 관한 대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전까지만 해도 배상도의 눈도 못 마주쳤고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진짜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이제는 내가 말한 롤 게임을 당장 개발하려고 하는 것을 일단 막았다.
아직은 서머위즈 워가 안정화된 것이 아니라서 안정시키고 그다음에 하자고 하였다.
오늘도 3명이 나란히 앉아 게임하는 것을 보며 잠시 쉬는데 문이 열리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들어왔다.
여긴 어떻게 왔지? 들어와서 날 보고서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밀리, 아니 레베카였다.
“안녕!”
“여긴 어떻게?”
“오랜만에 보는데 ‘여긴 어떻게’가 뭐야? 반갑게 인사를 해 줘야지.”
“미안. 갑작스러워서. 잘 지냈어?”
“그냥 그렇게 지냈지.”
“앉아서 이야기하자.”
“응.”
내 앞으로 와서 자리에 앉았다.
“뭐 마실래?”
“커피 줘.”
커피를 주려고 일어서는데 강성중이 잽싸게 일어나 주문대로 갔다. 저놈은 여자만 오면 저래.
다시 주저앉았다.
“한국에는 언제 온 거야?”
“10일 정도 됐어.”
“한국은 왜 온 거야? 놀러 온 거야?”
“나도 한가하게 놀러 다녔으면 좋겠다. 일 때문에 왔어.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거야.”
일이라면? 혹시 아빠 연구 자료 때문인가?
강성중이 커피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눈빛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무시하였다.
“커피 마셔 봐. 맛이 좀 특이할 거야.”
“고마워.”
커피 컵을 들고 마시고는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 정도로 놀랄 정도는 아닌데 서양 사람들은 별거 아니어도 좀 오버하는 경향이 강했다.
“맛이 독특해.”
“그런 말 많이 해.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는지 손님이 별로 없어.”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혹시 그 일이 아빠 일이야?”
“맞아.”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말해도 되는 거야?”
“너도 다 아는 사실인데. 뭐하러 숨겨. 네 도움이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난 아는 게 없어.”
“안기부 직원에게 말해 준 게 뭐야?”
역시 CIA인가? 그것도 알고 있게. 안기부에서 다시 조사를 시작해서 CIA도 다시 하려는 건가?
하긴 한국에서 찾으면 미국으로서는 손해겠지.
특별히 숨길 것도 없었다. 휴게소에서 어딘가로 전화 건 거 빼고는 없으니까.
“별다른 건 없고. 아빠가 사고 나기 전에 휴게소에서… 그게 내가 말한 전부야.”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 후로는 안기부에서 연락 온 거 없어?”
“없어. 나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 CIA에서는 뭔가 얻은 게 있어?”
“조사 중이야. 근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쉽지 않네.”
그래서 레베카가 한국에 왔고 날 찾아온 거구나.
“그렇겠지.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13년 전에 찾았을 테니까.”
“새로 시작한 사업도 잘되고 있더라.”
게임을 말하는가 보네. 계속 나를 지켜보는 건가?
“그렇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레베카가 가자 강성중이 게임하다가 얼른 나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누구입니까?”
“친구야. 한국에 놀러 왔다고 온 거야.”
“어떻게 사장님은 앉아만 있어도 동서양의 미녀들이 자주 찾아오는 겁니까? 저는 제가 가도 저를 다 거부합니다. 부럽습니다.”
“소개해 줘?”
“아닙니다. 소개해 줘도 영어를 못해서 하나 마나입니다.”
“영어 공부하든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자 때문에 졸지에 영어 공부하게 생겼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영어 공부해서 잘하면 좋은 거지.
안기부 직원이 찾아오고 한 번도 연락이 없었는데 내가 먼저 전화해 볼까?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보았다.
해 보자. 핸드폰을 들었다.
(손석진입니다.)
“안녕하세요? 진민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연락도 없고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계속 조사 중입니다. 기다리시면 나중에 연락 드릴 겁니다.)
“잘 안 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 같은데. 경각심을 갖도록 자극을 줄까?
“분발해야겠어요. 잘못하면 미국에 뺏길 수도 있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안기부에서도 알기에 레베카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나? 반응을 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안기부에서도 알아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이렇게 정보가 늦으니까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안기부를 믿어야 하나?
“모르고 있었어요? 미국 CIA에서도 다시 찾기 시작했는데요.”
(정말입니까?)
“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CIA 요원에게 직접 들었으니까요. 조금 전에…….”
레베카가 왔다가 간 이야기를 하였다.
* *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손석진은 급하게 국장실로 향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국장이 통화하고 있어 가만히 서 있자 국장이 손짓으로 소파에 앉으라고 하여 소파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국장이 와서 앉았다.
“무슨 일이야?”
“국장님! CIA에서도 진 박사님의 자료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방금 진민재와 통화했는데…….”
손 팀장의 말을 들은 국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야? 그런 걸 일반인에게 들어야 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국장이 답답한지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아직도 얻은 게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팀원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단서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CIA에서도 단서를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여기는 우리 안방이야. CIA에서도 찾지 못했다고 다행이라고? 그딴 정신 상태로 뭘 하겠어? 그러니 이 모양 이 꼴이지.”
“죄송합니다.”
“하나는 확실히 건졌네.”
“네?”
“미국이 가져가지 않았다는 거 말이야. 진민재가 아니라고 했지만 반신반의했거든. 미국이 찾는 이상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해.”
“반드시 찾겠습니다.”
“말이 아니라 결과로 가져와. VIP가 이 건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데. 부장님도 매일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데 보고할 게 없어서 내가 얼마나 난처한 줄 알아? 뭐가 문제야? 접근 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된 거 아니야?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 봐.”
“저뿐만 아니라 팀원들 전부 집에 못 들어간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인원 보충이 시급합니다.”
“알았어. 2개 팀 더 보충해 주면 돼?”
“네. 충분합니다.”
“나가 봐.”
손 팀장이 나가자 최문기 국장은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처음 이 일을 맡을 때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작은 단서조차 찾지 못해 수사가 지지부진하였다.
그런데 미국까지 끼어들었으니 더욱더 골치가 아파졌다. 이러다가 안방에서 미국에 뺏기면 이런 망신도 없었다.
반드시 우리가 찾아야만 하였다.
어디 있는 거냐?
* * *
황규희는 도도한 표정으로 잔뜩 긴장한 채 줄 서 있는 진성 어페럴 임원들 사이를 지나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 뒤를 DS 자산 운용 신동환 사장과 어페럴 윤정환 상무가 따라 들어왔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는 황규희 양옆으로 두 사람이 조심스레 앉았다.
신정환 상무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 대표님! 첫 출근을 축하드립니다.”
황규희는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정환 상무를 바라보다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일에 협조하는 자이기는 하지만 저놈은 나라도 팔아먹을 놈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놈은 곁에 계속 두면 또 배신할 놈이라 한번 이용하고 버리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일단은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이용해야지.
“고마워요. 제가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요?”
“매각과 인수로 인해 지금 회사 내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합니다. 구조조정을 시행할 거면 빠르게 실행하여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남은 자들이 마음잡고 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죠. 작성한 구조조정 명단 주세요.”
미리 준비한 보고서철에서 서류를 꺼내 재빨리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구조조정 서류를 받아 한동안 유심히 보다가 내려놓았다.
“제대로 작성한 거 맞아요?”
“네. 맞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60%나 구조 조정하면 회사 일이 제대로 돌아가요?”
“분위기를 쇄신하는 차원에서 내보낼 자들은 이번 기회에 전부 내보내고 필요 인원은 새로 충원하면 됩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난 빠른 경영 정상화를 원해요. 이러면 새로 충원되는 인원들이 회사에 적응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효율 면에서 떨어져요. 구조조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조건 내보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에요. 다이어트를 하듯 필요 없는 부분만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구조조정은 최소 20%에서 최대 40% 선이에요.”
“그래서 구조조정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임원인 자가 자기랑 일한 직원들을 나서서 자르고자 할까? 최대한 보호하려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승냥이 같은 자였다.
“진성 어페럴 매장별 매출 자료가 있을까요?”
“네.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도 서류철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자료를 한동안 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직영점이 많네요. 지방에 이름 없는 백화점까지 다 들어갔으니 그만큼 운영 비용이 많이 들어가죠. 매출이 저조한 직영 매점은 전부 폐쇄하세요.”
“어느 선까지 합니까?”
펜을 들어 서류에 동그라미를 긋는 황규희였다.
“제가 체크한 것만 남기고 전부 폐쇄하세요.”
서류를 받아 본 윤정환 상무가 물었다.
“이러면 매장이 거의 60%나 줄어들게 되어 매출이 많이 떨어질 겁니다.”
“매출 늘리려고 운영비가 더 나가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매장이 하나 있으면 매출이 적더라도 구색을 갖추어야 하기에 제품들을 그만큼 더 많이 생산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게 전부 악성 재고로 남게 되는 거예요. 즉,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많다는 거예요. 적자라는 말이죠. 앞으로는 최소 생산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할 거예요. 그동안 너무 방만하게 운영된 면이 많아요. 저는 내수보다는 수출에 전념할 계획이에요. 또한 대리점도 매출이 저조한 곳은 계약 만료되면 연장하지 마시고요.”
“대리점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대리점도 마찬가지예요. 나중에 반품하면 그게 다 재고가 되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시고 그만 나가 보세요.”
“네.”
윤정환 상무가 나가자 DS 자산 운용 사장 신동환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인재가 그렇게 없어요? 저런 자를 선택하게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보시면 몰라요.”
“실사하는 동안 우리가 모르는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숨겨져 있던 부채도 저자 때문에 알게 되어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제가 보기에는 제일 먼저 저자를 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잘 알지만, 조직 관리를 하다 보면 모두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은 옳고 굳은 자들만 있지는 않습니다. 조직에 저런 자들도 필요합니다. 아가씨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두고 이용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신동환 사장은 그동안 기업을 경영하며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기에 자신도 느낀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자를 용인하는 것을 보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알았어요. 대신 구조조정은 이대로 진행할 수는 없어요. 저는 회사를 살리고자 하는 거지 망하게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점 명심하고 신 사장님이 저자와 함께 다시 작성하세요.”
“알겠습니다.”
* * *
1999년 새해가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