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중국 중견 기업 헝도 전자 이사인 리우지빈은 한국 거래처에 출장을 왔다가 내일 출국하기에 자식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거래처 직원과 함께 용산 전자 상가에 와서 둘러보고 있었다.
컴퓨터 등 전자 제품들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고 있었다.
뭐가 좋을까? 한동안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일단 부피가 크지 않고 중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제품이어야 하는데 적당한 것이 없어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건너편 진열장에 신기한 것이 보였다.
그 앞으로 다가갔다.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저 작은 것이 뭐에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다. 녹음기 같기도 한데.
자신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거래처 직원이 물었다.
“뭘 보시는 겁니까?”
“이게 뭡니까?”
“이거 말입니까? 이거는 MP3 플레이어인 엠피고라고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MP3 플레이어가 뭡니까?”
“MP3 플레이어가 뭐냐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저는 오늘 처음 들어보고 보는 겁니다. 이런 기능이라면 인기가 아주 많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MP3 플레이어를 어느 중소기업에서 원천기술을 개발했는데 판매가 시원치 않은가 봅니다.”
“네? 어째서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물건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지금 한국 상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힘든 상황에서 누가 이런 고가의 제품을 사겠습니까? MP3 플레이어를 개발한 중소기업에서도 자금난이 심한지 여기저기를 다니며 투자를 구한다는 소리를 몇 개월 전에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리우지빈은 순간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건 대박일 것 같았다. 한국에서야 IMF를 맞아 판매가 저조하겠지만 다른 선진국들은 상황이 다를 것이다.
이걸 사 가서 카피해서 판매한다면 돈을 많이 벌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게 보물을 주운 기분이 들었다.
“이것으로 선물해야겠습니다. 10개만 주문해 주십시오.”
“네? 10개나요?”
“네. 자식들과 조카들에게도 줄 겁니다. 중국에는 아직 MP3 플레이어가 없어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그렇기는 할 겁니다.”
거래처 직원이 판매 직원에게 말하였다.
“엠피고 10개 주세요.”
판매 직원도 놀라는 눈치였다. 하긴 MP3 플레이어 판매가 안 된다고 하는데 한 번에 10개를 구매하니까.
“네? 10개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중국분이 선물로 사 간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포장을 뜯으면 환불이나 교환이 안 됩니다. 그 점 중국분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중국에 도착한 리우지빈은 바로 회사로 달려갔다.
사장실로 들어가자 사장 장저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녀왔습니다.”
“바로 집으로 안 갔어?”
“네.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출장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보고는 내일 해도 되지. 자네는 일 중독이야. 적당히 해. 오늘은 그냥 가고 내일 오전에 보고해.”
“제가 한국에 갔다가 보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관심이 가는지 의자에 깊숙이 파묻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보물?”
얼른 가방에서 MP3 플레이어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겁니다.”
작은 엠피고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장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MP3 플레이어라는 겁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설명을 하였다.
“제가 어제 사서 직접 사용해 보았는데 물건입니다. 이걸 카피해서 미국이나 유럽에 판매하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수 있습니다.”
“카피할 수 있겠어?”
“한국에서 원천기술을 개발했지만 복잡한 기술이 아니어서 분석하면 충분히 카피할 수 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10개를 사 왔습니다.”
“한국에서 특허 출원했을 텐데.”
“중소기업에서 개발한 것이라 아무 힘도 없고 대기업에서 개발했다고 해도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습니까? 뭐라고 하면 무시하면 됩니다. 중국 법원은 언제나 우리 편이 아닙니까? 혹시 모르니 한국보다는 미국이나 유럽에 판매하면 됩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분해해 봐야 알겠지만 넉넉잡아 2, 3개월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하다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은 건수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해 봐.”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 * *
사성 전자에 다니는 양중일은 며칠 전에 퇴사하여 레이컴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책상에 앉아 자신이 만든 제품 두 가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 2월 하노버 정보통신 박람회에 참석했다가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서 개발한 MP3 플레이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 자신도 직장 생활보다는 저런 개발품을 하나 개발하여 사업하고픈 열망에 쌓여 있었다.
막상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려고 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 어떤 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시간도 자본도 오래 걸리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한 결과 쉬운 방법으로 결정하였다.
그 이후로 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만든 것이 지금 책상에 있는 것이었다.
하나는 MP3 CD 플레이어였고, 하나는 MP3 플레이어였다.
어떤 걸 주력 상품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두 제품 다 장단점이 있었다.
먼저 MP3 플레이어는 자신이 카피한 것이고 현재 내장 메모리 가격이 비싸 지금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를 개발한 디지털 카스트에서 출시한 엠피고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자신이 사성 전자에 다녔기에 2년 정도 있으면 내장 메모리 가격이 많이 하락할 것을 알기에 그때 생산, 판매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다음 MP3 CD 플레이어는 공 CD에 MP3 구워 MP3 CD 플레이어에서 실행하여 들으면 되는 제품이었다.
다만 MP3 플레이어보다 크기가 커서 반짝인기는 있어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고 장점으로는 요즘 공 CD 가격이 많이 하락하여 한 장에 4~5백 원 정도 하여 부담이 없다는 거였다.
그래, MP3 CD플레이어 먼저 하자. 2년 정도 하다가 그다음에는 MP3 플레이어로 갈아타면 되겠지.
* * *
오늘은 느지막하게 커피숍에 나왔더니 진성 리조트 홍창호 사장이 와 있었다. 하필 늦게 나온 날 오다니?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온 지 15분밖에 안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커피 마시는 시간을 가져서 좋았습니다.”
진성에서 분리하고 나서 일이 많은지 얼굴 혈색이 전보다 더 나빠졌다. 어르신이 괴롭히나?
“연락하고 오시지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가는 길에 들른 겁니다.”
“바쁜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어제 진성 어페럴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언제 하나 했는데 드디어 계약했네.
“실사가 끝났나 보네요.”
“네. 4일 전에 실사가 끝나고 며칠 동안 최종 매각 가격 협상을 하다가 어제 계약했다고 합니다.”
“얼마에 매각했다고 하나요?”
“매각 가격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진성 측에서 만족할 만한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진성에서 심리적인 부담이 컸겠네요.”
“그랬을 겁니다. 진성 건설이 부도나고 일주일 전에 법정 관리를 신청하여 위압감이 컸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렇겠죠. 법정 관리는 받아들여질 것 같다고 하나요?”
“현재로서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진성 건설은 그전까지만 해도 건실한 기업이었으니까요.”
“헐값이라도 어페럴을 매각해서 속은 편하겠어요.”
“진성은 그럴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 어페럴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다고 합니다.”
“왜요?”
“사모 펀드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한다고 하는 소문이 사내에 쫙 퍼졌다고 합니다. 이미 살생부까지 존재한다고 합니다.”
사모 펀드에서 기업을 인수하고 구조조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벌써 살생부까지 만들었다니 행동 하나는 엄청 빠르네.
“벌써요?”
“네. 그렇습니다. 실사하는 동안 살생부를 작성한 것 같습니다.”
“내부 동조자가 있었겠네요.”
“그러니 가능했을 겁니다. 사실 내부 동조자를 찾기는 아주 쉽습니다. 협조하면 자신은 자리를 보존할 수 있기에 누구든지 협조하려고 할 겁니다.”
순간 스파이 김윤석이 떠올랐다.
이전 생에서 작은엄마 도움으로 진성 어페럴에 취업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김윤석은 칼바람에 살아남으려나?
살 가능성은 컸다. 급여가 많이 나가는 자들부터 정리 해고를 할 텐데 김윤석은 입사한 지 2~3년 된 신입 같은 경력이라 정리 해고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이전 생에서는 어페럴이 부도나 파산하여 직장을 잃었는데 오히려 매각이 김윤석에게는 더 좋은 패가 되었네.
“요즘 신문 보기가 무섭더라고요. 여기저기서 부도나거나 정리 해고를 많이 해서요.”
“저도 리조트가 그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열심입니다. 직원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장님이 계시니 리조트는 문제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어페럴 대표 이사로 황규천 어르신의 손녀가 온다고 합니다. 지난번 임시 주총에 온 손녀분인 것 같습니다.”
황규희가? 경험이 없지만, 왠지 황규희는 잘할 것 같았다. 졸업반이니 일해도 되겠네.
“언제부터 나온다고 하나요?”
“글쎄요? 한바탕 피바람이 불 텐데 다 정리가 되면 그때부터 나올 것 같습니다.”
하긴 사회 경험이 없는 황규희가 그전에 나오면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충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였다.
다 정리된 후에 나오는 것이 좋겠지.
황규희한테 한번 연락해 봐야겠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알았어요.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보셔야죠.”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홍창호 사장이 가자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나 민재야.”
(오빠 오랜만이네. 그동안 왜 연락도 하지 않았어?)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닌데.
“요즘 새로 게임 런칭하느라 바빴거든. 어페렐 인수했다며?”
(소식 참 빠르네.)
“내가 진성 일에는 관심이 많잖아. 들리는 말로는 네가 어페럴 대표 이사로 간다고 하던데 맞아?”
(의류 사업은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좋은 기회잖아.)
“언제부터 출근할 거야?”
(다음 주부터 나갈 예정이야.)
“구조조정도 한다며? 다 끝난 후에 나가는 게 좋지 않아?”
(대표이사가 되어서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되지. 각오는 하고 있어. 나도 안타깝지만, 회사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잖아. 같이 모두 죽는 것보다는 살 사람은 살아야지.)
애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강단이 있네.
“알았어. 다음에 통화하자.”
(응.)
이전 생과는 다르게 진성 건설은 매각에서 부도가 나 법정 관리를 신청했고 진성 어페럴은 파산에서 매각되고 진성 리조트는 진성 그룹에서 독립하고 모든 게 바뀌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문제는 어르신이 변수였다. 결과까지 나한테 유리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당분간은 지켜봐야지.
다른 계열사 상황도 어떻게 되는지 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