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빛나는.
(70/80)
70화.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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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빛나는.
2023.07.01.
늘 그랬다. 욕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남자는 설희와 둘만 있으면 그 이빨을 드러냈다. 은우는 빠르게 자신에게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뜨거운 입술이 설희를 살짝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설희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반듯한 입술로 이렇게 부를 때면,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이 굉장한 무언가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을 부르는 그의 너른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늘 그렇듯, 또 설희는 그에게 마음을 내주었다.
그렇게 뜨거운 밤이 지나갔다. 달콤하고도 멈출 수 없는 밤이.
***
“아, 긴장이 돼서 미칠 것 같아요.”
설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렇게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제1회 동물보건사 시험 합격 명단이 나오는 날.
동물보건사란, 동물병원 내에서 수의사의 지도 아래 동물의 간호 또는 진료 보조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의 자격인정을 받은 사람(수의사법 제2조 제4호)이었다.
법에 써져 있는 말이 어려워 쉽게 하자면, 즉, 결국 설희가 지금 하고 있는 수의 테크니션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자격증의 이름이 동물보건사였다.
동물보건사는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시행된 적이 없는 자격증으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제가 어떻게 나올지, 얼마나 뽑을지 몰랐다. 그래서 설희는 자격시험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달달 외웠다.
때로는 경력이 긴 매니저를 붙잡고 물어보기도 했고, 병원에서도 점심시간에는 휴식은 제쳐두고 매일 매일 공부에만 집중했다.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참, 은우와 데이트를 즐길 때였지만 시험이 코앞이라 퇴근 후에도 공부를 했다.
다행히 은우는 언제나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녀가 공부할 때면 바로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모르는 게 있으면 알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시험을 보았다.
“설희 씨 진짜 고생 많았는데, 꼭 붙어야 할 텐데.”
발표는 오전 10시.
환견이라도 많으면 좋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은 예약도 없고 병원이 한산했다. 그래서 아침 내내 모두들 초조해했다. 합격 결과를 보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은 설희의 주변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하필이면 오늘은 병원에 잘 나오지 않는 원장 선생님까지 계셨다.
“다들 다른 거 하고 계셔도 되어요.”
더 긴장되는데.
돌마래 동물병원은 이제는 거의 가족에 가까운 관계였다. 워낙 같이 하는 시간이 길고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까
물론 합격하면 다 같이 보는 게 좋겠지만, 만약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초조함에 설희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떨어지면 저 창피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안 떨어져.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어떻게 떨어져?”
맞아, 맞아.
원장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떻게 다른 걸 하구 기다려. 설희 씨 합격 발표가 난다는데.”
“맞아요. 엇, 1분 전이다. 얼른 로그인하고 기다려봐요.”
채린의 말에 자신의 아이디와 비번을 치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등줄기에 서늘한 냉기가 돌았다. 걱정하는 얼굴의 설희 뒤에 은우가 섰다.
조용히,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그의 손이 설희의 어깨에 닿았다. 괜찮다는 듯, 토닥토닥.
여기 자신이 있으니 괜찮다는 듯 위로하는 그의 행동에 설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어떻게 이보다 더 완벽하게 준비해. 난 정말 열심히 했어. 아무래도 동물병원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혹시라도 떨어지면 안 되니까 정말 수능 시험보다도 완벽하게 준비했단 말이야. 내가 떨어지면 세상천지에 붙을 사람 아무도 없을 거야. 할 수 있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고 그녀는 클릭 버튼을 눌렀다.
“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전히 설희는 보지 않아서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설희 씨, 얼른 봐봐.”
“어때요?”
“아, 괜찮아. 얼르은.”
매니저의 재촉에 설희가 눈을 슬며시 떴다. 그러자 설희의 수험번호, i3012이 보였고 [합격]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떠 있었다.
눈을 다시 한번 비빈다.
“정말 합격?”
“설희 씨 축하해. 그렇게 고생하더니 떡하니 한 번에 붙었네.”
“와, 대단해요. 역시 될 줄 알았어.”
다른 사람의 축하에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설희는 자신을 직시하며 빙그레 웃는 은우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합격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희는 은우의 품에 와락 안겼다.
“은우 씨 합격했어요!”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너무 기뻤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은우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러나.
“축하해요.”
평소라면 설희에게 반말로 말할 은우가 조금은 딱딱하게 존댓말로 축하 인사를 건네자,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내었다. 은우는 병원에서는 공사를 구분하기 위해 설희에게 존댓말을 썼다.
내가 무슨 짓을.
여기는 병원이었다. 다행히 보호자는 없었지만 주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데 기쁜 나머지 와락, 은우를 안아버렸다.
“이, 이건.”
설희의 입술이 멎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은우를 밀어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자연스럽게.
설희는 은우를 놓고 나서 두 팔을 벌려 옆에 있는 채린을 끌어안았다.
“다 한 번씩, 그, 감사의 인사로, 저 붙었어요.”
횡설수설하며 채린을 놓아준 뒤, 매니저를 안았다.
“아니, 설희 씨, 우리는 왜 안아.”
“다, 그냥 한 번씩 안는 거예요.”
그리고 또 자리를 옮겨, 외삼촌이자 원장 선생님을 안는다. 다 한 번씩 안고는 놓아주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덕분에.”
그렇게 말하는 설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터질 것 같았다. 합격의 기쁨 때문은 아니었다.
“덕분에 합격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 있다. 특히, 설희가 원내 연애를 숨기려고 노력했던 것을 잘 알았던 매니저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까지 있었다.
아, 망했다.
합격했는데도 망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저는 도대체 뭐가 문젤까요.”
쾅, 설희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오늘, 은우의 진료 보조 담당은 설희였다. 두 사람이 되자마자 흘러나온 약한 말에 은우가 웃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우리 둘이 껴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다 들켰는데.”
“어쩔 수 없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가 시작하려면 10분 정도 남았다. 정신 차리고 진료를 해야지.
“조금 쉬어요. 흥분 가라앉히고.”
“네에.”
그렇게 말하고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설희의 얼굴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물론, 은우와 설희가 사귀는 것을 모두 암암리에는 알고 있었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티가 났다.
두 사람의 눈빛에서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달달한 분위기가 묻어났고, 같은 오피스텔을 산다는 이유로 출퇴근을 같이 했으나 그걸 정말로 믿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설희와 은우는 병원에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우선, 혹시라도 보호자들이 알게 되면 불편해할까 봐도 있었고, 사적인 일은 사적으로, 공적인 일은 공적으로 두고 싶었기에.
시무룩한 설희를 보고 은우가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풀 죽지 말아요.”
“……바보 같았죠?”
“아뇨. 그렇게 잘 해냈는데 바보 같을 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좋았어요.”
“뭐가요?”
“합격 발표 나고 설희 씨가 바로 나 안아준 거.”
“그게 왜 좋아요?”
은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기쁠 때 내가 제일 보였다는 거니까.”
“……그거야.”
설희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하죠. 은우 씨, 아니 선생님을…… 제가.”
또 혹시 밖에 들릴까 봐, 설희는 뒤를 돌아 살짝 망을 보고는 속삭였다.
“좋아하는데.”
사귄 지 반년 정도가 지났다. 알면 알수록, 은우라는 남자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무서운 상사, 그리고 재벌가의 아들. 말도 안 되는 그런 조건의 남자와 사귀어서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걱정이 많았지만 그래도 점점 그가 더 좋아졌다.
요즈음은, 정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당연히 합격 결과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그였다.
설희의 말에 은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잠시, 그녀의 말을 되새기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하얀 가운 주머니에서 네모난 상자 하나가 나온다.
“이거.”
“그게 뭐예요?”
그에게서 검은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 달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 하얀 줄에 끝에 보석이 달랑달랑 달린 목걸이가 보였다. 일견, 심플하게 보였지만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박스 한편에 작게 보일 듯 말 듯 써 있는 브랜드 명을 보고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리에리?”
라리에리는, 실제로 본 적도 거의 없는 하이엔드 명품 쥬얼리였다. 가끔, 유명한 배우가 시상식에 갈 때 착용한다 이런 기사에서 정도나 몇 번 들어봤던.
그 위상에 맞게, 그 목걸이는 단순했지만 아름다웠다. 설희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빛나는 빛이 영롱했다.
“이런 비싼 걸 왜.”
“선물이에요.”
“갑자기요?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닌데.”
설희의 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니었다. 그러자 은우가 씩 웃었다.
“그동안, 설희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그가 손을 뻗어 설희의 손을 잡았다.
“설희 씨가 동물 관리사가 되고, 앞으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했지.”
“네.”
“관련 학교도 더 가보고.”
“……네.”
그래서 은우의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결혼을 조금 미룬 상태였다.
은우가 말을 이었다.
“나,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
“하지만 내 결심을 알려주고는 싶어서. 설희 씨가 준비가 되면, 그때 결혼하고 싶어. 아까처럼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있으면 평생 함께 나누고 싶고. 그런 날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힘든 순간이 있으면 그 순간도 함께 하고 싶어.”
그래서 이 선물을 그 결심의 증표로 당신에게 주고 싶다.
그런 은우의 말이 울려 퍼졌다.
“어디서 줄까 고민을 많이 했어. 좋은 레스토랑, 아름다운 여행지. 하지만 이 작은 2평짜리 공간이 우리의 시작이었으니까, 앞으로의 시작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
생각지도 못했다. 은우가 이런 것을 준비할 줄은.
설희가 말을 잃고 한참을 눈을 깜박이자,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싫어?”
“아뇨, 좋아요.”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나온 설희의 말에 은우의 입꼬리가 느른하게 올라간다.
“좋아요, 저도…… 앞으로 계속 은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설희도 아까처럼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있다면 평생 나누고 싶고, 그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짊어지고 싶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 건.
“그리고 당신만 괜찮다면.”
설희가 말을 이었다.
“결혼도, 하고 싶어요.”
“언제?”
“관리사도 붙었으니 곧.”
공부도 더 하고 싶고, 관련 학교도 가보고 싶었지만 그건 은우와 결혼하고 나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오피스텔에 살아서일까. 이제 그와 떨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때로 혼자 잠이 들어 아침에 혼자 눈을 뜰 때면 외로워서 울적해질 정도였다.
“하고 싶어요, 결혼.”
그 말에 은우가 설희의 손을 꽉 잡았다.
“사랑해.”
“나도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목걸이를 설희의 목에 걸어주었다. 목걸이 끝의 다이아몬드가 마치 두 사람의 미래를 비추듯, 아름답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