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80)


66화
2023.06.17.



“가요, 어서.”

 
그리고 은우와 함께 설희는 집에 왔다. 그다음은 어쩌면 당연한 절차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곰곰이에게 밥을 주고 나서는 숨 쉴 틈도 없이 은우가 설희를 몰아쳤다. 부드럽게, 그리고 진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 손가락으로 설희를 끌어안고 탐했다.
 


“너무 숨이, 차요.”

 
이현을 만나고 나서 설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쌀 한 톨 들어가지 않았다. 설희의 말에 은우는 손수 밥을 지어 먹이고, 그리고. 또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그리고는 까무룩, 설희는 잠에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 늦은 시간이다.

익숙한 듯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곰곰이의 물그릇을 들고 정수기 물을 받아줬다. 몸을 구부리고, 물을 준다. 달빛의 그의 갈라진 그의 등 근육이 드러난다.

꼴깍.

어두운 불빛 속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근육을 보다 보니 왠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왠지 남성적이고, 야릇하고, 그리고…….

곰곰이에게 물을 다 준 은우가 몇 번인가 작은 소리로 곰곰이에게 말을 걸더니, 곰곰이가 만족한 듯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가만히 있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희는 괜히 훔쳐본 기분에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오던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침대 앞에서 멈췄다.


 


“흐음.”

낮게 소리를 내고는 그가 몸을 기울인다.


“설희 씨.”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꼭 감고 들리지 않는 척했다.


“언제까지 자는 척할 거예요?”

“…….”

“아까부터 깨어 있었으면서.”

그 소리에 파르르, 설희의 속눈썹이 떨렸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찬찬히, 눈을 떴다. 이미 어둠에 익숙한 눈동자에 바싹 다가온 옥은우가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설희 씨는.”

그가 손을 뻗어 설희의 콧날을 쓸어내렸다.


“잘 때는 숨소리도 달라요.”

“……헉.”

“다 티 나요.”

그동안 사실, 몇 번인가 자는 척한 적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은우가 자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눈뜰 것 같으면 마치 자고 있었다는 듯, 서둘러 몸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다 들켰단 말인가.


“죄송…… 합니다.”

“왜 자는 척해요?”

“쑥스러워서 그랬어요.”

왠지 그래서.

설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몰래 당신을 훔쳐봤다고 어떻게 말해. 그러자 그는 쑥스러운 것도 모르는 듯, 매트리스 위로 올라와 길게 그녀의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얼굴을 반쯤 덮고 있는 설희의 손을 내렸다. 힘이 풀린 손가락 사이로 비스듬히 웃음을 띤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데요.”

“선생님 보는 게.”

설희가 그렇게 말하니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한참을 설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얕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선생님이란 호칭, 그만둬 줄래요?”

“아.”

“진짜 연인인데 가짜일 때보다도 못한 것 같아. 그때는 최소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는데.”

그래, 친구들 앞에서 은우를 소개했을 때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었다. 오빠, 생각만 해도 낯 뜨거워지는 말이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쑥스러운 말.

오빠라는 이름은 못 부를 것 같다.


“뭐, 뭐라고 부를까요. 부를 이름이 없는데.”

“그럼 이대로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

“계속 사귀면서도, 결혼해서도?”

“결.”

결혼을 이야기하기엔 조금 이른 것도 같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고 선생님이라고 그를 부를 수는 없다.


“그건 그래요.”

“내가 생각해봤어요. 설희 씨가 왜 이렇게 나만 보면 쑥스러워하고 창피해하는지. 모든 건 언어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된 것 같아.”

그가 고개를 숙였다. 쏟아져 있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살랑살랑 설희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음…… 그런 것도 같고.”

설희가 가느다랗게 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숙여 설희의 입술을 살짝 품었다. 붉은 입술이 제 입술에 닿자, 설희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엇.”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번 설희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끝이 곱고, 몸이 흔들린다. 동요하는 설희를 보고 그가 한숨을 얕게 쉬었다.


“거봐.”

은우가 달콤한 키스를 하고는 미간을 비틀었다.


“지금도 입맞춤한 거 정도로 이렇게 놀라면서.”

“…….”

“내가 편하지는 않잖아요, 그렇죠?”

확실히, 그와 있을 때 완전히 편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비춰오는 얕은 빛에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눈이 황홀해질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긴장한다고 느꼈는데, 정말 말 때문일까.

아무래도 직장에서도 함께 있고, 퇴근 후도 함께 있고. 직장 상사와 연인의 스위치를 바꾸는 것이 어렵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보통 연인 사이에 뭐라고 해요?”

“……음. 보통은…… 뭐, 자기야 라고 한다든지. 그러지 않을까요.”

“그럼, 그렇게 불러요.”

“자, 자기야 라고요?”

“네.”

“선생님을?”

“응.”

뭐가 이상하냐는 듯,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렇지만. 뭔가 어색했다.


“자꾸 하면 늘어요.”

단호한 은우의 말에 설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까닥했다.


“해볼게요.”

“좋아요.”

“……자기야.”

설희의 부름에 은우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거봐, 이럴 거면서요.”

“아니야, 내가 뭘 어쨌다고.”

“웃으면서 그래요, 웃을 거면서.”

“안 웃을게, 이제 안 웃을게요.”

“싫어요.”

설희가 몸을 홱 돌려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설희를 끌어안았다. 쿡쿡,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함이 기분 좋아 설희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평온한 시간이 지나갔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은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엄청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요?”

“…….”

알면서도, 여러 번 들은 말이면서도 가슴이 쿵, 떨어진다.


“알아요?”

“……아, 알 것 같아요.”

“근데 왜 내가 약혼자가 있다는 오해를 했어요.”

무심코, 그의 입에서 원망이 흘러나왔다.

그러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표현, 어떤 것을 생각해도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선, 선생님이 그런 집안의 사람인 것을 몰랐으니까 그걸 알게 되서 놀란 마음도 컸고.”

“그리고?”

“재벌…… 이라 하면 별일 다 생기잖아요.”

“그래요?”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그가 물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텔레비전에서 나오잖아요.”

커오면서 재벌에 대해 보고 배운 거는 다 그런 내용이었다. 기업과 기업간의 정략적인 결혼, 숨겨놓은 서자, 버려진 애인…… 이런 거.


“출생의 비밀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건, 드라마 이야기잖아요.”

은우의 타박에 설희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꼭 드라마 이야기만은……. 얼마 전에도 ㅇㅇ그룹 회장이 20년 된 애인이랑 해외여행을 갔다고 난리던데. 그 회장이 결혼하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정략결혼 한 뒤에 내내 밖으로 떠돌았다고.”

“아. 뭐, 그런 집도 있겠죠.”

설희의 말에 은우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근데 우리 집은 아니에요. 평범한.”

“은우 씨는 평범을 몰라요.”

그 할머니 집도 평범하다고 불렀던 남자가 아닌가. 설희의 비난에 은우가 또 웃었다. 그도 아까의 대화 때는 긴장했었던 걸까. 웃음이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서로 피부를 맞대고 있더라니 웃음이 헤퍼진다.


“그래요, 나는 평범을 모를지도 몰라요.”

“…….”

“하지만 그런 일은 안 할게요. 그럴 재주도 없어요.”

그리고 그가 설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상한 거 의심하지 말아요.”

“네. 그럴게요.”

“오늘 바로 와서 말해준 건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도 빨리 알고 싶었어요.”

말하기 잘했다. 말하지 않았으면 오늘 내내 그를 의심하고, 자신의 갈 곳 없는 망상은 더 크게 부풀어져서 서로를 괴롭게 했을 것이 분명했다.


“응, 그렇게 해줘요.”

그의 다정한 말에 설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깊은 잠에 빠졌다.

***

은우의 오늘은 나쁘지는 않은 아침이었다.

오늘 아침, 눈에 깨보니 설희가 품 안에 있었다. 같이 일어나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출근하는 일상.

그녀에게 집을 빌려주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정말 잘한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아침에도 흠집은 있었다. 병원에 출근하고 나자마자, 불쾌한 경험을 했다.


“아.”

은우는 돌아서는 길이라 다가오는 사람을 못 보았다. 제 몸에 턱, 부딪치는 몸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형이었네요. 죄송.”

이현은 직선거리로 오는 것이라 은우의 행적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일부러 부딪친 게 분명한 행동에 은우의 입꼬리가 비틀렸으나, 곧 표정을 지웠다.

이현과 사이가 나빠진 이후로 생기는 이현의 도발은 저급하고도 일차원적인 것이었다.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더욱 그를 자극한다.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마침 할 이야기가 있어 은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 최이현.”

“응, 왜요?”

얼굴에는 밉상스레 웃음을 띠고 있다.


“오늘 점심, 시간 있어?”

“어, 왜요.”

“할 말이 있어서.”

“지금 해요.”

“곧 진료야.”

은우의 눈이 9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시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면 진료 끝나고 만날까요? 술이나 한잔해요?”

하, 자신이 왜 만나자고 할지 알면서 저렇게 말하는 입술이 참 얄미웠다. 사람에 대해 호불호가 크게 있지 않은 은우였지만, 예전에는 그를 후배로서 아꼈던 그였지만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


“너랑 할 개인적인 이야기 없어. 점심시간에 내 방으로 와.”

그때 알려줄 테니까.

차갑게 말하고는 은우는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

달칵, 달칵.

은우의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무미건조하고 클릭하는 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12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간, 문이 열리고 이현이 들어왔다.


“찾았어요?”

의자에 느른하게 기대 앉아 있던 은우가 턱을 추어올렸다.


“응.”

이현이 반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부른 이유가 뭐예요?”

이현이 씩,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내가 맞춰볼까요?”

“…….”

“설희 씨 때문이죠?”

은우가 모니터를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

“이것 때문이야.”

화면 위에 떠 있는 내용을 보고, 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의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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