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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무르익어가는 (20/80)


20화. 무르익어가는
2023.01.07.


한참 그녀의 상처를 보던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파상풍 예방 주사 맞은 적 있어요?”

“아니요. 어렸을 때는 맞았을지도 모르는데.”

“파상풍은 10년마다 맞아야 해요. 얼른 가서 병원 닫기 전에 예방 주사 맞고 와요. 상처가 커서 꿰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말투에는 가시가 없었다. 잔소리가 쏟아지며 정신을 어디 뒀냐는 둥 혼이 날 줄 알았던 설희는 의외의 말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왜 이렇게 친절하지. 혹시 이대로 퇴근하면 더 혼나는 거 아니야? 병원에서 실수하고 혼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 퇴근 시간 아닌데요. 끝나고 갔다 올게요.”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는 설희에게 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의 다 끝났으니 가보세요. 부원장님께는 내가 말씀드릴게요.”

그러고도 남자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작은 손을 만지작만지작, 상처 주변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을 상처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쓸어내렸다.

침묵이 내려앉은 시간.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지금 언제든 사람이 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설희가 몸을 움츠렸다.


“서, 선생님. 여, 여기 병원인데.”

“……그게 뭐요?”

“사람들이, 보게 되면.”

그와 손을 잡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밖에서, 익숙해지기 위해 한 거였다. 여기는 병원이고,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없다.


 


“유설희 씨, 이렇게 다쳐놓고 지금 사람들이 보는 게 중요해요?”

“…….”

“덧날 수도 있는데.”

단호한 말에 설희는 입을 다물었다.


“보정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다치고 나서는 치료가 중요하고.”

“…….”

“일보다, 유설희 씨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야기예요.”

은우의 다정한 말에 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희 씨가 제일 중요해.”

생각지도 못한 다정한 말이었다. 은우의 말에 설희의 볼이 터질 것 같았다. 거울도 없지만 제 얼굴이 붉어진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죠. 내가 병원에서 딱딱거려서, 혹시 그런 오해를 줬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치면 숨기지 말아요.”

“…….”

“나도 예전에 개에게 물린 적이 있어요.”

“옥 선생님이요? 실수 같은 걸 안 하실 것 같은데.”

의외였다. 은우는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수의사로 태어난 것처럼 언제나 완벽했다.

꽤 까다로운, 소형견의 혈관 찾기도 다른 사람들이 애먹을 때도 한 번에 성공하던 그가 아니던가. 난이도가 높은 수술도 돌마래에 오면 무조건 그의 담당이 되었다.

설희의 물음에 은우가 미간을 좁혔다.


“당연하죠. 난 뭐 태어났을 때부터 수의사였는 줄 압니까?”

“……사실은 조금, 그렇게 보여요.”

설희의 말에 그가 픽 웃었다. 그리고는 팔뚝을 걷어 올려 보였다. 단단하게 힘줄이 솟아오른 팔에 10cm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에게 물렸어요.”

“래브라도한테요?”

래브라도는 온순하기로 소문난 견종이었다.


“그러니까요. 나도 물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낯선 곳이고 아파서 그런지 물려버렸어요.”

“……그런 일도 있군요.”

“그러니까 혹시 다쳤을 때 숨기고 그러지 말아요.”

“…….”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다정했다.


“걱정되니까. 그러니까 얼른 가요.”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입안이 속절없이 달았다.

***



“그 남자,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인경의 말에 설희는 마시던 맥주를 웩, 토할 뻔했다.

오랜만에 친구 인경과 만나서 치킨을 먹었다. 다소 정신없는 요즈음이었지만, 친구들 모임 전에 인경에게 말해야 할 것들도 있었고 요즘 사건이 너무 많이 터져 긴급회의가 필요했다.

문제는, 강아지에게 물려 다친 손가락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아물기도 전에 술을 마시면 은우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맥주를 빼놓을 순 없었다.

어떻게 맥주를 안 마셔, 치킨인데. 치킨엔 맥주지.

그러나 인경이 불쑥 던진 놀라운 말에 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그 남자, 다정해도 너무 다정한 거 아냐? 너 좋아하는 거 아니면, 진짜 이상한 건데.”

요즘 바빠서 인경과는 통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 있었던 일 회포를 풀었다.

우선, 인경에게는 찬정에게 동물병원 주소를 알려준 것에 대해 사과부터 받아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만나자마자 인경은 거의 무릎을 꿇으며 “미안해!”하고 소리쳤다. 찬정이 너무 집요하게 물어봐서 자신도 모르게 병원 이름을 말해버렸다며, 실수였다며.

그렇게 그녀를 용서하고 나서는 다시 보통의 친구 사이로 돌아갔다.

찬정과 헤어진 이야기, 그리고 찬정과 이야기하다가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옥은우 선생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염두에 둔 연애 중이라고 했다는 이야기. 그러다 보니 요즘 같이 데이트하고 오늘 다쳤는데 혼도 안 내서 신기하더라며, 하는 잡담까지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인경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런데 찬정과의 이야기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는데, 인경은 그저 은우의 이야기에 고개를 쑥 꺼냈다.


“그 사람 몇 살인데?”

“33살.”

“올, 딱 좋은데. 잘생겼어?”

“…….”

인경의 질문에 설희는 입을 다물었다.

잘생겼냐면.

응, 잘생겼지.

그런데 그렇게 말했다가는 인경이 뭐라고 할지 뻔히 알아서 말을 줄였다. 그러자 인경이 더 달라붙었다.


“못생겼어?”

“못생긴 건 아니구.”

“잘생겼어?”

“……응. 굳이 말하자면.”

“키는?”

인경의 계속되는 질문에 손을 흔들었다.


“아이, 참. 야, 관심 꺼. 뭔 호구 조사를 그렇게 하냐.”

“왜? 아…….”

인경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탐낼까 봐? 아냐 아냐. 네가 찍은 남자에게 내가 그럴 순 없지.”

“아니!”

버럭, 설희가 소리를 질렀다.


“아냐. 그런 거.”

“왜? 잘생겼다며.”

“그렇기는 한데. 그게 다야. 하여튼 우리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너한테 관심 있어. 애초에 관심 없는 여자와 계약이든 뭐든 연애하고 데이트하겠니.”

“나도 하는데 뭐. 나도 옥 선생님에 대해 아무 관심 없잖아.”

나도 옥 선생에게 아무 생각 없는데, 이렇게 만나고, 데이트하고, 그러잖아.

그렇게 말하자 인경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맥주를 원샷하는 설희를 빤히 쳐다봤다.

두 사람은 소싯적엔 머리채 붙잡고 싸운 적도 있지만 이제는 둘도 없는 베프였다. 설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어쩌면 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친구였다.


“정말 관심 없는 거 맞아?”

“어?”

“이리 와봐.”

인경이 손을 뻗어 설희의 뺨을 확 잡았다.


“왜, 왜 이래 갑자기.”

“너 그 남자 이야기하면서 막 히죽거리는 거 알아?”

“뭐?”

“뭔가 입이 둥글둥글하게 좋아 가지고. 너 얼굴에 다 드러나.”

“무슨 소리야.”

그러자 인경이 벽 쪽에 있는 거울로 설희의 고개를 돌려 보여줬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다.

평소의 모습과 조금 다르기는 했다.

또다, 또.

지난번에 찬정이 자신을 보고 얼굴에 거짓말을 하는 게 다 드러난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다 드러난 모양이다.


“아니, 아니.”

이번에는 다르다. 진짜 옥 선생을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나저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설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경은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가만히 냅두면 언제까지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인경의 그릇 위에 치킨을 한 조각 턱, 올려 주며 말을 돌렸다.


“이번 주말이 우리 애들 모임이잖아.”

드디어, 이번 주 주말에 대망의 친구들 모임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식사와 데이트로 은우와 친해지기는 했지만 과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 전까지는 말을 놓기로 했는데, 결국은 질질 끌다가 당일이 다가왔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말도 놓고, 연기할 준비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할 것 같아 설희는 인경에게 치킨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데, 네가 나 좀 도와줘. 잘 속일 수 있게. 바람도 잡아주고.”

“알았어, 그거야 걱정하지 마. 찬정이가 너한테 그랬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드디어 이번 주말 네 새 애인을 보는구나.”

“애인이 아니고, 그니까 그날만이야.”

딱 잘라 말했지만 여전히 인경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래, 그날만 네.애.인. 얼마나 잘생겼는지 궁금하다.”

그러면서 인경은 히죽 웃었다.


 


“내가 못 살아.”

오늘은 분기마다 한 번씩 있는 대학 친구들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찬정과 대면하는 날. 그의 콧대를 눌러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하고 은우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런데 설희에게는 아침부터 수난이 이어졌다.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그만 넘어지셨다. 발목을 삐끗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정형외과에 다녀왔더니, 약속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되어버렸다.


[선생님. 죄송한데 약속 장소에서 만나요.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요.]

연락을 해놓고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최고로 예쁘게 하고 가서 찬정에게 차이고 난 뒤에도 친구들에게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시간이 촉박해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한 게 다였다. 겨우 약속 5분 전, 만나기로 한 음식점 앞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반갑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


“설희야.”

속내는 감추고 환히 웃는 얼굴. 찬정이었다.

으이그.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이다. 하필이면 얘부터 만나다니.

설희는 그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려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자, 그가 설희의 어깨를 잡았다.


“혼자 왔네?”

“그 손 치워.”

지겨웠다. 이런 실랑이 자체가.

애초에 찬정이 아니었다면, 회사를 그만둘 일도 없었을 거고 옥 선생과 거짓 연애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오늘처럼 긴장할 필요도 없었겠지.


“너 그럴 줄 알았어. 그날 한 말, 다 거짓말이었던 거지? 그러게 왜 자존심을 세워.”

“아니거든. 오늘 같이 오기로 했거든?”

“근데 왜 혼자 왔어?”

“그게 아니라.”

와서 만나려고 한 거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열받았다. 설왕설래도 짜증이 난다. 소리를 꽥 지를까 하던 참에 음식점 문이 벌컥 열리며 남자가 하나 나왔다.

누구지?

순간 그렇게 물을 정도로, 찬란한 외모의 남자가.


“설희야.”

“…….”

“도착했는데 왜 안 들어오고 있어.”

다정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보고 싶었는데.”

은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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