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질투,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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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질투,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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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질투, 해줘요.
2022.12.13.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시끄럽게 질문했던 미진의 입조차 다물게 해버릴 정도의 힘이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싱긋 웃고는 탈의실로 가버렸다. 은우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것과는 달리, 설희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 남자?
“단단히 미치셨구나, 옥 선생님이. 그 여자에게.”
“그러게요.”
“저런 말 하시는 거보니 단단히 미쳤어. 우리는 옥 선생님이 여자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냥 적당한 여자를 못 만난 거였어.”
옥 선생님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설희가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설희의 질문에 혹 은우가 들을까 봐 미진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병원에 들어오고 벌써 4년인가? 4년 동안 여자 이야기 하는 걸 못 봤어. 누구를 만난다, 이런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고 오고 가는 여자에 관심이 1도 없고. 솔직히.”
힐긋, 은우가 혹시 나오지는 않는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한 뒤 미진이 말을 이었다.
“저 외모면 누구든 골라잡아 만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왜에, 한 달 전에 우리 병원에 되게 예쁘게 생긴 보호자님이 오셔서 전화번호를 주셨는데, 딱 잘라 거절했었잖아. 여자 만날 생각 없다면서.”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한 달 전쯤인가, 긴 생머리를 하늘하늘 날리는 미녀가 하얀 털이 복슬복슬 예쁜 스피츠를 데리고 왔었다.
은우에게 진료를 받고는 내내 그녀는 옥 선생의 얼굴에서 시선을 못 떼더랬다. 그러다가 가기 전에 혹시 여자친구 없으시면, 연락 달라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좀 곤란할 것 같네요.”
라고 고개를 저었었지. 그때를 회상하며 미진이 말을 이었다.
“아니, 예뻐도 너무 예쁜 여자분이었잖아. 내가 남자기만 했어도 한번 사귀어보고 싶더라니까?”
미진은 당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생님이 눈이 높은가, 아니면 게이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게 보호자라서 거절하는 건가 막 여러 생각을 했는데 좋아하는 분이 있으셨구나.”
“어떤 여잘까 궁금하네요. 그죠? 그 까다로운 옥 선생님이 좋아한다는 분이면.”
“얼굴부터 다 마음에 든다니 엄청 예쁘겠지.”
흘깃,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설희는 바라보았다. 평범하디 평범한 얼굴. 그러다가 작게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러게요.”
설희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나와도, “그러게요.” “그렇군요.”이런 말을 하는 게 다였다. 무슨 말을 할까.
그에게 여자가 생긴 것만으로도 이렇게 하루 종일 난리인데, 그 상대가 나라는 것을 들키면.
이 정도 소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
설희의 친구들과 만나기 전, 그리고 은우의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기 전에 두 사람은 조금은 더 친해지기로 했다.
지금 이 상태라면 거의 남과 같은 친밀도였으니까.
주말에는 데이트를 하고, 그리고 주중에는 같이 퇴근을 하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좀 떨어진 주차장에서 그의 차에 탄 뒤, 은우가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의 차 문을 열고, 옆자리에 올라탔다. 언제나 그렇듯, 서늘하게 저를 바라보는 은우와 달리 설희의 표정은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요.”
“옥 선생님도요. 근데, 왜 오늘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설희의 질문에 핸들을 돌리며 은우가 답했다.
“무슨 말?”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느니, 얼굴부터 다 좋다느니…….”
“기분 나빴어요?”
“그런 건 아닌데.”
쑥스러워 죽을 뻔했다.
은우와 이 연애 아닌 연애, 가짜 관계를 시작하고 나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널이 뛰고 제명에 못 살 것 같은 일뿐이었다.
“좀 창피해서요. 온종일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기인 것을 알면서도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설희의 그 말에 은우가 입꼬리를 말려 올려 웃었다. 천천히 지는 햇살이 그의 깎아지른 듯한 콧날에 닿아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왜 설희 씨가 창피해요?”
“…….”
“설희 씨라고 말한 적 없는데.”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아, 어, 저.”
당황해 이상한 말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오늘 했던 대화 내용을 머릿속에서 자세히 복기해보았다.
“네, 생겼습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글쎄요.”
“…….”
“그 여자가 그냥 다 좋네요.”
“…….”
“얼굴부터 모든 게.”
생각해보니, 여자랑 원더풀랜드에 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는 이야기를 했지만 원더풀랜드에 같이 간 여자가 좋아하는 여자라고는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대상이 유설희라고는 더더욱 말한 적이 없고.
설희는 지금까지 은우가 한 모든 말들이 그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을 말한 거라면 대단한 착각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세요?”
너무 놀라, 설희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그러니까, 은우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야 뭐 그럴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러면서 저랑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나랑 지금 이렇게 퇴근도 같이하고, 주말에 데이트도 한다는 말이야? 아니,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할머니께 말씀드리면 되는 일 아닌가.
그때 봤던 사진 속의 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다른 여자 있으니 그 여자랑 만나자고. 그러면 되는 일이잖아.
아니, 애초에 그가 여자친구가 없다고 했던가? 여자친구 있는데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여자친구가 있으시다든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당황해 반쯤은 헐떡이며 물어보자, 평소답지 않은 설희의 반응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쿡쿡, 몸을 울린다.
“아뇨. 다른 여자 없어요.”
정신이 뱅글뱅글 돌았다.
“미안해요. 설희 씨 너무 당황하길래. 나도 모르게.”
“농담하신 거예요.”
잠시 신호에 선 동안, 은우가 고개를 돌려 설희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비틀려 올라간다. 고개를 살짝 까닥하고는 말을 이었다.
“유설희 씨 이야기한 거 맞아요.”
“……아.”
“오늘 한 이야기, 다 유설희 씨 이야기예요.”
그 말에 설희의 입이 닫혔다.
아까는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서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는데, 이제는 제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네, 생겼습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글쎄요.”
“…….”
“그 여자가 그냥 다 좋네요.”
“…….”
“얼굴부터 모든 게.”
둥둥, 아까 그 말들이 다시 귓가를 울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반듯한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러니 걱정할 거 없어요. 다른 여자는 없으니까.”
“걱, 걱정 안 했는데요.”
“그래요? 해줬으면 좋겠는데.”
담담하게 말하고는, 신호가 바뀌자 그는 다시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아 달리기 시작했다.
질투해줬으면 좋겠다고?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도시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신호 한번 걸리지 않고 눈앞이 뻥 뚫렸다. 뱅글뱅글 도는 제 마음만큼이나 빠른 차의 질주.
옥 선생님, 무슨 소리를. 설마 날 좋아한다는 건.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한 말이겠지.
툭툭, 별생각 없이 던진 듯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설희의 입술을 막는다. 당황해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은우가 물었다.
“화났어요?”
“아뇨, 화는 아니라.”
“미안해요. 당황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사정이 그렇게 됐어요.”
“어떤 사정이요?”
“진호는 우리 할머니와 아는 사이거든요. 여자친구가 있고, 푹 빠진 걸로 해두면 좋겠다 싶어서. 채린 씨랑 진호랑 만나게 될 거니 병원 내에도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채린 씨가 그 상대가 저인 걸 알게 되는 거 아니에요?”
채린 씨가 비밀로 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비밀이란 것은 언젠가 새어나가기 마련이었다.
“물론, 진호에게 사실 병원 내 연애니까 설희 씨 정체는 숨겨달라 말은 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말을 했고, 사랑에 빠진 척을 했다.
그런 것뿐이다.
그런 설명에 그제야 벌렁이던 설희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작게 속삭이는 설희를 보고 은우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오늘 병원이 시끄러웠나 봐요? 설희 씨가 곤란할 정도로.”
“……네, 말도 아니었어요.”
“하하.”
은우가 움직이기만 하면, 다들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고 그의 근황을 살폈다.
맨날 일만 하는데 도대체 여자는 어디서 만난 건가, 혹시 병원에 오는 보호자 중에 한 명은 아닐까.
아니, 혹시 대학시절의 동창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핸드폰에 전화라도 오면, “여자친구인가 봐.”하며 쑥덕댔다.
“심지어 오늘 환자도 별로 없어서 다들 한가해서 더 그랬나 봐요.”
“그랬구나. 며칠 후에는 좀 가라앉겠죠.”
“그래야 될 텐데요……. 진짜 그래야 될 텐데.”
그와 데이트한 사실이 알려지면 비단 병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돌마래 동물병원의 원장은, 설희의 외삼촌이었다. 그가 은우와 설희가 데이트한 사실을 알게 되면 엄마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러면…….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설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하튼 병원에서는 조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거든요.”
“조심할게요. 절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러다가 두 사람이 탄 차가 설희의 집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멈췄다. 기어를 P에 두고, 그가 물었다.
“지난주에는 내가 하고 싶은 데이트 했는데, 이번 주는 뭐 하고 싶어요?”
“글쎄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설희의 질문에 남자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유설희 씨는 언제까지 날 선생님이라고 부를 겁니까?”
“네?”
“친구들 앞에서도 선생님이라고 부를 생각은 아니겠죠?”
“아.”
그것도 그렇다. 그냥 남자친구도 아니고, 결혼을 염두에 둔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면 선생님이라고 계속 부르는 것은 이상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편하게 불러요, 설희 씨 입이 가는 대로.”
“네. 뭐라고 부르지…….”
고민하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설희는 문득,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 편하게 부르셔도 되어요.”
“뭐가 좋겠어요?”
“그냥 이름? 반말 쓰셔도 되어요. 사석에선. 어차피 제가 선생님보다 4살 어리잖아요.”
“아. 그럴까.”
“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설희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설희의 안전벨트를 달칵, 풀어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화이트 머스크의 향이 폐부를 가득 메운다.
“유설희.”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설희야.”
참 다정하게도, 그는 자신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