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좋아해요.
(12/80)
12화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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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좋아해요.
2022.12.10.
순간, 병원의 대기실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어머나.”
그 침묵을 깬 것은 미진이었다.
“꺅, 지금 들었어? 생겼대, 좋아하는 여자가!”
미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지르며 옆에 있는 설희 등짝을 툭, 쳤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눈이 번쩍했다.
“앗. 아파요.”
“어머, 미안해요, 설희 씨. 그 차가운 옥 선생님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니 너무 신기해서. 진짜, 진짜 미안해.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해, 정말 미안해.”
도가 넘게 놀란 것은 미진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채린도 “와, 이런 희소식을. 우리만 알 수 없죠. 저 안에 있는 부원장님께도 전해드려야지.”하고 쪼르르 달려갔고, 무엇보다 설희는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왜 사람들 앞에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선언을 한 거야. 은우를 째려보듯 바라보았지만, 그는 설희의 시선을 보고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일이 커져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
오전 진료가 끝나갈 때 즈음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은우의 핸드폰이 띠링, 울렸다.
[은우야,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나 오늘 휴일이라 시간이 많거든.]
진호에게서 온 문자였다. 은우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그 문자를 내려다보았다.
진호와는 티격태격하긴 해도 퍽 친한 사이였다. 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 가장 친한 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지난주 원더풀랜드 건도 그렇고, 일부러 병원까지 지갑을 가져다줬으니 식사라도 한번 사는 게 좋겠다 싶어, 은우가 간단하게 답장했다.
[좋아, 내가 살게.]
그러자 생각지도 못하게 빠른 답장이 핸드폰에 떠올랐다.
[아냐, 내가 살게.]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갑자기?]
이진호가, 밥을 산다고?
진호는 은우를 놀리는 것을 좋아해 그를 늘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밥을 사달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 진호가 먼저 무언가를 쏜다고 한 적은 그와 알고 지낸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거기다가 지금은 은우가 신세 진 다음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가 먼저 나서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니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는 없었다. 진호가 답했다.
[어, 내가 꼭 사고 싶어.]
[왜?]
[나도 좀 부탁할 게 있거든.]
[뭔데?]
[만나면 말할게. 1시에 너희 병원 앞 스시 집에서 보자!]
그렇게 온 뒤, 마음이 얼마나 급한지 연달아 한 번 더 문자가 왔다.
[꼭 나와!]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진호가 이런 녀석이 아닌데.
은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진호가 고른 음식점은 서초에서도 비싼 편에 속하는 스시집이었다. 런치도 기십만 원 하는 고급 레스토랑.
진호가 이런데 올 리가 없는데.
나무로 된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자 은우의 쌓인 불안만큼이나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진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은우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녀석의 속내를 엿보려 했다. 그러자 그는 조급하게 손을 휘이휘이 저었다.
“여기라니까. 나, 여기.”
“……어, 그래.”
돈이라도 빌려달라 그러려나. 뭣 때문에 저렇게 다급해 보이는 걸까.
아니, 그가 돈을 허투루 쓸 리가 없다. 만약 빌려달라고 해도, “도련님 돈 많지. 좀만 빌려주라.” 하고 호탕하게 말할 녀석이었다. 궁금했다.
녀석의 속내가 무엇인지. 쓸데없이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을 싫어하는 은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어, 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놀라 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은우가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쳐서 이렇게 비싼 데서 밥을 산다고 했어?”
“아니, 그, 저 우리 도련님 입맛에 맞는 곳에서 밥을 사야지. 한 번을 사더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은우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럴 수도 있지, 순순히 납득하기에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이였다. 은우의 날카로운 말에 진호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있잖아, 은우야. 그게.”
늘 호탕한 녀석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뭔데.”
“저기 그게.”
“아, 뭔데, 도대체.”
속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은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제야 녀석은 고백을 했다.
“나, 여자 좀 소개시켜 줘라.”
“여자?”
뜬금없는 녀석의 말에 은우는 미간을 좁혔다. 여자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바로 은우였는데 그런 자신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니. 진호가 말을 이었다.
“오늘 병원 갔는데, 그. 거기 있던 여자분이 너무 내 타입이야.”
그리고 진호는 덥석, 은우의 손을 잡았다.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옮겨온다.
“뭐 하는 거야, 이진호.”
“제발. 소개 한 번만 시켜 주라. 내가 전화번호 묻고 그러고 싶은데, 나 그런데 재주 없는 거 알잖냐. 나 이런 거 부탁 안 하잖아. 나 진짜 안 하잖아.”
사실이었다. 진호는 여자를 사귀고 이런 데 있어서 좀 목석같은 면이 있었다. 이런 부탁은 그가 누구에게도 하는 것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병원 내에서 이런 일에 얽히는 것은 난감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더라. 그에게 잡힌 손을 휙 빼며, 은우가 말했다.
“누구.”
“뭐?”
“거기 여자 여럿 있었잖아. 누구 말하는 건데.”
설마 그날 봤던 유설희는 아닐 거고, 매니저인 미진이나 테크니션인 채린 씨일 확률이 높았다. 은우가 단칼에 거절하지는 않자, 그가 화색을 띠고 답했다.
“그, 단발머리인…….”
“아아.”
누군지 알아챈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채린 씨였다. 상대가 누군지 알자마자 딱 잘라 거절했다. 은우의 반응에 진호가 고개를 쑥 빼 들었다.
“왜? 남자친구라도 있어?”
“채린 씨, 24살이야.”
“뭐?”
“24살밖에 안 됐다고.”
남자친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 30살이 된 진호에게는 어려도 너무 어렸다. 채린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그녀를 봐온 은우 입장에서는 그녀가 아직도 어려 보여서 썩 내키지 않았다.
“6살 차이가 어때서. 어? 예전에는 6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고.”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4살 차이지, 그건.”
빈틈을 주지 않는 은우의 대답에 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
“…….”
“하……. 진짜 너무 좋은데.”
보란 듯이 풀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는 한참을 멈추어 있었다. 한숨이 얼마나 긴지 꼬리를 문다.
머리가 지끈, 아팠다.
학생 때부터 내내 투닥거리기는 했지만, 진호는 좋은 놈이었다. 좀 덩치가 크긴 했지만, 생긴 것도 멀끔하고, 탄탄한 직장에 매너도 좋았다. 속도 깊고.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은우는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명함. 채린 씨에게 전해만 줄게. 그리고 연락 안 오면 영영 관심 꺼. 거절당하고도 채린 씨에게 집적대면 가만 안 놔둘 테니까.”
“앗, 진짜! 전해주는 거야? 고마워. 난 그거면 돼.”
진호는 화색을 띠며 은우에게 명함을 건넸다. 은우가 명함을 뺏듯이 받고는 지갑에 넣었다.
“밥은 더치페이로 해. 너한테 밥 얻어먹을 짓 한 거 없으니까.”
괜히 빚진 것처럼 소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은우는 그제야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
목 막힌다, 목 막혀.
점심시간, 설희는 입맛이 없어 대충 사온 삼각김밥을 입에 넣었다. 물을 들이켜는데도 불구하고 밥이 퍽퍽한지 목이 콱 막혔다.
아니, 삼각김밥 때문이 아니다. 지금 설희의 목이 콱 막힌 이유는 오늘의 빅 뉴스 때문이었다. 아침에 진호의 방문으로 시작된, 옥 선생의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온종일 병원 내를 잠식했다.
“옥 선생님 여자 생겼대.”
“들었어, 나도.”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쑥덕거렸다. 워낙 별사건 사고가 없는 곳이 돌마래 동물병원이었다.
일하는 직원 수가 고작 10명 내외기도 하고, 사이가 좋기도 해서 평소에는 사건 사고가 없었다. 그런데 던져진 폭탄, 옥 선생의 연애 이야기. 당연히 관심이 모일 수 밖에는 없었다.
“설희 씨, 너무 신기하지 않아?”
“……네에.”
은우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냥 이 모든 것은 은우의 조모와 설희의 친구들을 속이기 위한 거짓이라는 것, 그리고 그날 원더풀랜드에 같이 간 것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당신 눈앞에 앉아있는 이 유설희라는 것.
그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해 그냥 설희는 말을 삼켰다. 별 반응 없이 말을 넘기자 미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희 씨는 별로 안 신기한가 봐.”
“하하.”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해서 냅킨으로 입만 닦았다.
“그럴 수도 있죠, 설희 씨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옥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 근데…….”
채린이 사온 도시락을 다 먹고는 고개를 들었다.
“근데, 옥 선생님은 오늘 어디 가셨지? 점심에 약속 있으신가?”
“응, 친구분이랑 점심 드시고 온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은우였다.
“어, 옥 선생님. 돌아오셨네.”
“네. 다녀왔습니다.”
아까 나갈 때 평온했던 모습과는 달리, 어딘지 심기가 불편한 모습의 얼굴로 은우가 들어왔다. 들어오고 나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왜 갑자기 한숨이세요?”
미진의 물음에 은우는 난감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채린을 향했다.
“채린 씨. 거절해도 좋고 바로 버려도 좋아요. 근데 이미 부탁을 받아서.”
“무슨 일이신데요?”
“아까 병원 왔던 내 친구가 채린 씨가 마음에 든다는데, 혹시 관심 있으면 한번 연락해달라고 하네요.”
“아.”
“자, 여기 명함.”
그리고 은우는 명함을 내밀었다.
“우와.”
그 옥 선생님 친구가 채린 씨를 마음에 들어 하는 구나. 신기해하며 설희와 미진은 채린 주변에 모여들었다.
채린은 당황하면서도, 그의 관심이 싫진 않았는지 명함을 든 채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연락해볼게요.’하고 꾸물꾸물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채린 씨 어디에 반한 걸까?”
“역시 예뻐서 아닐까요?”
“그렇지? 우리가 봐도 채린 씨는 너무 예뻐.”
그렇게 왁자지껄 한참 떠들다가, 미진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은우를 바라보았다.
“옥 쌤은 어디가 좋으셨어요? 좋아한다는 여자분. 궁금하네요. 옥 선생님 취향이.”
갑자기 자신에게 몰린 관심에 은우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옥 선생님도 역시 얼굴? 엄청난 미인인 거 아냐?”
그가 자신을 진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설희의 입안이 바싹 탔다. 그러자 은우의 시선이 미진에게서부터 스르륵, 설희에게로 옮겨왔다. 입꼬리를 살짝 비틀면서 은우가 말했다.
“글쎄요.”
“…….”
“그 여자가 그냥 다 좋네요.”
“…….”
“얼굴부터 모든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