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결혼을 약속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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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결혼을 약속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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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결혼을 약속한 사이
2023.06.09.
태혁이 벌컥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여인이 놀라서 일어났다.
태혁도 의료진이 아닌 사람이 있는 걸 보고 멈칫했다.
나영과 닮은 얼굴만 봐도 나영의 어머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기에.
“아! 혹시 그쪽이 최태혁 교수?”
심지어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자 태혁은 겁을 먹은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아직 나영의 아버지를 만났던 충격이 남아 있었나 보다.
태혁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나영한테 시선을 주었다.
“자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서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잠들었어요. 미안한데 지금은 못 깨우겠네요.”
태혁도 굳이 깨울 생각 없었다.
나영이 괜찮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태혁이 인사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서연희가 붙잡듯이 말했다.
“가지 않아도 돼요. 그 사람은 안 올 테니까.”
그 사람이 나영의 아버지를 말하는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회사로 아버지 찾아갔다가 쓰러졌거든요. 면목 없어서라도 못 오지.”
문을 열려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태혁은 등을 보인 채 나영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가 누구 손자인지 남편분이 말씀 안 하시던가요?”
그러니까 그를 보고도 싫은 내색을 안 하는 거라고 태혁은 생각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영이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지.”
뜻밖의 말에 태혁은 고개를 돌려 다시 서연희를 보았다.
그녀는 잠든 나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딸의 평안을 바라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렇게 다르구나.
태혁은 부모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 처음 느꼈다.
서연희가 고개를 돌려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고요한 눈빛에 어느새 결연한 결기 같은 게 느껴졌다.
“두 사람 결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시켜줄게요.”
어머니의 이런 맹목적인 지지를 받을 줄은 몰랐기에 태혁은 그저 얼떨떨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질문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저희 결혼하나요?”
“…….”
“…….”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태혁은 바로 정정했다.
“네! 시켜만 주시면 정말 잘하겠습니다.”
안에서 워낙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화해서 밖에서 훔쳐 듣고 있던 레지던트들은 마지막 최태혁 교수의 말만 또렷하게 들었다.
“지금 최태혁 교수가 누구한테 아부하는 거야?”
“이 안에 문나영 어머니밖에 없을걸.”
“이야! 최태혁 교수 이제 보니 기회주의자네. 대기업 전무 사모님인 걸 알고 바로 아부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 백수 남친이 사실은 최태혁 교수님인 거 아니에요?”
끝에 있던 인턴이 꺼낸 말에 일제히 시선이 그 인턴에게 몰렸다.
심지어 이 인턴은 그날 회식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이제야 전과해 온 신입이었다.
“역시 인턴이라 뭘 모르네.”
“최태혁 교수랑 문나영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전무 사모님한테 인사하러 들어간 거야. 분명해.”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서 인턴은 자기 말이 맞는 거 같았지만 또다시 말할 수 없었다.
***
나영이 눈을 떴을 때 어머니와 승희가 함께 있었다.
승희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며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 어지럽고 그러지 않아?”
나영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승희가 나영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멀쩡하면 됐어.”
나영은 말없이 승희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갈게요.”
어머니가 그녀를 부축해 주려고 하자 나영은 정말 괜찮다며 어머니의 손을 막았다.
침대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간 나영은 변기 위에 앉아서 손을 펼쳤다.
그 위에는 아까 승희가 몰래 쥐여 준 종이가 있었다.
이걸 보려고 화장실 핑계를 댔다.
어머니 몰래 전해준 것을 보니 어머니 몰래 봐야 할 듯해서.
부스럭.
나영은 접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우린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나영은 종이에 적힌 글을 읽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름도 없었지만, 이런 글을 그녀한테 줄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연락이 안 될 때는 언제고, 나타나자마자 결혼이란 말인가.
그래도 이 글을 보니 그가 괜찮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영은 종이를 접어서 다시 손에 쥐고 화장실을 나갔다.
“엄마. 나 언제 퇴원해도 되는지 담당의한테 물어봐 주시겠어요?”
그녀가 침대로 걸어오며 부탁하자 어머니 연희는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벌써 퇴원하겠다고? 며칠은 쉬어야지.”
“괜찮아요.”
17년 동안이나 마음속에 담고만 있던 말을 아버지한테 퍼부었더니 심장이 매우 놀란 듯했다.
그녀도 기절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머니가 의사를 만나기 위해 병실을 나가고 승희와 둘만 있게 되자 나영은 그녀에게 물었다.
“최 교수님은 지금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수술실에 있지.”
사실 이 병실에 누워서 마음의 안정을 취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최태혁 교수였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이 환자 수술을 하고 있다는 말에 나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 깨어나자마자 그 종이 꼭 전해줘야 한다면서 나를 얼마나 닦달하던지.”
승희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갑자기 킥킥 웃으며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너희 분과 사람들 다 바보 같아. 최태혁 교수가 이 병실까지 다녀갔는데도, 너희 두 사람 관계를 모르더라고.”
나영은 지금 그런 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내 핸드폰 어디 있는지 알아?”
“교수님 수술실에 있어서 연락도 안 될 텐데, 핸드폰은 왜?”
“차…….”
‘……현 감독’이라고 말하려던 나영은 고개를 들어 승희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짐작하고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여인도 어찌해야 하나 싶다.
“넌 그만 가도 돼.”
그녀가 병실에서 쫓아내려고 하자 승희는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차현과는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
최태혁 교수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건만.
진짜 친구는 정말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최태혁 교수한테 그런 친구인 줄 알았던 차현은 지금 어디서 뭘 하는 건가 싶었다.
만약 아버지가 끝까지 최태혁 교수를 몰아붙인다면, 그녀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구해준 진짜 은인이라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 말을 믿어줄 거 같지 않았다.
오히려 최태혁 교수를 사기꾼 취급할 것만 같아서 나영은 울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면 믿으실까?
아버지가 믿어만 준다면, 그녀의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수술을 끝내고 태혁은 제일 먼저 나영의 병실에 찾아갔다.
그런데 병실이 텅 빈 것을 보고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지었다.
나영의 아버지가 기어코 와서 그녀를 끌고 간 것만 같았으니까.
멍청히 병실 앞에 서 있는데 복도를 지나던 변 간호사가 알려주었다.
“문 선생님 퇴원하셨어요.”
“설마 건설업에 종사할 것처럼 생긴 남자가 와서 데려간 겁니까?”
태혁은 분한 얼굴과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애처로운 최태혁 교수의 모습은 처음이라서 변 간호사는 웃음을 참으며 말해주었다.
“어머니랑 둘이 가셨어요.”
어머니는 그의 편인 걸 알기에 태혁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문성철 전무가 자기 딸 지키기 위해 보낸 장수호만 아니면 되었다.
그는 변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몸을 돌려 걸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나영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한참이나 신호만 가서 다시 불안함이 커졌다.
뭐야. 설마 또 쓰러졌나?
그의 걸음이 어느새 빨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는데, 달칵, 전화가 연결되었다.
[이젠 전화하시네요.]
새침한 나영의 목소리를 들으니 잃어버렸던 나라라도 되찾은 듯 벅찼다.
그런 바보 같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태혁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집이야?”
[네, 어머니도 당분간 여기서 같이 지내신대요.]
“아!”
그럼 그가 찾아가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만나러 갈게요.]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나영이 먼저 말했다.
“그래, 무리하지는 말고.”
다정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에 태혁은 바로 오승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집에 오지 마.”
[와. 멀쩡한 내 집에서 끌어낼 땐 언제고, 이젠 그 집에서도 쫓아내겠다고?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오승준은 버럭 화부터 내었다.
태혁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어제 문나영 아버지 만났어.”
[뭐? 진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문성철 전무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꺼냈을 때는 그를 십자가 앞에 세우고 못을 박아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리 오승준을 집에서 쫓아내는 핑계로 사용하고 있었다.
태혁은 생각했다.
그는 문성철 전무가 그리도 혐오하는 최남기의 친손자가 맞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독할 수가 없다.
***
딩동.
초인종이 울린 건 밤 11시였다.
오늘 퇴원한 사람이 나돌아다닐 시간이 아니었기에, 태혁은 당연히 그녀가 오늘 안 찾아올 줄 알았다.
그래서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야단부터 쳤다.
“이 시간에 온다는 건 줄 알았으면 내가 갔지. 너 아직 환자…….”
태혁은 끝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작은 몸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와 허리를 꽉 끌어안기에.
그가 아는 문나영은 절대 하지 않을 어리광이었기에 태혁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문나영의 얼굴을 한 그대는 누군지?”
나영은 비누 향이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를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 대신 사과할게요.”
태혁은 그 누구의 사과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특히나 그녀의 사과라면 더더욱.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안으며 머리카락에 입술을 꾹 눌렀다.
“나는 사과보다 키스가 더 좋은데.”
농담으로 무거운 과거를 떨쳐내는 그의 말에 나영은 고개를 들어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스민 빛이 반짝거렸다.
슬픔에 주저앉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에 뜨거워진 사람처럼.
나영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다정하고 애틋했다.
그냥 이대로 세상과 연결된 문을 닫고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 문을 다시 열기 전까지 그녀의 세상은 온통 그뿐이었다.
그래도 될 거 같았다.
그런다고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전 1005호가 아니라 여기도 좋아요.”
그녀가 속삭인 말에 태혁이 뜨겁게 데였다.
“오늘은 안 돼.”
그가 거부하자 나영은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꾹 입술을 눌렀다.
떨어지는 숨결이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돼요.”
그녀가 그리 말하면 그보고 어떻게 견디라는 것인가.
오늘은 기꺼이 유혹당하고, 후회는 내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