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두 번째 밤
(73/84)
73화. 두 번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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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두 번째 밤
2023.06.12.
어떻게 방까지 왔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둘 다 침대 위에 있었다.
태혁은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그의 아래 있는 나영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나누었던 짙은 키스로 이미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어여쁘게 발긋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멈추려면 지금밖에 없어.”
태혁은 차라리 그녀가 그를 말려주길 바랐다.
아직 넘지 못한 거대한 산처럼 그와 그녀 사이에는 문성철 전무가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걸 먼저 해결한 다음에, 그리고…….
스윽.
그녀의 손이 상의 안으로 들어와 허리 부근을 만지자 척추를 따라서 전기가 통한 듯이 온몸이 저릿했다.
용암처럼 끓어오른 열기로 몸 안이 터질 것만 같았다.
쾌락과 고통에 뒤범벅이 된 그의 눈빛을 보며 나영은 물었다.
“왜 그날이랑 다른 눈이에요?”
당연히 그날은 고통이 없었으니까.
오로지 쾌락만 좇으면 되었다.
그래서 완벽한 밤이었고, 그래서 내일이 없었나 보다.
태혁은 쓰게 웃으며 물었다.
“그날 밤이 기억나긴 하는 거야?”
술의 힘을 빌려서 용기를 낸 밤이었기에, 모든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벅찰 정도로 뜨거웠던 느낌만은 여전히 생생했다.
“아팠던 거요?”
그녀의 질문에 태혁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팠어?”
그가 슬퍼하니 그녀는 도리어 웃게 되었다.
“원래 그런 거잖아요.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설마 고통만 있었겠는가.
그랬다면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밀의 정원과도 같은 그녀의 세계에 그를 들어오게 했다.
나영의 손이 뻗어가 그의 뺨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오늘은 안 아플 거 같아요.”
태혁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입술을 꾹 눌렀다.
가슴이 불타듯이 뜨거워져 그녀의 손에 심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었다.
누군가 아파야 한다면 더 아픈 건 그였으면 좋겠다.
“이제 내 옷 좀 벗겨주면 안 돼요?”
그녀가 그의 손을 끌어다가 그녀의 가슴 부근에 올려놓았다.
손바닥 아래로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이 느껴졌다.
“인간이 가진 것 중 제일 뜨거운 게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그가 죽음 앞에 얼어붙어 있던 그녀에게 그랬었다.
그녀가 의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저는 교수님이랑 같이 있어야 뜨거워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 한 번 주저앉았던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태혁은 약해질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 타버려도 내 잘못 아냐.”
그의 경고에 나영은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들끓는 욕망 앞에서도 여자는 한 떨기 꽃 같기만 했다.
이 꽃에 처음 취했을 때 그는 조금 미쳐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는 더욱더 미쳐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너무 예뻐서,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
그녀의 입에서 꼭 남의 목소리 같은 야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정함을 잃고 흐트러질수록 서로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목덜미에 닿은 그의 입술이 덴 듯 뜨거웠다.
이제 그녀의 몸에 그의 입술이 안 닿은 곳이 없을 거다.
이 정도면 집요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툭,
그가 흘린 땀이 그녀의 눈꺼풀 위로 떨어졌다.
거친 숨결이 그녀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순간에 그는 지독히도 말이 없다.
발광하는 듯한 두 눈빛만이 그녀를 훑어내렸다.
나영은 괜찮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의 넓은 어깨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멈추지 마요.”
나영은 이제 그가 주는 아픔이 두렵지 않았다.
그 고통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아름답기만 한 사랑은 오히려 현실성이 없었다.
눈앞이 점멸하며 모든 게 부서져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괴였다.
***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최태혁 교수는 물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땀을 흘린 몸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승준 교수님은 집에 왔어요?”
그녀가 쉰 목소리로 묻자 태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걱정 마. 당분간 안 들어오니까.”
그의 아파트에서도 쫓아냈는데, 이 집에서도 쫓아냈다는 말에 나영은 오승준 교수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남 걱정할 몸 상태가 아니었기에 모른 척했다.
“목말라?”
그의 물음에 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혁은 바로 방을 나가서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먹여주는 대로 나영은 물을 받아마셨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좀 민망해졌다.
“집에 가야 하는데.”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절대 이 집에서 자고 갈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주무실 때 몰래 나와서 어머니가 그녀를 걱정하며 밤샐 일은 없었다.
대신 내일 아침 어머니가 일어나시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일어날 수 있어?”
그의 물음이 너무 천연덕스럽다고 생각되어서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익숙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태혁은 씨익 웃었다.
“그 눈빛 보니 아직 멀쩡하네.”
나영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전 내일까지 쉬니까 깨울 필요 없어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겠지.”
나영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그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는 왜 그녀를 안을 때만 과묵해지는 건가.
신의 장난이던가, 그의 수작이 분명했다.
***
사실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영의 아버지 문성철은 여전히 태혁을 자기 딸 옆에서 치워버려야 하는 독버섯 취급을 하고 있었고, 그가 나영을 구했다는 증거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고, 그의 아버지 죽음에 할아버지가 책임이 있는 게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태혁은 살 만해졌다.
나영이 그를 사랑하니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에서 넘치는 축복이었다.
신에게 고맙다고 악수를 청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장수호가 뜬금없이 전화해서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왜? 문성철 전무가 너랑 나영이를 억지 결혼이라도 시킨대?”
[…….]
그가 험악하게 묻자 장수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 지금 요양병원입니다.]
“그래, 거기서 사는 것도 예쁜 간호사 간호받고 좋을 거야. 잘 생각했어.”
살벌한 농담에도 장수호는 동요하지 않고 할 말만 덤덤히 했다.
[그 유괴범이 여기 있어요.]
유괴범이라는 말에 태혁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뭐?”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장수호가 어떻게 그 유괴범을 만날 수 있겠나.
[유괴범이라면 최태혁 씨 기억할 거 같아서 사진 가지고 찾아왔는데, 치매라서 자기 가족들도 못 알아본다는군요.]
그러니까 그가 나영을 구한 증거를 찾기 위해 유괴범까지 찾아갔다는 소리에 태혁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한 번 크게 웃었다. 웃겨서가 아니라, 너무 기가 차서.
이 인간도 참 골때린다.
뭐 이리 남의 일에 본인보다 더 열심인가 싶었다.
태혁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장수호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망할 유괴범 한마디에 내 인생을 결정짓게 하려고 했다고? 그랬으면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라도 했을 거 같아!”
그가 도리어 화를 버럭 내자 장수호는 묵묵히 또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전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너 지금 어디야!”
[방금 요양병원이라고.]
“당장 서울로 튀어 와.”
웃긴 건 말이다.
장수호가 여전히 싫지만, 무섭게도 미운 정이 들었다는 거다.
그래서 같이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
연희는 식탁 앞에 앉아서 무전기와 핸드폰만 보고 있는 두 여자를 답답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다고 연락이 오겠니? 둘 다 그냥 밥이나 먹어.”
승희는 한숨 쉬며 무전기를 내려놓고 수저를 들었고, 나영은 다시 최태혁 교수한테 전화 걸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연락이 안 돼요. 또 아빠한테 불려간 거면 어떡해요?”
그럴 리 없다는 걸 연희는 알았다.
그녀의 남편은 매정한 거지, 조폭이 아니었으니까.
함부로 사람을 잡아가지 않았다.
“만약 그러면 오 비서가 연락해주겠다고 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또 태혁이 전화를 받지 않자 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저 교수님 집에 가봐야겠어요.”
고작 몇 시간 전화 연락이 안 되었을 뿐인데, 이리 안절부절못하는 게 전혀 자기 딸 같지 않아서 연희는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최 교수가 밖에서 위험할까 봐 그러는 거야?”
그녀의 눈으로 봤을 때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관상은 절대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영은 기어코 집을 나서 태혁의 집으로 갔다.
딩동딩동.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집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태혁이 돌아오면 단단히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수술하는 중이 아니라면 무조건 그녀의 전화를 받으라고.
나영은 이런 식으로 불안한 게 정말 싫었다.
쿵 쿵 쿵.
심장은 계속 불안하게 뛰어댔다.
오만가지 안 좋은 생각이 들어서 점점 그녀의 몸이 작아지고 있을 때.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누군가에게 짜증 내는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였다.
“이 자식아. 똑바로 걸어.”
“똑바로 못 걷는 건 최태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장수호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나영은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남자가 진탕 술이라도 마신 듯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끝없이 서로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나영은 걱정했던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두 남자도 뒤늦게 나영을 발견하고 삐끗하며 멈추어 섰다.
장수호가 조용히 태혁에게 물었다.
“문나영 씨도 술 마시자고 불렀습니까?”
“내가 미쳤냐.”
결국 나영이 등장해서 집에서 2차를 하기로 했던 두 남자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태혁은 혼자 남아서 나영의 잔소리를 전부 들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장수호 씨랑 술 마시느라고 제 전화를 안 받은 거라고요? 도대체 언제부터 장수호 씨랑 친했다고요!”
태혁은 넥타이를 풀며 변명했다.
“친한 게 아니라, 술 취해서 때리면 술주정이라고 하면 되니까.”
“변명하지 마요.”
“진심이야.”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혁의 태도에 나영은 더 화가 났다.
“차현 감독님은 교수님 이러는 거 보고 뭐라고 안 해요?”
“걔는 양 치러 뉴질랜드 갔어.”
“그러니까 차현 감독님 없으니까 바로 본색이 나온 거네요. 여자 꼬실 때만 차현 감독님한테 일일이 전화해서 코치 받고.”
그를 사기꾼처럼 말하자 태혁은 억울해졌다.
“그건 꼬시려고 그런 게 아니라.”
“꼬시려고 코치 받은 거잖아요.”
“차현한테 자꾸 물어본 건 혹시라도 가시가 박힌 내 말에, 지뢰밭 같은 내 행동 때문에 너 다치게 할까 봐 그런 거지. 나는 다정한 인간관계를 몰랐으니까. 항상 사람들과 부딪힐 때 상처 주고 상처받기만 해서. 너한테도 그러면 안 되니까.”
태혁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술기운 때문에 졸렸기에.
“차현한테 묻고 물어 안전한 길로 너한테 간 거였어.”
탁.
나영은 서둘러 두 팔을 뻗어 쓰러지는 태혁의 몸을 받쳐 안았다.
그렇게 안전한 길을 찾아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품 안에서 그는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