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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혼자 당하게 두지 않아요 (71/84)


71화. 혼자 당하게 두지 않아요
2023.06.05.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나영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병원 출근도 안 했는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건가 싶었다.

그녀는 일요일 당직이라서 계속 병원에 있었다.

그래서 태혁이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올 줄 알았건만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었다.


“뭐야. 혼자 쉰다고 신나서 놀러 간 거야?”

정황상 그런 의심이 들었기에 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유에 빨대를 푹 꽂았다.

역시 남자는 자유롭게 풀어주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나 보다.

아무래도 제일 먼저 신용카드를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영은 두유를 쭉 들이켰다.

그때 변 간호사가 의국 안으로 들어오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문 선생님, 그 남자분이 또 오셨어요.”

“네?”

간호사가 저리 밝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최태혁 교수는 아니었다.

나영이 스테이션으로 나가 보니 장수호가 서 있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혹시 가족 중 누가 입원하셨어요?”

그게 아니면 장수호가 다시 병원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부탁한 일 때문이라면 전화로도 충분했으니까.

장수호는 뜻 모를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저보고 문나영 씨를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오늘요? 그럴 시간이 안 될 텐데.”

“그게 아니라, 완전히 짐 정리해서 집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셨습니다.”

나영은 멍하니 장수호의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장수호는 고개를 숙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전무님이랑 최태혁 교수가 만났습니다.”

나영의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그 결과가 좋았다면 그녀의 독립이 강제로 종료될 리는 없었다.

나영은 장수호에게 다급히 물었다.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그의 전화가 불통인 게 이제야 불안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장수호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나영은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 했는데요? 말해주세요! 장수호 씨!”

“최태혁 교수는 그 누구도 알길 바라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게 나영 씨라도요.”

하지만 나영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장수호 씨가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물을 거예요.”

나영이 몸을 돌려 가려고 하자 장수호는 서둘러 그녀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


“지금 최태혁 교수 찾아가면 상처가 될 거고, 전무님 찾아가면 반항이 될 겁니다.”

나영은 장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럼 아버지한테 가야겠네요.”

“하지만 나영 씨가 최 교수의 편을 들면 들수록 전무님은 더 화를 내실 겁니다.”

“그래도 해야만 해요.”

“그런다고 최 교수님이 받은 상처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그럼 나도 똑같이 상처받을 거예요! 그 사람 혼자 당하게 두지 않아요!”

그건 논리도 없고, 명분도 없고, 그저 바보 같은 말이었다.

장수호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제가 전무님한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나영이 장수호와 떠나 버린 후 스테이션에 있던 막내 간호사가 변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


“어쩌죠? 저희가 다 들어버렸는데.”

변 간호사는 한숨을 내쉬며 조언했다.


“못 들은 걸로 해.”

그나마 일요일 밤이라서 다른 사람은 없었다.


“안 그래도 로미오와 줄리엣 된 거 같은데, 우리까지 보태지 말자.”

막내 간호사는 동의한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강대학교 병원의 가장 강력한 빌런 독사 교수가 그런 애처로운 사랑을 할 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나.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줘도 안 믿을 게 분명했다.

***

장수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태영 건설 본사 건물이었다.


“전무님이 오늘은 회사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안 좋은 일 생기면 항상 일 핑계를 대시죠.”

나영이 회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건조하게 말하자 장수호는 문성철 전무 대신 변명했다.


“핑계는 아닐 겁니다.”

“들어가요.”

나영이 먼저 앞장서서 정문으로 걸어갔다.

장수호는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낮에는 최태혁을 데리고 오고, 밤에는 나영을 데리고 오고.

아무래도 오늘 이후 문성철 전무는 결코 그를 신임하지 않을 듯했다.

전무실 앞에 도착하자 나영은 장수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혼자 들어갈게요.”

장수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장수호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제 걱정이요?”

“제가 화나서 아버지 치부를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 그거 들은 장수호 씨가 굉장히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장수호는 그녀의 얼굴과 전무실을 번갈아 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럼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먼저 돌아가셔도 돼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책임을 끝까지 지겠다는 말로 들려와서 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버지한테는 전혀 안 미안한데, 장수호 씨한테는 미안하네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때문에 승진 기회 놓친 걸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나영의 눈에 이제 장수호가 좀 바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와 태혁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서 이 승산 없는 판에 뛰어들었다지만, 이 판에서 장수호는 얻는 거 하나 없이 잃고만 있었으니까.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 저한테 빚진 거 있으세요?”

그녀의 질문에 장수호는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항상 선비 같은 얼굴만 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생생한 표정이 생기니 나영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발음이 비슷하긴 하네요.”

발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장수호는 손짓했다.


“들어가 보십시오.”

나영은 장수호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한 뒤 전무실 문으로 걸어갔다.

똑똑.

노크해도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영은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손에 술잔을 들고 창가에 서 있었다.

이제 보니 남들한테 방탕하게 술 마시는 모습 들키기 싫어서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핑계를 댔나 보다.


“회사에서 술 마시는 거 해직 사유 되지 않나요?”

그녀의 질문에 문성철이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처음으로 회사에 찾아온 딸을 보고 문성철의 신사적인 얼굴에 비소가 걸렸다.


“너도 장수호가 데려다준 거냐?”

“제 발로 온 거예요.”

“출입 기록 확인하면 다 나와.”

이 와중에도 누군가의 잘못을 먼저 따지는 아버지의 태도에 나영은 울컥했다.


“최 교수님이 연락이 안 돼요. 도대체 뭐라고 하신 거예요?”

결국 나영의 입으로 실토를 한 거였다.

장수호는 연막이었고, 진짜 만나는 남자는 최태혁이라고.

문성철은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며 차갑게 경고했다.


“내가 설마 말로만 끝낼 거 같으냐. 그놈 할아버지는 건들기만 해도 털릴 거 투성이야.”

최태혁 할아버지를 검찰에 고발하겠다는 말에 나영은 발끈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가 지금 무슨 짓 하고 계시는지 아세요?”

그녀를 구해 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이었다.


“그 집안이 상종 못 할 집안인 건 잘 알지. 모든 게 다 상스러워서 입에 담기도 더러워.”

아버지가 최태혁 교수와 그의 가족을 모욕하자 나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졌다.


“아버지는 무슨 자격으로 교수님을 욕하는데요!”

나영이 그를 탓하자 문성철은 탁 소리를 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추태야!”

“내가 유괴만 안 당했으면 아버지는 엄마랑 이혼하셨을 거잖아요! 그 비서 때문에요! 그래서 그건 아름다운 사랑이에요?”

나영이 쏟아내는 말에 문성철은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미 17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걸 어린 나영이 알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 네 엄마가 말한 거냐?”

그런 식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복수를 한 것인가 싶었다.


“말하지 않아도 엄마가 그렇게 우는데 제가 왜 몰라요! 그날도 두 사람 화해시키려고 선물 사러 나갔던 거였어요! 제가 납치당한 거 아버지 때문이라고요!”

문성철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뒷걸음질 쳤다.

나영이 정확히 그의 죄책감에 대못을 박았기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문성철은 더 이상 나영을 마주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털썩.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문성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영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문가 앞에 주저앉아 있던 태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룻밤이 지났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니 총에 맞은 거 같던 아픔이 무뎌지며 배만 고팠다.

이래서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사나 싶어서 마른 미소가 흘러나왔다.

태혁은 한없이 무겁기만 한 팔을 들어 올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밤사이 몇 번이나 울렸는데 이제야 확인할 기력이 생겼다.

우선 제일 먼저 그와 연락이 안 되어서 답답해하고 있을 나영한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화면을 켰는데, 병원에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변 간호사입니다. 전화 안 받으셔서 메시지 남겨요. 지난밤 문나영 선생이 실신해서 병원으로 실려 오셨어요. 금방 깨어나시긴 했지만 교수님은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메시지를 읽자마자 태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

한강대학교 병원.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병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같이 일하는 문나영이 쓰러져서 병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 온 거지만, 병실 앞에는 면회 사절이라는 종이가 딱 붙여져 있었다.


“원래 레지던트 1년 차 때는 한 번쯤은 과로로 쓰러지잖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남호진이라서 다들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며칠 전만 해도 남자친구 생겼다면서 반지 자랑했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니.”

“헉! 설마 남자친구랑 헤어진 충격에 쓰러진 거 아냐?”

“에이, 문나영이 그런 캐릭터는 아니지. 본인이 찼으면 찼지.”

수군대던 레지던트들은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탁 탁 탁.

최태혁 교수가 긴 다리를 시원하게 뻗으며 뛰어오는 걸 발견한 레지던트들은 홍해가 갈라지듯이 양옆으로 피하며 길을 터주었다.


 
그들이 터준 길을 최태혁 교수는 쌩하니 지나쳐 갔다.

얼마나 빠른지 미처 인사할 틈도 없었다.

도대체 최태혁 교수가 아침부터 이리 급하게 어딜 가는 건가 싶어서 모두의 시선이 그를 좇았는데, 최태혁 교수는 면회 사절이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는 문나영의 병실 문을 벌컥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걸 본 레지던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백수 남친은 안 나타나고 왜 최태혁 교수가 저길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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