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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제가 따님 애인입니다 (70/84)


70화. 제가 따님 애인입니다
2023.06.02.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는 없습니까?”

장수호의 말에 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뭘 기다려? 문나영 아버지가 내 목에 도끼 찍을 때까지?”

그가 유괴범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차현이 박재수 형사 가족을 찾을 때까지.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문나영을 구한 사람이 자기라는 걸 밝히고 싶은 건 최태혁 본인일 거다.

그런데도 그는 그걸 밝힐 시도조차 안 하고 있었다.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밝힐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문나영의 가족을 지옥으로 끌고 간 유괴범에게 희망을 품는다는 건 더 끔찍한 일이었고, 뉴질랜드에서 박재수 형사의 가족을 찾는다고 해서 그들이 17년 전 유괴사건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래서 장수호는 그를 희망 고문시킬 수 없었다.

그 희망이 꺼졌을 때 더 쉽게 무너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희망 없이 문성철 전무에게 부딪혀 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혹시 싸움할 때처럼 선방하려는 건가 싶어서요. 이 만남은 장르가 다르니 기세보다는 예의가 더 중요합니다.”

장수호의 염려에 태혁은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며 실소했다.


“내가 그쪽한테는 선방 꼭 한번 해보고 싶은데, 검도 2단이랬나? 나랑 검도로 붙어 보던가.”

“검도 할 줄 아십니까?”

“몰라도 넌 꼭 이길 거야.”

“그럼 다음에 검도로 붙죠.”

그리 말하며 장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혁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야?”

장수호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 전무님 골프장에 계십니다. 만날 거면 절 따라오세요.”

태혁은 등받이에 올려놓았던 팔이 미끄러지며 삐끗했다.

잠깐 심장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뱉은 말이니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태혁은 물잔의 물을 원샷한 뒤 장수호의 뒤를 따라갔다.

마치 모험을 떠나는 길인 듯 마음이 비장해졌다.

그 모험의 동행자가 친구가 아니라 장수호라는 게 참 아이러니했지만.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고, 골프장의 잔디밭도 자연의 색으로 푸르렀다.

장수호와 태혁은 같이 카트를 타고 골프장 위를 달렸다.

시야는 탁 트였지만, 태혁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비즈니스할 때 접대로 골프장 올 일이 많습니다. 오늘도 거래처 일 때문에 오신 겁니다.”

“그럼 내가 찾아가면 방해 아닌가?”

장수호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끝날 시간 거의 되었을 겁니다.”

“잘 아네.”

“오늘 그쪽 안 만났으면 저도 여기 있었을 테니까요.”

“문나영 아버지랑 네가 더 친하다고 자랑하는 거야?”

“사실을 말한 겁니다.”

장수호는 어떤 말에도 전혀 동요가 없으니 말하는 그의 입만 아팠다.

만약 문성철 전무가 장수호를 좋아하는 이유가 본인과 닮아서라면 태혁은 정말 불리해졌다.

저 멀리 골프 치는 중년 남자 두 명과 캐디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골프 치는 분이 문 전무님이십니다.”

태혁은 장수호가 알려준 사람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키가 크고 사내답게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은 공사판을 몸소 뛰어다녔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문 전무님은 회사 임원 중 가장 공명정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공명정대가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전무님 성격상 억지를 부리시지는 않을 겁니다.”

태혁은 문 전무한테 시선을 떼고 장수호를 쳐다보았다.


“넌 진짜 나 도와줄 마음이 있는 거야?”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닥쳐왔는데,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게 태혁을 더 혼란스럽게 하였다.

복잡한 그와 달리 장수호는 고민없이 간단하게 말했다.


“17년 전 문나영 씨를 구한 게 당신이 맞다면 전 무조건 당신을 도울 겁니다.”

태혁은 절로 눈가가 찌푸려졌다. 문나영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그걸 증명하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잘 알기에.

그 사이 카트는 문성철 전무가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막 골프 라운딩이 끝나서 문 전무가 거래처 사장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졌네. 내가 문 전무 한 번만 이겨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오늘은 저도 아슬아슬했습니다.”

“하하하하. 다음에는 내가 반드시 이길 거야.”

두 기업가의 대화는 훈훈했다. 계약이 순탄하게 흘러갔다는 뜻이었다.


“이런. 장 과장이 오늘은 어쩐 일로 지각인가?”

거래처 엄 사장이 먼저 장수호를 발견하게 아는 척을 했다.

문성철 전무의 시선이 장수호와 태혁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태혁은 잠시 숨을 참았다.


“이쪽은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지?”

엄 사장이 호기심을 가지고 태혁을 쳐다보았다.

태혁은 문성철 전무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장수호는 정중하게 태혁을 소개했다.


“최남기 씨 손자분이십니다.”

그 소개에 엄 사장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문성철 전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엄 사장이 한걸음에 태혁의 앞으로 와서 장수호에게 다시 확인했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최남기 말이야?”

장수호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 사장은 되로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감탄하는 표정으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이야! 대한민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치고 최남기 돈 안 써본 사람이 없는데, 그 손자를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자네가 이 바닥에서는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이야. 허허허허허.”

엄 사장이 크게 웃으며 태혁의 팔을 손으로 툭툭 쳤다.

태혁도 누군가의 앞에서 설마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소개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문 전무. 우리 다 같이 식사하지. 돈은 꼭 내가 내야겠어.”

엄 사장의 제안에 문성철 전무는 싸늘한 눈으로 태혁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안 되겠습니다.”

분위기가 싸한 걸 눈치챈 엄 사장은 낮은 목소리로 태혁에게 물었다.


“자네, 문 전무에게 뭐 실수한 거 있나?”

태혁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제가 문 전무님 따님의 애인입니다.”

엄 사장은 엄청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썹이 중앙으로 모였다.


“자네가 연예인이면, 문 전무 딸은 성역이야.”

엄 사장은 문성철 전무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여기서 빠져줘야겠군. 살살해. 막말로 태영 건설도 최남기 돈 안 쓰고 사업 못 하잖아.”

문 전무는 그러겠다 아니다 대답은 없이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엄 사장이 마지막으로 태혁한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웠네.”

이런 말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기대도 안 하고 왔기에 태혁은 고마움이 느껴져서 그 손을 잡았다.

엄 사장이 카트를 타서 먼저 떠나고 골프장에는 세 사람이 남았다.

문성철 전무는 장갑을 벗으며 장수호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관해 설명이 필요하지 않나?”

그동안 장수호가 그의 딸과 잘 만나고 있다고 보고했기에 그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뒤통수치듯이 최태혁을 데려온 것이다.


“제가 먼저 전무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장수호한테 부탁했습니다.”

“자네한테 말한 게 아니네.”

문성철은 차갑게 태혁의 말을 잘라냈다.

그를 향한 호의는 전혀 없고 적의만 있었다. 이제 만난 지 5분도 안 지났건만.


“제 할아버지 때문에 저한테 편견이 있으신 거면.”

“내가 내 딸한테 바란 건 하나뿐이야. 그냥 보통 사람들만큼 평범하게 사는 거. 그게 그렇게 큰 욕심 같나?”

문성철이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하는 말에 태혁은 목울대가 출렁일 뿐 대답을 못 했다.

그가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걸 태혁 본인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자네는 태어난 순간 이미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지.”

그리고 문성철 전무는 그걸 하나하나 그에게 일깨워주려는 작정인가 보다.


“자네 할아버지는 사채업자로 부자가 된 인간이고.”

“더 이상은 아닙니다.”

그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할아버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도 사채업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남기가 돈 쉽게 버는 사채업을 접은 이유가 뭔지 아나?”

문성철 전무는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혁이 여태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자네 할아버지가 돈 받아내기 위해 부렸던 건달들 손에 자네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전무님!”

장수호는 다급하게 태혁과 문성철 전무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만하십시오.”

“네놈 손으로 데려와 놓고 그만하긴 뭘 그만해!”

그 때문에 장수호가 처음으로 문성철의 질책을 받고 있었지만, 태혁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이 쨍하고 깨지는 듯 푸른 하늘이 아찔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

홍식은 슬리퍼를 신고 대문까지 뛰어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터벅터벅 걸어서 정원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홍식은 몸을 낮추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형님. 오늘따라 왜 이리 축 처지셨습니까? 혹시 문 선생이랑 싸우셨습니까?”

“황 여사님은?”

태혁은 홍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황 여사의 안부부터 물었다.


“벌써 누우셨죠. 요즘 엄청 일찍 주무십니다.”

태혁은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홍식은 그 뒤를 따라가며 그동안 있었던 집안일을 하나하나 보고했다.

태혁이 전혀 듣고 있는 거 같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래왔으니까.

황 여사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기에 태혁은 굳이 깨우지 않고 황 여사의 몸 상태만 확인했다.

홍식이 그 옆에서 개미 목소리로 말했다.


“약도 알람 맞춰놓고 꼬박꼬박 드셨어요.”

태혁은 물끄러미 황 여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방에서 나왔다.


“할아버지는?”

“서재에 계세요.”

태혁은 대문이 아니라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자고 갈 거야.”

그가 자고 간다는 말에 홍식은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태혁이 서재로 갔을 때 할아버지는 장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봐온 모습이었다. 매일 자기 전에 저 일을 하고 계셨으니까.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손자보다 돈이 더 좋으세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최남기는 고개를 들어 돋보기안경 너머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그럼 가뭄에 콩나물 나듯이 오는 네 녀석이 좋겠냐? 양심에 털 난 놈 같으니라고.”

까칠한 목소리로 구박하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던 태혁은 몸을 돌려 떠났다.

최남기는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 안부를 묻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 소원하게 지낸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였다.

탁.

그의 방에 들어와 문을 닫은 태혁은 무너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고 올라왔지만 차마 뱉어내지는 못했다.

Rrrrrrrrrr Rrrrrrrrr-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마도 나영일 거다. 오늘 온종일 연락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럽고, 서럽고, 또 서러웠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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