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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내 남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69/84)


69화. 내 남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2023.05.29.


끼익.

태혁은 아예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이건 절대 대충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설마 그 호텔 1005호 말하는 거야?”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맞다고 하자 태혁은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더 얼떨떨해졌다.

그를 만난 것만 빼면 항상 요조숙녀로 살아온 그녀가 먼저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설마 날 시험하나?

내 마음이 진심인지, 욕망인지.

태혁은 아주 위험한 시험에 빠진 기분이었다.


“왜 아무 대답이 없으세요?”

그가 말이 없자 나영은 고개를 옆으로 틀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태혁은 인상을 쓰며 심각하게 말했다.


“지금은 내가 무슨 대답을 해도 틀릴 거 같아서.”

그의 대답에 나영은 피식 웃었다.

그가 그만 고민하게 나영은 먼저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거짓말했을 때 교수님이 그 방에 데려갔잖아요.”

무려 스위트룸과 바꾸기까지 하면서.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지금도 그날처럼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그럼 그 방 가면 기분 좋아지잖아요.”

논리대로라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날과 오늘 명백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태혁은 정면만 보며 말했다.


“그날은 내가 참았지만, 오늘은 내가 못 참을 거야. 그래도 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태혁은 호흡을 붙잡고 있었다.

문득 그날 클럽에서 들었던 EDM 음악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따뜻한 감촉의 그의 뺨에 느껴졌다.

태혁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그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진 그녀의 입술이 붉은 꽃잎처럼 화사했다.


“우리 사이에 아직도 허락이 필요해요?”

그녀의 말이 그의 심장으로 떨어져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났다.

그녀의 말이 꼭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들려왔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그 길고 긴 세월을 방황하고, 싸우고, 견디고, 살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태어나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해도, 이 순간이 없다면 의미가 없을 듯한 기분.

그는 결국 그녀를 구했고, 그녀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삶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태혁은 뜨겁게 안도했다.

태혁은 그녀의 두 뺨을 감싸 안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삼키자 꽃잎 흐트러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부드러움에 취하고 감미로움에 녹아들었다.


태혁은 더운 숨을 뱉어내며 속삭였다.


“그래도 오늘은 안 갈래.”

감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살짝 위로 올라가며 긴 속눈썹 아래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태혁은 단단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 기분 안 좋으니까 가자니. 이유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그의 대답을 듣고 나영은 보드랍게 웃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흐트러지고, 그리고 행복했다.

***

병원에서 페어웰 회식이 있었다.

한 달 동안 함께 일한 인턴의 송별회였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셔도 되는 자리였기에 외과 의사들은 오랜만에 빗장을 풀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문 선생. 그 반지 선물 받은 거야?”

김영미가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며 물었다.


“네.”

그녀가 인정하자 김영미는 눈을 반짝였다.


“설마 남자한테?”

“네.”

이번에도 그녀가 순순히 인정하자 김영미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문나영 선생한테 드디어 남자 친구 생겼대요.”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태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며 놀라워했다.


“오!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성공한 용자가 도대체 누구야?”

“우리 병원 사람이야?”

“문 선생 핸드폰에 저장된 지검장님도 허락한 일이야?”

“이야. 누군지 진짜 궁금하다.”

사람들의 질문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그사이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는 최태혁 교수가 보였다.

나영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백수예요.”

사람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고, 태혁은 마시던 술을 뿜어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김영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어쩐지. 반지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어.”

회식 내내 사람들은 그녀한테 주위에 좋은 남자 다 놔두고 왜 하필 백수를 사귀냐며 안타까워했다.

얼굴 보고 남자 사귀면 나중에 큰일 난다고.

회식이 끝난 뒤 근처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마시면서 태혁은 그녀를 추궁했다.


“내가 백수라고? 아니면 내 이야기가 아니었나?”

나영은 새침한 표정으로 삶은 달걀 껍데기를 벗기며 말했다.


“제가 교수님이라고 했으면 앞으로 제가 들어가는 모든 수술은 교수님 덕이 될 거예요.”

“사실 1년 차인 네가 간이식 수술 들어오는 거 내 덕 맞아. 그때 제비뽑기할 때 내가 일부러 네 이름 뽑은 거라고.”

몇 개월이나 지나서 자기가 사기 친 걸 술술 부는 최태혁 교수를 나영은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이제 보니 전 백수가 아니라 사기꾼을 만나고 있었네요.”

“그러니까 왜 자꾸 나보고 백수래! 너 설마 나 병원 그만두게 하려는 큰 그림이야? 너 편하게 일하겠다고.”

태혁이 무서워하며 뒷걸음질 쳤다.

나영은 달걀을 한 입 베어 물며 그에게 약속했다.


“제가 전문의 시험만 통과하면 그 백수가 사실 교수님이었다고 병원 사람들한테 밝힐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게 어떻게 조금이야? 아직 3년 넘게 남았는데! 그때 내 나이가 몇 살인 줄 알아?”

태혁이 나이 타령하며 버럭 화를 내자 나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싫다고요?”

태혁은 바로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그녀 대신 달걀 껍데기를 까주었다.


“그럼 넌 내가 백수 되어도 안 헤어질 거야?”

“그땐 교수님이 집안일 하세요. 제가 일해서 돈 벌 테니까.”

은근히 두 사람이 결혼하자는 말이었기에 태혁은 못 참고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처음에 연애는 죽어도 안 된다고 하더니 오히려 결혼은 쉬운 거였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결혼하자고 할 걸 그랬다.

***

태혁은 장수호를 또 만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만나는 걸 뒤로 미룰 수도 없었다.

그가 약속 시간보다 1분 정도 늦었더니 장수호는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만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태혁은 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장수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더 안 반가운 사람은 처음이네.”

인사보다는 시비에 가까운 말에도 장수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태혁은 그런 장수호의 바다 같은 인내심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태혁은 당하면 당한 만큼 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어쨌든 오늘 그는 장수호의 도움이 필요해서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이었기에 계속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흠. 오늘 보자고 한 건…….”

“전무님에 대해 알고 싶으신 거죠?”

태혁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맞지만, 그렇게 내 말을 자르면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제가 원래 맞는 소리 해서 미움 사는 편입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하! 내가 당신 미워하는 걸 알긴 아나 봐.”

“제가 바보는 아니니까요.”

워낙 유능해서 나영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있는 인재가 자기 바보 아니라고 하는 말이 웃겼다.


“전무님한테 일부러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런 아부는 역효과만 낳을 테니까요.”

어차피 아부는 태혁이 죽어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주는 선물도 다 아부라고 생각하겠네.”

“네, 그냥 맨손으로 가십시오.”

“그래, 돈 아끼고 좋네.”

“그리고 그쪽은 말을 할수록 손해니까 가능한 한 전무님 앞에서 말을 아끼십시오.”

그 말은 그냥 입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었기에 태혁은 눈을 부라렸다.


“솔직히 말해. 나 도와줄 마음 전혀 없지?”

“그랬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태혁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장수호를 쳐다보았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도대체 왜 날 도와주는 거야? 설마 우리 할아버지가 돈 많은 거 알아서 그래? 꿈 깨. 그 수전노 양반은 자기 양말 사는 것도 돈 아끼니까.”

“그 할아버지한테 빚진 돈 못 갚아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태혁의 눈에 불티가 튀었다.

태혁은 순식간에 장수호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사납게 윽박질렀다.


“내가 너 안 때리겠다고 나영이랑 약속했거든. 그런데 그딴 식으로 내 가족 건들면 나도 못 참지.”

태혁이 너무 세게 목을 누르는 바람에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장수호는 꾹 참으며 충고했다.


“전무님은 당신한테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낼 겁니다. 그때 이런 식으로 흥분하면 끝입니다. 아시겠어요?”

이를 악무느라 그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멱살을 잡은 손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탁.

태혁은 던지듯이 장수호를 놓아주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장수호는 호흡을 토해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남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한동안 힘들어했다.

먼저 입을 연 건 태혁이었다.


“그걸 다 알면 더욱 날 도와주면 안 되는 거 아냐?”

장수호는 손으로 목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당신의 불운 덕에 문나영 씨가 살았습니다.”

태혁은 고개를 들어 장수호를 보았다.


“그러니 전무님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이유로 당신의 불운 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태혁의 불행한 가정사는 그가 살아온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로 인해 그는 방황했고, 방황하느라 학교를 밥 먹듯이 빠지다가 수업받을 시간에 유괴범의 차와 마주칠 수 있었다.

모든 건 우연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였다.

그러니 문성철 전무가 최태혁을 잘라내려는 이유가 그의 가정사라면 그건 모순이었다.

최태혁이 그리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문 전무의 딸을 살릴 수 있었던 거니까.


“그리고 전무님 앞에서 절대 그 사건 이야기를 먼저 꺼내시면 안 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딸 유괴당할 뻔한 아버지 앞에서 그 유괴 사건을 함부로 떠드는 인간은 유괴범만큼이나 증오스러울 거다.

그래서 태혁은 감히 모험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나영을 구한 게 끝까지 비밀로 남겨진다고 하더라도.


“그런데 왜 계속 저한테 반말하시는 겁니까?”

장수호가 처음으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묻자 태혁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럼 너도 해.”

장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반말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교육 잘 받고 자란 그는 차마 똑같이 굴 수 없었다.


“오늘 문나영 아버지 만날 수 있어?”

태혁의 물음에 장수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먼저 찾아가겠다고요?”

그건 정말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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