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바다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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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바다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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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바다에 갈래?
2023.01.13.
달칵.
한참 만에야 태혁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나영은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교수님도 갈비탕 때문에 탈 나셨어요?”
조금 먹은 그녀도 이리 아픈데, 혼자 다 먹은 태혁만 멀쩡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태혁이 말없이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서자 나영은 그의 안색을 꼼꼼히 살폈다.
“제 얼굴만 보지 말고 말씀하세요. 얼마나 안 좋으세요?”
“나 멀쩡해.”
“진짜요?”
나영은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혁은 그녀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으며 물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다에 갈래?”
지금 세 번째 기회에 대해 말할 줄은 몰랐기에 나영은 눈이 살짝 커졌다.
미리 약속한 거긴 하지만 도대체 화장실에서 뭘 했기에 나와서 이 말을 제일 먼저 꺼내는 건가 싶었다.
“교수님은 물을 좋아하세요?”
저번에는 아쿠아리움이고, 이번에는 바다다.
모두 물이 있는 곳이었다.
“응, 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그리 말하는 그의 표정이 화장실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마치 껍질 한 겹을 벗긴 듯이.
“그럼 바다로 가요.”
그녀가 허락하자 태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눈가에서 빛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 있으니 나영도 뱃속이 간지러워졌다.
“교수님이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태혁은 그녀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웃는 모습을 그는 볼 수 없었으니까.
“내가 평소엔 어떻게 웃는데?”
“잘 안 웃죠. 웃을 때도 좀 삐딱해요.”
“내가 너랑 둘만 있을 때도 삐딱하게 웃었다고?”
그리 물으며 태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니 나영은 긴장했다.
“제가 잘못 본 거 같아요.”
그녀가 했던 말을 부정하자 태혁의 눈빛이 짓궂게 변했다.
“어딜 어떻게 잘못 봤는데?”
“그만 다가오세요. 저 아직 아파요.”
나영이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막았다.
“아파서 제대로 못 볼까 봐 자세히 보라고 가까이 간 거지.”
아프다는 핑계를 댄 건 그녀가 먼저였지만, 그까지 그녀가 아픈 핑계를 대자 나영은 너무하다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태혁의 손이 뻗어와 그녀의 뺨을 감싸자 그녀의 눈빛은 바로 무너졌다.
“열이 있나 확인해 봐야겠어.”
그럼 손으로 이마를 만져 확인해야 하는데,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다가왔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뻔히 눈 뜨고 보면서도 나영은 막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분 듯이 눈꺼풀이 흔들렸다.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차오르자 심장까지 그의 존재로 채워진 듯이 가슴이 뻐근했다.
사실 두려웠다.
그는 단지 욕망의 연장선일 뿐인데 그녀만 정처 없이 그한테 마음을 빼앗길까 봐.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걸 경계했다고 해서 흘러가는 마음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입술에 닿으며 온기가 느껴질 때.
삐삐삐삑.
심장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어락?
덜컹.
바로 문이 열리고 승희가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오빠가 날 거리에 버려두고 데이트 가버렸어! 도대체 오빠라는 인간들은 왜 이리 진상인지! 집에도 전화해 보니까 엄마는 전화한 적이 없대!”
한껏 화를 내던 승희는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나영은 소파에 누워 있고, 최태혁 교수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 나영이 두 손으로 힘껏 밀어버린 것이었다.
최태혁 교수의 살벌한 눈빛이 승희에게 와서 닿았다.
설마 친오빠한테 당하고 집에 오자마자 독사 교수의 눈총까지 받을 줄이야.
“저 다시 나갈까요?”
승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현관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
승희는 다음 날이 되어서도 최태혁 교수에 대해 치를 떨며 말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승희를 붙잡고 술 마시고 타이(tie)대결을 하게 했으니 질릴 만도 했다.
아무리 최태혁 교수는 더 난도가 높은 원 핸드 타이, 승희는 투 핸드 타이를 해도 교수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는데 술까지 마셔서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런데 최태혁 교수는 그를 이길 때까지 멈출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으니 승희에게 어제 일은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승희가 술 취해서 뻗은 척해서야 끝이 났다.
나영은 괜히 죄책감이 들어서 승희에게 아침을 챙겨주었다.
“나야 간담췌 외과도 아니니 어제 하루 시달린 걸로 끝이지만, 넌 어쩌냐? 매일 그렇게 시달리고 살다가 병나겠다.”
나영은 어색하게 웃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난 이제 타이 연습할 때마다 최태혁 교수 생각날 거 같아.”
승희는 말하며 몸서리를 쳤다.
“넌 먹고 와. 나 먼저 갈게.”
나영은 서둘러 집을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아픈 게 괜찮아지니 어제 최태혁 교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자꾸 생각났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녀가 아픈 틈을 노렸다고 욕해줘야 하는데, 나영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에 열기가 스며들었다.
그와 이미 하룻밤을 보낸 사이라는 게 새삼 각인되면서 병원에서 최태혁 교수를 만날 일이 긴장되었다.
“그냥 평소처럼 하면 돼.”
그 당연한 게 오늘은 유독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싫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한 상황 때문에 거리를 두려고 애쓰기 바빴을 뿐이지.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건 정말 의지로 막을 수 없는 거였나 보다.
그렇게 애썼건만 결국 이만큼이나 마음이 자라버렸다.
세 번의 기회를 준 뒤 단호히 끊어낼 거라는 계획에서 그녀의 뜻대로 된 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아직 세 번째의 기회도 남아 있었다.
이젠 어쩌지?
말랑거리는 설렘 사이로 뾰족한 긴장감이 파고들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서서 나영은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
똑똑.
노크해도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나영은 그냥 문을 열었다.
황 여사님의 도시락만 받고 병동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연구실 소파에 불편한 자세로 자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고 나영은 멈칫했다.
옷도 어제 그대로였다.
설마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잤다고?
자기 집도 못 찾아갈 정도로 취하진 않았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병원에 응급환자를 보러 왔을 리도 없었다.
나영은 소파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교수님?”
잠결에 들리는 듯 반듯한 미간이 구겨졌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영은 좀 더 다가가서 또 불렀다.
“교수님.”
“음.”
그는 눈도 뜨지 않고 대답했다.
“왜 여기서 주무세요?”
“오승준이…… 끝도 없이 자랑질을…… 문을 잠가도 다 들려.”
정말 싫었는지 말하면서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영은 웃음을 참으며 소파 앞에 쭈그려 앉아서 잠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촘촘한 속눈썹이 남자치고 정말 길었다.
움푹 팬 눈은 고독해 보였다.
날렵하게 뻗은 콧날이 남자답게 잘생겼다.
그리고 입술은…….
그의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영은 두 팔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평정심을 잃지 말자.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교수님, 이제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스르륵.
그의 눈이 반쯤 떠졌다.
나른하게 떠진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는 몇 초 동안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마치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하듯이.
스윽.
그의 손이 뻗어와 그녀의 뺨을 만져서 그녀를 놀라게 했다.
이리 갑자기 대놓고 그녀를 만질 줄은 몰랐다.
“왜, 왜 그러세요?”
태혁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혼자 남아 있던 호텔 방의 풍경을.
온 방이 빛으로 가득 찼는데도, 그의 마음은 또다시 어두운 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의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버리는 사람을 붙잡을 수 없는 그 막막한 심정.
그런데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보였다.
환상도 아니고, 착각도 아니고, 정말 그녀였다.
태혁은 길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좋아서.”
두 사람 주위에 반짝거리던 아침 햇살이 그의 미소 위에서 부서졌다.
나영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병원에 들어오기 전에 평범하게 일하기로 다짐했는데, 장렬히 실패했다.
그래도 다행히 회진을 시작하자 평소의 병원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최태혁 교수는 여전히 악명 높은 독사였으니,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넋을 놓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아직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컨퍼런스 시간에는 소아과에서 협진 요청이 들어왔다.
간이식은 최태혁 교수의 전공이었기에, 소아과 환자의 간이식 수술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번에 간이식을 받아야 할 환자는 고작 생후 12개월 된 아기였다.
그리고 간 공여자는 아기의 친모였다.
“전 수술 못 합니다.”
최태혁 교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컨퍼런스실 안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독사가 수술 못 한다고 한 거야?”
“그러게. 독사 맞아? 수술 앞에서 꼬리를 내리다니.”
나영도 믿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라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최태혁 교수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어떤 어려운 수술이라도 도전 정신을 느끼는 사람이지 두려워해서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간은 다른 장기보다 이식했을 때 성공 확률이 높은 편이지만, 소아 간이식은 성인보다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1년밖에 살지 않은 아기의 수술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최태혁 교수가 이리 단칼에 수술을 못 한다고 말한 이유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건 너무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었다.
소아과 전문의도 당황해서 최태혁 교수를 설득하기 위해 설명했다.
“환자 부모한테 최 교수님의 이력을 말씀드렸더니 꼭 최 교수님한테 수술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 소아 환자 간이식 수술은 한 번뿐입니다. 그것도 열 살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아기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소아 간이식 전문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옮기는 게 나을 겁니다.”
최태혁 교수는 자신의 할 말을 끝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컨퍼런스실을 먼저 나가버렸다.
모두 서스펜스 반전 영화를 본 표정으로 최태혁 교수가 나가버린 문 쪽을 쳐다보았다.
***
탁 탁 탁.
“최 교수님!”
컨퍼런스실에서 나와 그의 뒤를 쫓아온 나영은 힘껏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뚝.
앞서 걸어가던 최태혁 교수가 멈추어 섰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컨퍼런스실에서의 일 때문에 그가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한 나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게 수술 포기하는 거 교수님답지 않아요.”
그의 말대로 소아 수술 경험이 부족해서 수술하지 않으려는 거라면 나영은 그를 격려해주고 싶었다.
“교수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 아기도 살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최태혁 교수가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아침에 보았던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무감정해서 나영은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수술 안 한다고 하면 안 하는 거야. 누가 와서 말해도 내 결정은 똑같아.”
최태혁 교수가 다정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이미 병원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한테만은 한 번도 냉정하게 군 적이 없어서 지금 처음 알았다.
그가 저런 눈빛으로 그녀를 하찮게 대하면 견딜 수 없이 아프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