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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질투 유발 (31/84)


31화. 질투 유발
2023.01.16.


최태혁 교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리려고 했다.

지금 그녀의 기분 따위는 그와 상관없다는 듯이.

나영은 꽉 주먹 쥐었다.


“저도 교수님한테 실망이에요.”

우뚝.

떠나려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영은 그의 등에 대고 속에 있는 말을 토해냈다.


“아무런 노력도 해보지 않고 이렇게 쉽게 환자를 포기하다니. 저는 교수님 같은 의사, 되고 싶지 않아요.”

나영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먼저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래서 태혁이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떠나지 못했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 안 좋은 말만 한 채 헤어진 뒤 나영의 마음은 계속 안 좋았다.

첫 만남에서 그녀가 그를 작정하고 피했을 때 이후 이렇게 사이가 나빠진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문제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간이식을 받아야 하는 아기 환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수술이 어려워서 포기한다는 최태혁 교수의 말이 납득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미국 클리블랜드에 있을 때 그보다 더 어려운 수술도 거뜬히 해낸 경험이 있었으니까.

한국에 돌아왔다고 갑자기 안전주의가 되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녀는 이 일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거 같아서 먼저 정형외과로 오승준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이 최 교수님이랑 얘기 좀 해보세요. 그래도 두 분은 함께 사시는 사이잖아요.”

그녀의 부탁을 듣고 오승준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


“내 말을 들을 놈도 아니고, 괜히 정신 사납게 한다고 욕먹을 확률이 99.99%야.”

그의 거부에 나영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승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항상 남의 일에 적당히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만 했었던 마돈나였는데.

최태혁 혼자만의 삽질이 아니란 말인가.

좀 얄미워지려고 했지만, 고작 돌 된 아기의 생명이 달린 일이라고 하니 오승준도 마냥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다.


“정 걱정되면 차현 감독한테 연락해 보던가.”

“네?”

“차현 감독이 최태혁이랑 제일 친한 친구잖아. 최태혁 연애 상담도 차현 감독이 전부 다…….”

묻지도 않은 걸 술술 불던 승준은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전화해 볼 거면 전화번호는 내가 줄 수 있어.”

그녀는 클럽에서 최태혁 교수와 함께 있던 차현 감독의 모습과 은별 때문에 병원까지 찾아왔던 걸 떠올리고 오승준한테서 차현 감독의 번호를 받았다.

나영은 우선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최태혁 교수님 밑에서 수련하고 있는 전공의 문나영이라고 합니다. 최태혁 교수님 일로 급히 상의드릴 게 있는데 혹시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차현 감독이라면 유명하고 바쁜 사람이니 그녀가 연락해도 쉽게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빨리 연락이 올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었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고 1분 만에 답장이 왔다.


<내가 지금 한강대학교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나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차현 감독까지 뾰족한 수가 없으면 정말 방법이 없을 거 같아서.


 

***

나영은 병원 정문 앞에서 서성이며 차현 감독이 오기를 기다렸다.

차현을 기다리는 동안 최태혁 교수가 냉정하게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르며 기분이 가라앉았다.

교수와 레지던트 사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상처받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레지던트로서 그한테 수술하라고 말한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렇게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는 거다.

포르쉐 한 대가 병원 입구 쪽으로 미끄러지듯이 굴러와 멈추어 섰다.

차 문이 열리며 남자 한 명이 내려섰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넥타이 대신 스카프로 멋을 낸 슈트 차림이 경직되지 않고 패셔너블했다.

진짜 연예인이었던 은별보다 더 시선 강탈이었다.

남자가 그녀를 향해 곧장 걸어오자 나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

왜 나한테 오는 거야.


“문나영 씨 맞죠?”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물으며 선글라스를 벗자 그제야 나영은 그가 차현 감독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네, 전에 은별 병실에서 뵌 적 있어요.”

“이미 잘 알고 있으니 굳이 누군지 설명할 필요 없어요. 병원 1층에 카페테리아 있던데 거기서 이야기하죠.”

병원으로 그를 부른 건 나영이었는데, 차현이 먼저 그녀를 병원 건물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이끌었다.

차현 감독이 커피까지 사려고 하자 나영은 강력하게 그녀가 사겠다고 주장했다.


“제가 감독님을 병원으로 부른 거니 제가 사겠습니다.”

차현은 마음대로 하라고 하며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이랑 거리 두는 게 철저하네요.”

차현이 지나가는 투로 한 말이 좀 거슬렸지만 그냥 넘겼다.

오늘은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최태혁 교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그를 여기까지 부른 것이었으니까.

구석 테이블에 차현과 마주 앉아서 그를 급히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최 교수님이 환자의 수술을 거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환자는 수술만 받으면 앞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데 최 교수님이 수술을 못 하겠다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되어서요. 너무 최 교수님답지 않은 일이에요. 그래서 최 교수님이랑 친하다는 차현 감독님을 부른 거예요. 혹시 차현 감독님은 최태혁 교수님이 생후 12개월 된 아기의 수술을 거절한 이유를 아시나 해서요?”

차현이 자기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면 나영은 사람을 잘못 부른 것이었다.

차현 감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커피잔을 들어서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탁.

테이블에 놓인 커피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그러니까 평소랑 다른 모습을 보이는 최태혁이 걱정된다는 거죠?”

그녀는 대답을 바랐는데 차현이 오히려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자 나영은 살짝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기 환자가 더 걱정이죠. 가능한 한 빨리 수술해야 해요.”

“하지만 대한민국에 그 아기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최태혁뿐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했다.

다른 의사를 찾으면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영이 신경 쓰는 의사는 그 수술을 거절한 최태혁 교수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까 태혁이도 수술 거절했을 거고.”

“그럼 왜 거절했는지 이유를 아세요?”

나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현 감독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간 공여자가 친모라는 게 거슬렸나 보네요.”

“네?”

그게 왜 거슬린단 말인가.

엄마가 자기 자식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최태혁은 엄마가 자기 몸을 희생하며 아기를 살리려고 하는 게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왜요?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최태혁은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가 없었어요.”

나영은 할 말을 잃은 눈으로 차현 감독을 쳐다만 보았다.


‘만약 내가 내 엄마 요리를 한 번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게 석탄 맛이라도 다 먹었을 거야.’

그녀가 만든 요리를 먹으며 최태혁 교수가 했던 말이 아프게 떠올랐다.

차현은 씁쓸한 눈으로 커피잔 속의 까만 커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혁이는 자신의 불운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환자를 감히 수술할 용기가 없는 거 같네요.”

나영은 차현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그가 최태혁 교수가 수술할 수 있게 설득하도록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현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녀가 최태혁 교수에게 심하게 말한 게 너무 후회되었다.

이유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망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분명 수술 안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어야 했는데.


“내가 태혁이 어머니에 대해 말해버린 김에 지금 다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최 교수님 어머니 이야기는 더 안 하셔도 돼요. 충분히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 태혁이 아버지 이야기요.”

나영은 고개를 들어 차현 감독을 쳐다보았다.

이 수술에 아버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가 왜 굳이 아버지 이야기까지 꺼내는지 나영은 바로 이해가 안 되었다.


“최태혁의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더 일찍 죽었어요.”

“네?”

“그러니까 태혁이는 태어난 순간 이미 고아였다고요.”

부모님이 안 계신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로 불행한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다.

멍한 청각 안으로 차현 감독이 하는 말이 파고들었다.


“내가 최태혁한테서 꼭 듣고 싶은 말이 하나 있는데.”

차현이 그녀를 똑바로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나영의 눈동자에 잔파동이 일었다.


“문나영 씨가 그거 해줄 수 있어요?”

그녀는 그한테 부탁하려고 부른 건데, 그가 오히려 그녀에게 부탁했다.


“저는 그렇게 따뜻한 성격이 아니에요.”

나영은 솔직하게 자신 없다고 말하는데 속이 울렁였다.

그녀가 최태혁 교수를 도울 만한 사람이 아닌 거 같아서 슬프고 아렸다.


“성격 좋은 사람만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공부 잘하는 사람만 무조건 성공하고 공부 못 하면 실패해야 하는데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요.”

차현이 하는 말을 듣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두 사람이 만난 이유가 분명 있어요.”

“어떤 이유요?”

나영은 최태혁 교수와 그녀가 이리된 게 하룻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육체적인 관계로 묶인 사이에 진실한 사랑을 찾는 건 어쩌면 모래사장에서 진주를 찾는 것과 같을지도 몰랐다.


“내가 보기에 문나영 씨는 굉장히 방어적인 성격인데, 처음에 어떻게 최태혁에게 마음을 열었어요?”

나영은 클럽에서 그를 처음 보았단 순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닮아서.”

그때 차현 감독이 누군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들어 에스컬레이터 쪽을 쳐다보자 그녀의 시선도 좇아갔다.

먼 거리에서도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최태혁 교수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병원 오기 전에 전화했어요. 문나영 씨랑 같이 있다고 했더니 바로 왔나 보네요.”

나영은 지금 최태혁 교수를 보기 불편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안 그래도 그녀가 한 말 때문에 아직도 그녀한테 기분이 상해 있을 텐데, 그녀가 차현한테서 그의 부모님 이야기를 들은 걸 알게 되면 그녀를 더 싫어하게 될 거 같아서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손 좀 줘봐요.”

“네?”

이유를 알 수 없어 쳐다보니 차현 감독이 재촉했다.

할 수 없이 나영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차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팔을 높이 올려 최태혁 교수에게 인사하듯이 흔들었다.


“!”

“!”

차현만 표정이 태연하고, 나영과 태혁은 순식간에 표정이 급변했다.

그리고 최태혁 교수가 에스컬레이터를 두 계단씩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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