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자기 보호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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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자기 보호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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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자기 보호 본능
2023.01.09.
나영은 오늘 집들이 음식을 직접 만들려고 일부러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레시피를 물어보았다.
그녀가 집들이할 거라는 말에 어머니는 신기해하셨다.
[네가 사람들을 먼저 초대한 거야?]
그녀가 변한 거 같다면서 어머니는 좋아하셨다.
나영도 최태혁 교수를 만난 뒤 예전과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항상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었는데, 최태혁 교수는 그게 불가능했다.
불쑥불쑥 선을 넘어서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막을 방법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그게 최태혁 교수의 거침없는 성격 때문인지, 그를 의식하는 그녀의 마음 때문인지 나영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네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거니까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승준과 승희가 집안일 때문에 떠나버리면서 둘만 남게 되었다.
나영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럼 우리끼리만 식사해야 하나요?”
“왜? 또 부른 사람 있어?”
나영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또 올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태혁은 만족하며 먼저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먹어야겠네. 앉아.”
꼭 집주인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고 나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언제 어디서든 남의 눈치는 절대 안 보고 살 사람이었다.
“맥주도 있는데, 드실래요?”
“좋지.”
둘만 있으니까 술은 마시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그럼 그녀가 그를 의식하느라 분위기가 경직될 거 같아서 그냥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왔다.
최태혁 교수와의 만남 중 가장 자연스러웠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첫 만남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술 때문인 거 같아서 나영은 오늘도 맥주에 의지하게 되었다.
“제가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신 거 감사해요.”
“별말씀을.”
태혁은 가볍게 받아치며 술잔을 그녀의 것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는 한 모금만 마시고 맥주를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그녀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고 놀라서 쳐다보았다.
맥주 한 잔을 다 비우고 내려놓은 나영을 보고 태혁이 물었다.
“설마 요리하면서 스트레스라도 받은 거야?”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던 나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드세요. 황 여사님 요리보다 맛은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만들었으니까 못 먹을 정도는 아닐 거예요.”
태혁은 젓가락을 잡고 갈비찜에 제일 먼저 손을 댔다.
다른 요리 하느라 시간을 놓쳐서 압력솥이 탔는데 안 탄 것만 골라서 담아놓은 것이었다.
그가 갈비를 먹는 걸 나영은 긴장해서 쳐다보았다.
“맛이 어때요?”
“탄 맛 나.”
역시나 빈말은 절대 못 하는 혀였다.
그녀가 바로 손을 뻗어 갈비찜을 치우려고 하자 태혁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서 막았다.
“그래도 먹을 거니까 그냥 둬.”
“맛없다면서요.”
“이 요리는 내가 맛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놀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만약 내가 내 엄마 요리를 한 번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게 석탄 맛이라도 다 먹었을 거야.”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어머니 이야기에 나영은 멈칫했다.
황 여사님과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 마음이 쓰였다.
“어머니 요리를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어요?”
“응.”
태혁은 슬픈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하며 이번엔 그녀가 만든 잡채를 집어 먹었다.
“이건 진짜 잡채 같네.”
그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나영은 발끈했다.
“갈비탕도 진짜 갈비로 만든 거거든요.”
“그런데 왜 넌 안 먹어?”
나영은 그제야 갈비탕으로 젓가락을 뻗어서 갈비 하나를 가져와 한 입 베어 물었다.
먹자마자 퍼지는 탄 맛에 나영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갈비탕 그냥 버리는 게 좋겠어요.”
“아니야. 내가 다 먹을 거야.”
“이걸 다 먹겠다고요?”
탄 맛 나는 갈비탕을 나영은 한 조각도 다 먹기 싫었다.
그가 그녀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먹으려는 거 같아서 나영은 미리 경고했다.
“먹고 아파도 절대 제 탓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그 말 때문에 부정 탄 거 같았다.
탄 맛 나는 갈비탕은 결국 태혁이 다 먹었지만, 정작 체한 건 갈비를 한 입만 먹은 그녀였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던 태혁이 한마디 했다.
“아프니까 더 예쁜 거 같은데.”
나영은 화낼 기운도 없어서 미간만 찌푸렸다.
태혁도 놀리는 걸 그만하고, 그녀를 소파에 눕히며 물었다.
“원래 위가 안 좋아?”
“네.”
“그럼 상비약도 있겠네. 어딨어? 내가 가져다줄게.”
“제 방 침대 옆 서랍에 있어요.”
태혁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영이 쓰는 방으로 걸어갔다.
우뚝.
나영의 방에 들어간 태혁은 잠시 멈추어 섰다.
온통 여자가 쓰는 물건으로 가득 찬 방은 그한테는 어색하고 낯선 공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태혁은 자신이 약을 가지러 왔다는 걸 깨닫고 곧장 침대 옆 협탁으로 걸어갔다.
협탁의 서랍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 위장약을 꺼냈다.
곧장 나가려고 했는데 그의 눈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인형에 닿았다.
여자 방에 인형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 곰 인형은 나영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형이었고, 오래된 물건인 거 같았다.
‘그런데 저 인형이 왜 이리 눈에 익지?’
그는 살면서 인형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딱 한 번 직접 사본 적이 있었다.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 어떤 여자아이에게 선물하려고 산 것이었는데, 그때 산 인형이 저 곰 인형과 비슷했던 거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태혁은 곰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막 인형을 잡으려고 할 때 밖에서 나영이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혁은 바로 약만 들고 나영의 방에서 나왔다.
나영이 누워 있던 소파는 텅 비어 있고, 화장실 쪽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혁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괜찮아?”
한참 만에 안에서 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토해내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건 아플 만큼 아프면 나아질 거라는 말과 똑같았기에 태혁은 말했다.
“내가 병원에 가서 수액 가져올게.”
나영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태혁이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변기 옆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사람을 집에 초대해 놓고 호스트가 아프다니 정말 한심했다.
그것도 그녀가 직접 만든 요리를 먹고 이랬다는 게.
최악의 집들이였다.
***
최태혁 교수가 병원에서 가져온 수액을 맞으니 그제야 몸이 좀 편해지는 듯했다.
수액이 적당한 속도로 떨어지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최태혁 교수를 바라보며 나영은 물었다.
“병원에서 수액 가져오면서 뭐라고 하신 거예요?”
“사실대로 말했지.”
“네? 설마 제가 아프다고 말한 거예요?”
그녀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자 최태혁 교수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내가 아프다고 했어.”
그가 어딜 봐서 아픈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게 생긴 몸이었다.
“간호사가 그걸 믿었다고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영은 다시 태어나도 그처럼 살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교수님은 교수가 되어서 뻔뻔해진 거예요? 아니면 원래 그렇게 사신 거예요?”
“난 어릴 때부터 이랬어.”
“정말 키우기 힘든 애였겠네요.”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뱉어낸 말이었는데, 최태혁 교수의 눈빛이 고요하게 깊어져서 신경이 쓰였다.
“제 말에 기분 상하신 거예요?”
자기는 더 심한 말도 막 하면서 고작 그 말에?
“아니, 어떤 식으로든 내 과거가 나를 쫓아오는 거 같아서.”
사실 나영도 잊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그 과거의 사건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이전과 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과거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의 반응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럼 전 교수님 과거 절대 안 물어볼게요.”
그녀가 그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태혁은 입꼬리를 올렸다가 바로 정색하며 물었다.
“잠깐! 그건 나한테 관심 없다는 소리인가?”
나영은 대화가 이런 식으로 튈 줄은 몰랐기에 미간을 좁혔다.
최태혁 교수는 대놓고 그녀를 타박했다.
“내가 갈비탕도 다 먹었는데 너무하잖아.”
그녀가 먹으라고 강요한 적 없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바라고 그걸 다 먹은 거라면 그녀가 그에게 서운해야 할 일이었다.
나영은 그한테서 등지고 누우며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제 쉬어야겠어요.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이대로는 못 가.”
손님이 진상되는 거 한순간이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쨌든 전 잘 거예요.”
태혁은 등을 보이고 누운 나영의 뒷모습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만 보았다.
몸은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심적으로 그녀와 가까워지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움직이는 인기척을 느낀 나영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가시는 거예요?”
“아니, 화장실.”
이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을 갔던 태혁이 또 화장실에 가는 걸 보고 나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탁.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 차현에게 전화했다.
Rrrrrrrrrrr Rrrrrrrrr-
달칵.
차현이 전화를 받자 태혁은 인사도 없이 바로 하고 싶은 말을 뱉어냈다.
“내가 탄 갈비탕도 다 먹었는데 문나영은 아직도 나한테 거리를 둬.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갑자기 친구의 한탄을 듣게 되었지만 차현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연애 상담에 응해 주었다.
[문나영이 널 위해 해준 요리잖아. 이미 문나영은 마음을 썼는데, 넌 또 대가를 바라면서 그걸 다 먹은 거야?]
마치 그가 욕심꾸러기라고 말하는 듯해서 태혁은 마음에 안 들었다.
“나 지금 이 집에서 쫓겨나기 직전이야. 그런데 해줄 말이 정말 그거뿐이야?”
[도대체 집들이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쫓겨날 지경이 된 거야?]
차현은 물어보며 웃음을 참는 듯했다.
“나한테 관심 없는 거냐고 물어본 거뿐이야.”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가라고 한 거네.]
태혁은 욕조에 걸터앉으며 열없이 말했다.
“긍정적인 대답이면 곤란할 리 없잖아.”
[그 여자가 남자 거절할 때는 칼같이 한다며.]
“아! 그럼 긍정적인 대답이라서 곤란한 건가?”
태혁의 표정이 바로 밝아졌다.
[문나영 마음은 문나영만 알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 보호 본능이 누구보다 강해서, 분명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느껴져야만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서 보여줄 거야. 고작 탄 갈비탕 먹은 걸로는 부족해.]
태혁은 문나영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거였다.
그런데도 사랑이란 말 앞에서는 미개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랑 사랑이 어울려?”
그의 질문에 차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 답은 언젠가 문나영이 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