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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집들이 (28/84)


28화. 집들이
2023.01.06.



 
태혁이 집에 들어섰을 때 오승준은 거실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누군가한테 열심히 톡을 보내는 중이었다.

차현이 소개팅을 시켜주었는데, 잘 되고 있다는 게 얼굴만 봐도 느껴졌다.


“최 교수. 나 일요일에 차 좀 빌려줘.”

“싫어.”

그를 보자마자 차를 빌려달라는 오승준에게 태혁은 차갑게 거절의 말을 날렸다.

안 돼도 아니고, 싫다니.

오승준의 귀에는 ‘너 잘되는 꼴을 못 보겠다.’라는 뜻으로 들려왔다.


“이봐. 난 집까지 양보했다고. 그런데 그깟 차를 못 빌려주겠다니! 쪼잔하게!”

오승준은 바로 집 타령을 하는데, 이젠 지겨울 정도였다.

태혁은 냉장고로 걸어가 물을 꺼내 마시며 무시했다.

데이트할 때 더 좋은 차를 끌고 나가야만 했던 오승준은 태혁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살갑게 말을 꺼냈다.


“내가 엘리베이터 타면서 들은 건데 건물주 가족이 이 오피스텔에 산대. 대박이지 않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태혁은 한심하다는 듯이 오승준을 쳐다보았다.

오승준은 지지 않고 말했다.


“내가 그 금수저 누군지 반드시 찾아내서 인맥을 쌓고 만다. 그땐 너도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차 빌려줘.”

라고 하며 오승준이 손을 내밀자, 태혁은 바로 그의 손을 세게 때렸다.

짝!


“악!”

순식간에 손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오승준은 버럭 성을 냈다.


“야! 외과 의사 손이 얼마나 중요한데 함부로 때려!”

“중요한 줄 알면 헛짓거리하지 마.”

물만 들고 방으로 걸어가는 태혁의 등에 대고 승준이 분풀이하듯이 말했다.


“문나영 집들이 가서 내가 무슨 소리 할지 안 무서운가 보지?”

멈칫.

태혁이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려 다시 오승준을 보았다.


“너도 집들이 간다고?”

“당연하지! 내가 집주인인데!”

그러고 보니 나영은 승준의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으니 굳이 그만 초대하는 게 더 이상하기는 했다.

그는 열심히 덕을 쌓아서 겨우 얻어낸 집들이인데, 오승준은 누워서 받아먹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던 태혁이 먼저 승준에게 물었다.


“너 일요일 몇 시 데이트야?”

“왜? 차 빌려주게?”

조금 전까지 성을 내던 오승준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내 부탁 들어주면.”

“알았어. 뭐든 말만 해.”

오승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연예인 은별이 드디어 퇴원하는 날이다.

그래도 건강을 많이 회복해서 병원을 떠나는 거니 그녀한테는 다행인 일이었다.

또 똑같은 생활을 반복한다면 다시 위장에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오게 될 테지만.

환자복을 벗고 스타답게 명품으로 휘감은 은별이 일반외과 병동에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마치 이곳에서 그녀는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엑스트라로 전락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최태혁 선생님 어디 있어요?”

은별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석 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최태혁 교수가 한밤중에 압뻬 수술한 걸로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병원을 휩쓴 게 바로 어제였기에 은별의 등장은 더욱더 자극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가장 앞에 있었던 치프 동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제, 제가 전화로 불러드리겠습니다. 잠깐만.”

동건은 핸드폰을 꺼내서 서둘러 최태혁 교수의 번호를 눌렀다.

사실 퇴원하는 환자가 찾는다고 교수를 호출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였는데, 스타의 당당한 기세에 밀려서 저절로 하게 되었다.

달깍.

막 통화가 걸려서 동건이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가는 손길이 있었다.

나영이었다.

그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리고는 직접 은별에게 말했다.


“은별 씨 담당 의사는 윤이나 교수님입니다. 그러니 작별 인사는 윤 교수님한테 하는 걸로 충분합니다.”

은별은 갑자기 등장한 나영을 보고 눈꼬리를 올렸다.

외모가 존재가치를 증명해주는 연예계에 살기 때문에 눈에 띄게 예쁜 여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경계하게 되었다.

그것도 화장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밋밋한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데도 미모가 전혀 퇴색되지 않고 은은하게 매력을 발산하니 더 거슬렸다.

은별은 이제 그녀의 화장 안 한 얼굴을 남한테 보이는 게 무서워서 병원에 있는 내내 매일 풀메이크업을 했었다.

미모의 여의사가 최태혁 만나는 걸 막으려고 하는 거 같아서 은별은 오히려 고집이 생겨났다.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퇴원하는 길에 신세 진 의사 선생님한테 인사 좀 하겠다는 게 뭐 잘못인가요?”

은별이 최태혁 교수를 만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자 나영은 고개를 틀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 있던 환자 보호자들이 은별이 나타난 걸 보고 핸드폰을 꺼내 찍고 있었다.

여기서 은별과 길게 실랑이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럼 절 따라오세요.”

나영은 돌아서며 동건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최 교수님한테 연구실로 오라고 하세요.”

동건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이 은별을 데리고 연구동 쪽으로 사라진 뒤에야 동건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최 교수님 일에 문나영이 왜 나서는 거야?”

평소의 문나영이었다면 남의 일에 절대 먼저 끼어들지 않았다.

나영이 그런 행동을 했던 건 이윤지처럼 각별했던 환자뿐이었다.

***



“뭐?”

수술실을 나오자마자 동건의 전화를 받은 태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짜 문나영 선생이 은별을 직접 내 연구실로 안내했다고?”

[네.]

“네가 문나영한테 시킨 게 아니라?”

[아뇨. 문나영이 저한테 시켰습니다. 교수님한테 연구실로 오라는 말 전하라고.]

“알았어.”

전화를 끊은 태혁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가 싶어 팔짱을 꼈다.

은별이 퇴원하기 전에 그를 찾아온 목적은 너무 분명했다.

분명 차현 영화 출연을 그한테 또 상기시키려고 온 거겠지.

그런데 나영이 사람들 앞에서 은별을 직접 막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태혁은 서둘러 연구실로 향했다. 어쩐지 늦으면 큰일 날 거 같았다.

태혁이 연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 때 그의 걱정과 달리 두 여자 사이에 험한 일은 없었다.

그저 은별이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같이 있는 사람은 나영이 아니라 그녀의 매니저였다.


“문나영은?”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유 없이 던지는 질문을 듣고 은별은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나도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그 여자한테 물었거든요. 당신이랑 무슨 사이냐고.”

태혁은 나영의 대답이 궁금했기에 저절로 몸이 소파 쪽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문나영이 뭐라고 했는데?”

은별은 그의 반말이 거슬려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차현 감독 영화에 출연 확정되면 그때 말해줄게요.”

이런 씨.

하마터면 퇴원하는 환자한테 진심으로 욕할 뻔했다.

***

일요일은 나영이 집들이 초대를 한 날이었다.

차 타고 5분도 안 되는 거리였기에 태혁과 승준은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문 앞에 도착했다.

승준은 익숙한 현관문을 보며 투덜거렸다.


“내가 내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지.”

“오늘 내 차 타고 데이트 안 갈 건가 보지?”

승준은 바로 미소를 지으며 도어락을 누르려고 했는데, 태혁이 그 손을 ‘탁’ 쳐내며 명령했다.


“초인종 눌러.”

승준은 데이트에 끌고 갈 세단만 속으로 되뇌며 태혁의 지시대로 초인종을 꾹 눌렀다.

그도 집 대출만 없었어도 그깟 차 당장 뽑을 텐데 말이다.

딩동.

몇 초 정도 기다리자 안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최 교수님.”

동생 승희가 태혁에게만 살갑게 인사하자 승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한소리 했다.


“넌 친오빠는 안 보이냐?”

“최 교수님. 사복도 엄청 잘 입으시네요. 꼭 데이트 오신 거 같아요.”

오늘 진짜 데이트가 있는 승준이 끝까지 무시하는 여동생을 흘겨보고는 두 사람을 밀치고 제일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평소와 다른 냄새가 느껴지자 코를 킁킁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타는 냄새야?”

“아! 나영이가 갈비찜 하다 태웠어.”

“뭐!”

승준은 그게 집을 태웠다는 소리로 들려서 후다닥 부엌으로 뛰어갔다.

태혁도 그 뒤를 따라 부엌 쪽으로 갔다.

식탁에 요리를 올리던 나영이 두 남자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서툰 요리를 정신없이 끝내느라 그녀는 평소와 달리 조금 부산스러워 보였지만, 그래서 표정이 더 자연스러웠다.

마치 아침에 막 깨어나서 꾸밀 틈이 없는 사람처럼.


 
그래서 태혁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승준이 분위기 깨듯이 나영에게 경고했다.


“앞으로 이 집에서 요리 금지야. 요리하다 불이라도 나면!”

“화재 보험 들면 돼. 그냥 해.”

“야! 네 집 아니라고!”

“내가 보험료 내줄게.”

그녀의 요리 때문에 두 남자가 말씨름하니 나영은 서둘러 말렸다.


“저 앞으로 요리할 일 없으니 두 분 그만 하세요.”

두 남자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자 나영은 손으로 식탁 의자를 가리키며 권했다.


“오늘은 이미 한 거니까 제 성의라고 생각하시고 맛만 보세요.”

태혁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엄지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응급실에서 손가락 잘린 환자를 봐도 굳건하던 가슴이 고작 반창고 붙인 손가락을 보자 시큰해졌다.

이런 사소한 것에 동요한다는 게 그도 좀 당황스러웠다.


“난 잠깐 화장실 좀.”

태혁은 곧장 승준이 가르쳐준 화장실로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나영은 오 씨 남매에게 말했다.


“두 사람 먼저 앉아요.”

승희가 먼저 식탁에 앉는데, 승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승준은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네? 지금 당장 집으로 오라고요?”

승준이 큰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듣고 나영과 승희는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금방 전화를 끊은 승준이 승희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가봐야 해. 빨리 일어나.”

“뭐? 갑자기 왜?”

“그건 가면서 말해줄게. 어서!”

승준이 급하게 구니 승희도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달칵.

그때 화장실에서 태혁이 나오는 걸 보고 승준은 곧장 그한테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나 차 좀 빌려줘.”

태혁이 승준에게 차 키를 넘겨주자마자 그는 바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오빠! 같이 가!”

승희가 핸드폰만 겨우 챙기고 혼자 가버리는 승준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갔다.

순식간에 오 씨 남매가 떠나버리고 집 안에는 그녀와 최태혁 교수만 남겨졌다.

나영이 그에게 설명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나 봐요.”

“아! 그래?”

태혁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반응했다.

사실 화장실에서 승준에게 전화 건 게 그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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