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빼앗기고 싶지 않아
(27/84)
27화. 빼앗기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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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빼앗기고 싶지 않아
2023.01.02.
“죄송합니다.”
나영은 그 말만 하고 가버렸다.
혼자 남은 태혁은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왜 사과하는 거야? 진짜 정이 없어서?
그녀의 사과 한마디에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싶었다. 분명 집들이 이야기까지만 해도 분위기 괜찮았는데 말이다.
그래, 그 말 때문이다. 오해.
태혁은 그 말에 노이로제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오해가 그의 삶에 존재했다. 그런데 그 오해 중 대부분은 그냥 오해인 채로 흘러가 버렸다.
그런데 나영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태혁은 저도 모르게 저항감을 느낀 거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말이 끼어드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태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펴며 나영을 뒤쫓아 갔다.
그냥 집들이 간다고 말만 했으면 끝날 일이었다. 이렇게 서로 감정 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집들이 간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태혁은 한참 걸어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핸드폰을 꺼냈다.
막 나영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윤이나가 내려서는 게 보였다.
그 일 이후 스치듯 보기만 했고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태혁은 마주치는 걸 피하려고 몸을 돌려 연구실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는데.
“최 교수.”
그를 부르는 윤이나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나 피할 거 없어.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태혁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윤이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이나는 소리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비겁한 진심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거절당할 걸 알면서 당당하게 고백할 수도 없었다.
그녀한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문나영은 너무도 쉬워 보였기에 더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상처주고 싶었나 보다.
“난 널 좋아하니까 그래도 된다고 정당화했었는데, 그럼 안 됐던 거였어.”
처음이었다.
윤이나가 먼저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낸 거.
그런데 그 말은 고백보다는 꼭 고해성사처럼 들렸다.
아마도 예전의 윤이나였다면, 그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자기 마음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넌 나보다 더 괜찮은 의사야.”
태혁도 과거의 일로 그녀를 비난하지 않고 사실만 말했다.
“그러니까 환자와 널 망치는 짓은 하지 마.”
윤이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나영한테는 나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녀의 입에서 나영의 이름이 나오자 태혁은 눈빛이 가늘어졌다.
미안한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아마 윤이나는 직접 문나영에게 사과했을 거다.
그저 그한테 보여주기 위한 말인 듯해서 태혁은 기분이 착잡했다.
원래는 문나영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윤이나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아서 그냥 연구실로 돌아갔다.
우선 차현을 만나야겠다. 그가 또 나영 앞에서 실수하지 않게.
***
“잘했어.”
차현의 칭찬을 받은 태혁은 꼭 욕을 먹은 기분이었다.
태혁은 못마땅한 눈으로 차현을 쳐다보았다.
“제대로 들었어? 문나영이 나한테 사과를 했다니까.”
그건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가 사과할 짓을 한 건 아니잖아.”
설마 놀리는 건가?
태혁은 이제 그런 의심이 들어서 눈빛이 사나워졌다.
“오늘 내 소개팅 때문에 모인 거 아냐?”
오승준이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불만을 토해냈다.
그는 집까지 양보하며 얻어낸 소개팅인데, 그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태혁이 새치기하듯이 자기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차현이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했다.
“그러니까 이쪽은 소개팅이 문제고, 너는 썸타는 의사 아가씨가 문제고.”
“썸은 무슨. 그냥 혼자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지.”
오승준이 놀리는 말에 태혁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그럼 우선 병날 거 같은 사람 문제부터 해결을.”
“아니지! 난 집도 내놨으니까 내 소개팅이 먼저지!”
그냥 차현만 불렀어야 했다고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 중 인간관계에 가장 능숙한 차현은 오승준에게 짜증 내는 대신 그의 핸드폰 잠금을 풀어서 내밀며 말했다.
“그럼 내 핸드폰에 있는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여자 골라 봐.”
오승준은 바로 입이 활짝 벌어졌다.
영화감독 차현이 아는 여자들이라면 연예인이나 셀럽도 많을 테니까.
오승준이 바로 차현의 핸드폰을 받고 신이 나서 사진을 보는 동안 차현은 태혁에게 말했다.
“상대방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건 좋은 일이야. 네가 쉽게 집들이 간다고 말했으면 절대 안 그랬겠지. 네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그 여자는 반복해서 네 말과 행동들을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러다가 계속 널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게 되겠지. 거기서 더 나아가면 드디어 본인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할 거야.”
그의 속 좁은 행동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던 태혁은 차현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그럼 나 집들이 간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야?”
“가긴 가야지.”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안 가면 그만 손해다.
“그럼 언제 간다고 말하는데?”
차현은 술잔을 들어 올려 잠시 생각하더니 마치 점괘가 나온 점쟁이처럼 대답했다.
“그 여자가 집들이 이야기를 또 꺼냈을 때.”
“끝까지 안 꺼내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태혁이 분명 화를 낼 거라 차현은 뜸을 들이는데 마침 핸드폰 사진 보고 있던 오승준이 여자 사진을 내밀었다.
역시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란 없다.
“나 이 여자로 할래.”
오승준이 찍은 여자는 차현의 영화에 출연해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장혜림이었다.
분명 청춘스타 은별도 장혜림 앞에서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깨갱거릴 거다.
“집 좀 빌려주고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는 거냐.”
태혁은 바로 오승준한테 양심도 없다고 욕했고, 차현은 과감히 장혜림 사진을 삭제해 버리고 오승준에게 다시 고르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
승희의 취미는 과자 먹으면서 드라마 시청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이 즐거웠다.
오늘은 그 옆에 나영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자꾸 생각나는 최태혁 교수를 그만 생각하고 싶어서 승희의 드라마 시청에 동참했다.
승희는 브라운관 속 남자 배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말했다.
“저 남자 주인공 최태혁 교수님 닮았지?”
“쿨럭!”
설마 드라마 보면서도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영은 먹던 과일이 목에 걸렸다.
그녀가 거칠게 기침을 하자 승희는 물잔에 물을 따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영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승희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눈치 없이 계속 최태혁 교수 이야기를 했다.
“요즘 여의사랑 간호사 사이에서 최 교수님 멋있다는 말이 자주 나와. 이제 그 독설에 익숙해지니까 로맨스 남주에 어울리는 외모가 눈에 들어오며 다들 딴마음이 생기나 봐.”
그리고 그가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보다 좀 더 친화적으로 바뀐 탓도 있었다.
나영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데 가슴이 따끔거렸다.
“누가 최 교수님이랑 윤이나 교수랑 같이 있는 걸 봤대.”
멈칫.
그녀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두 사람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윤이나가 그녀를 모함했을 때 최태혁 교수가 적극적으로 그녀를 보호해 준 걸 다 알면서도 나영은 승희의 짐작에 마음이 출렁였다.
윤이나와 최태혁 사이에는 그녀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있었으니까.
만약 윤이나가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제대로 사과를 했다면 최태혁 교수는 분명 용서해 주었을 거다.
그는 말만 거칠 뿐 마음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사람에 대한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한 번 마음이 열리면…….
“난 그만 들어가서 잘게.”
그녀가 일어나자 승희는 시간을 확인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럼 난 혼자 TV 보다가 자야겠다.”
승희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온 나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보았다.
<최태혁 교수.>
그가 윤이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말 궁금했지만, 전화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한테 집들이에 오겠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나영은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한테 세 번의 기회를 준 건 두 사람의 사이에 제대로 선을 긋기 위해서였다.
교수와 레지던트로만 남기 위해서.
그런데 아무래도 실패인 거 같았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자꾸 감정적으로 되는 걸 보니.
윤이나와 그의 사이가 이리 신경 쓰이는 걸 보니.
전에는 윤이나와 부딪히게 되면 최태혁 교수를 단칼에 잘라내겠다고 생각했었다.
여자 둘이 남자 하나를 두고 싸우는 건 추했으니까.
그땐 남자보다 그녀의 품위가 더 중요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윤이나든 누구든 최태혁 교수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영은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리고 여전히 집들이에 오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최태혁 교수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도대체 왜?
벌써 마음이 식은 거야?
나영은 쓸쓸해져서 몸을 작게 웅크렸다.
***
퇴근하던 태혁은 응급실 앞에 세워진 엠블런스에서 환자가 실려 나오는 걸 보고 차를 세웠다.
교통사고가 난 건지 여러 명이 한꺼번에 실려 와 있었다.
그는 당직이 아니었으니 상관하지 않고 그냥 가도 되었지만, 분주한 의료진과 환자들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태혁은 차에서 내려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
“TA(교통사고)환자입니까?”
한밤중에 갑자기 응급실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주는 태혁을 응급실 사람들이 경외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와! 최 교수님이 이렇게 천사 같은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덕을 쌓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잖나. 그는 운이 안 좋은 편이니 덕을 쌓는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교통사고 환자의 치료를 끝낸 뒤 흔적 없이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응급실 문이 열리며 배를 움켜쥔 환자가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여기요! 제 아들 좀 봐주세요!”
응급실 레지던트가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가서 복통 때문에 혼자 서 있지도 못하는 환자를 침대로 옮겼다.
태혁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환자를 주시했다.
“여기 아프세요?”
“아악!”
레지던트가 손으로 우측 하복부를 누르자 환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터트렸다.
촉진이 끝나고 CT실로 이동하는 환자를 쭉 지켜보던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Rrrrrrrrr Rrrrrrrrr-
[여보세요.]
상대방은 자다가 받은 듯이 목소리가 잠에 취해 있었다.
“네 손으로 직접 메스 잡아보고 싶으면 바로 병원으로 와.”
태혁은 필요한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
자다 깨서 최태혁 교수의 전화를 받은 나영은 옷을 챙겨입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응급실에 온 환자는 압뻬 판정을 받아서 보호자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있었다.
나영은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힘겹게 쉬며 최태혁 교수의 앞에 섰다.
“헉헉. 그런데 전 고작 1년 차인데 진짜 수술실에서 메스 잡아도 돼요?”
레지던트 2년 차는 되어야 수술 첫 집도의 기회가 생겼다.
“지금은 밤이라서 의료진이 부족하고, 집도의는 나니까 내 마음이야. 그래서 이 수술 들어갈 거야? 말 거야?”
그녀한테 선택할 기회를 주는 최태혁 교수의 담담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영은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집들이 오시면 저도 수술실 들어갈게요.”
그녀의 조건부 수락에 태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내내 궁금했다. 도대체 그녀가 언제 또 집들이 이야기를 꺼낼지.
역시 사람은 덕을 쌓아야 했다.
“집들이 안 가겠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그의 대답을 듣고 나영은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