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널 위해 뭐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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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널 위해 뭐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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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널 위해 뭐든 하는구나
2022.12.12.
태혁은 윤이나와 함께 보리굴비 식당으로 갔다.
윤이나가 식당 앞에 멈추어 서서 식당 간판만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기 좋아해서 혼자서도 먹고 간다며.”
그건 거짓말이었다.
태혁도 눈치채고 있는 줄 알았기에 지금 그가 일부러 그녀를 비꼬는 건지, 진심인지 윤이나는 잘 판단할 수 없었다.
그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할 수 없이 윤이나도 걸음을 떼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메뉴가 하나뿐인 식당이었기에 굳이 따로 주문할 필요는 없었다.
태혁이 물티슈로 손을 닦을 동안 윤이나는 수저를 꺼내서 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고마워.”
그의 감사 인사에 윤이나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저 일상에서 언제나 들을 수 있는 흔한 말이었건만 14년 동안 최태혁이 그녀한테 그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윤이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며 다른 손으로 꽉 눌렀다.
“오늘 왜 같이 밥 먹자고 한 거야?”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먼저 그녀에게 밥을 먹자고 했을 리가 없다.
그때 주문한 보리굴비 정식 2인분이 나왔다.
태혁은 젓가락을 잡으며 심상하게 말했다.
“우선 먹자.”
그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윤이나는 태혁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도 천천히 젓가락으로 밥을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혁이 밥을 다 먹었을 때 윤이나는 아직 반도 안 먹은 상태였다.
그는 원래 밥 먹는 속도가 빨랐다.
그가 수저를 내려놓자 윤이나도 같이 수저를 놓았다.
“더 먹어.”
그가 권하자 윤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불러.”
그녀가 더 안 먹겠다고 하자 태혁도 더 권하지 않고 물을 마셨다.
탁.
물잔을 내려놓으며 태혁은 윤이나에게 물었다.
“은별 흡연 글 네가 올린 거지?”
태혁이 다짜고짜 물었는데도 윤이나는 놀라지도 않고 말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그는 짧게 실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부정도 안 하네.”
“어차피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넌 나라고 믿고 있잖아.”
“응, 딱 네가 할 짓 같았거든.”
꾹.
윤이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세상에 최태혁뿐이었다. 그녀를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서 가끔은 그한테 따지고 싶었다. 그녀가 뭘 그리 크게 잘못한 거냐고.
“그래서 나한테서 원하는 대답 끌어내려고 일부러 밥 사준 거야?”
그런 거라면 끝까지 친절했어야지.
하지만 태혁은 그런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너한테 딱히 잘한 게 없더라고. 항상 재수 없게 굴었지.”
그래서 독하게 굴기 전에 편하게 밥 한 끼는 먹어야 그도 마음의 빚이 없을 듯했다.
어쨌든 그들은 14년을 알고 지낸 동기였으니.
“아냐. 매일 나 집까지 바래다줬었잖아.”
“그건 네가 스토커한테 다쳤다고 사기 쳐서 그런 거고.”
그의 가감 없는 말에 윤이나는 얼굴이 붉게 변했다.
태혁은 핸드폰에서 영상 하나를 틀어서 윤이나의 앞에 놓았다.
그건 병원 CCTV 영상이었다.
윤이나가 은별이 숨어서 담배 피우던 장소에 먼저 도착하고도 그냥 떠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문나영을 일부러 은별한테 보낸 거잖아.”
윤이나는 표정 없는 눈으로 CCTV 영상을 쳐다보다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그게 뭐? 이 영상이 내가 게시판 글 올렸다는 증거는 아니잖아.”
발뺌하는 윤이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태혁은 힘이 실린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은별은 네 환자야. 네가 지켜줘야 할 네 환자라고. 네가 이용할 수단이 아니라!”
그의 질책에 윤이나는 눈가가 붉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정한 얼굴이었다.
태혁도 윤이나가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할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어른은 아이보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바로잡는 게 힘드니까.
그는 핸드폰을 가져오며 윤이나에게 경고했다.
“은별한테 제대로 사과해. 안 그럼 이 영상 은별한테 보여줄 거야.”
말을 끝내자마자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식당을 떠나버렸다.
윤이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뚝.
그녀의 한쪽 눈에서 소리도 없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사랑받지 못한 이유를 알 거 같았지만, 그럼에도 억울했다.
왜 문나영은 되는데, 그녀는 안 되는지.
그녀가 문나영보다 뭐가 모자라서.
***
병원은 인터넷 게시판에 입원 환자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내용을 익명 글로 올린 사람에 대한 처분을 어떤 식으로든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은별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나영이라는 걸 이제 병원 사람들이 모두 알기에 다들 그녀가 그 글을 올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 인터넷에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녀가 단호히 부정하자 박 과장도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 선생이 평소에 안 그런 사람이라는 건 잘 알지. 그런데 문 선생 말고 은별이 담배 피우는 걸 본 사람이 없잖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한 적도 없다며. 그럼 그 글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문 선생 말고 누구라는 거야?”
나영으로서도 답답한 상황이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가 했다고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은별도 정식으로 사과만 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하니까 문 선생이 그냥 은별한테 사과해.”
그렇게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었는데 사과 한마디로 끝내주겠다는 건 엄청난 아량이라는 걸 알지만 나영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사과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사과하는 순간 문나영은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경찰 수사 맡겨서 익명 게시판에 글 쓴 사람 밝혀주십시오.”
이 일을 경찰서까지 끌고 가자는 말에 박 과장은 질색했다.
“은별이 용서해준다는데 왜 경찰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키워! 이런 일로 병원 이름이 자꾸 기사로 나가면 뭐가 좋다고.”
경찰은 절대 안 된다고 박 과장이 못을 박아서 나영은 무거운 마음으로 과장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는 게 다 느껴졌다.
그녀가 인정하지 않아도 이미 그녀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졌다.
“문나영 선생.”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그나마 답답했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최태혁 교수는 분명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믿어줄 테니까.
“할 이야기 있어. 따라 와.”
나영은 그를 따라갔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까와 달리 지금은 그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윤이나가 은별한테 사과할 거야. 그러니 넌 사과할 필요 없어.”
윤이나 교수가 사과할 거라는 말에 나영은 눈이 커졌다.
“인터넷 게시글 자기가 한 일이라고 인정했어요?”
나영이 의심한 사람도 윤이나 교수였다.
그녀 말고는 달리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했다는 어떤 물적 증거도 없어서 속수무책이었을 뿐이었다.
“아니. 인터넷 게시글 올라온 시간에 윤이나는 수술실에 있었어.”
글을 올린 게 윤이나가 아니란 말에 나영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윤이나 교수가 아니라고요? 정말요?”
태혁은 핸드폰에 저장된 CCTV 영상을 나영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나마 윤이나를 이 일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야.”
나영은 CCTV 속 윤이나의 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레지던트 1년 차인 그녀는 아직 따라잡을 엄두도 나지 않는 대단한 교수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이거 때문에 윤이나는 은별한테 사과할 거야. 안 하면 이 영상 은별한테 보여준다고 했거든.”
“그럼 익명 게시글 작성자 찾아내도 윤이나 교수는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나영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 말에 태혁은 그녀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될 거 같아서 나영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이나한테 가장 큰 벌은 사랑받지 못하는 걸 거야.”
나영은 고개를 들어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쭉 너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야.”
절대 위로가 안 될 줄 알았건만, 그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
사과하기 위해서 은별의 병실을 찾아온 윤이나는 병실 앞에 서 있는 나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영을 향해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 대신 사과하는 거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야?”
대신이라는 말에 나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영은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요.”
최태혁 교수가 보여준 CCTV를 처음 봤을 때는 기가 막히고 억울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제가 은별 찾고 있는 줄 모르셨잖아요. 그런데 왜 은별을 보고도 그냥 떠나신 거예요?”
그러니 윤이나가 그녀에게 덫을 놓기로 마음먹은 건 은별을 찾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이라는 말이 되었다.
은별을 발견한 순간이 아니라.
윤이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작 스무 살에 위절제술을 해야 하는 심각한 위궤양에 걸린 환자야. 내가 봤을 때 심리적인 요인이 컸어. 그런 환자가 그 좁고 더러운 곳에 숨어서 담배 피우고 있는데 그게 유일한 숨구멍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 담배만 다 피우고 나면 병원에서 흡연은 절대 안 된다고 경고할 생각이었어.”
나영은 할 말을 잃은 눈으로 윤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좋은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영에게 한 짓은 너무나도 음험한 사람이 할 짓이었다.
그 두 가지가 어떻게 한 사람일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신 분이 은별을 그 시궁창 같은 스캔들에 밀어 넣으셨다고요?”
“내가 아니라 너지.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잖아.”
윤이나가 그녀를 지나쳐 병실 문을 열었다.
그때 나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영은 반쯤 얼이 빠진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영아! 지금 병원 게시판에 은별 흡연 글 쓴 게 자기라고 밝히는 글이 올라왔어! 너 이제 괜찮아!]
전화 건 사람은 승희였다.
“게시글 올린 사람이 직접 해명 글을 올렸다고? 누군데?”
멈칫.
은별 병실에 들어가려던 윤이나가 멈추어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영도 고개를 돌려 윤이나를 쳐다보았다.
[PK 서남용이야. 우리 과에 있을 때 엄청 성실했는데 진짜 안 믿긴다.]
나영은 핸드폰을 아래로 내리며 윤이나에게 물었다.
“PK 서남용 아세요?”
그녀는 PK에 대해 물었는데 윤이나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다.
“최태혁은 널 위해 뭐든 하는구나.”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빛 안에서 선연한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최태혁 교수의 말이 맞았다.
윤이나는 그녀보다 더 오래, 더 깊게 고통받으며 살아갈 거다.